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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8호] #1. 다시 쓰는 역사 두 번째: 영도의 시작, 영도의 유산

부서명
전시팀
전화번호
051-607-8043
작성자
이아름
작성일
2025-12-03
조회수
21
내용

#1. 다시 쓰는 역사 두 번째: 영도의 시작, 영도의 유산






1. 영도의 시작

‘처음’이란 낯설고 신기하며 매력적이고 충격적이다. 17세기 동아시아 최초의 개항지가 된 일본 나가사키에 소개된 ‘의학’과 ‘생물학’을 비롯해 ‘양옥’, ‘설탕’, ‘커피’, ‘카스테라’, 그리고 ‘국민’, ‘사회’, ‘철학’ 등의 번역어 모두가 그랬다. 그 전대미문의 서구 문물을 싸잡아 부르던 말이 “니폰 하지메(일본 처음)”였다. 1876년 개항으로 근대의 창구가 된 부산에서의 ‘처음’이 던져준 느낌 역시 나가사키에서와 마찬가지였다.




그중에서도 충격적인 “한국 처음”이었던 ‘석유’, ‘동력선’에 얽힌 영도의 현대판 전설 한 토막이 있다. 1890년대 후반 어느 해, 미국에서 석유를 싣고 와 부산 영도에 정박한 스탠다드 석유회사 운반선에 조선 청년이 숨어들었다. 미국으로의 밀항을 요청하던 현명근이라는 청년은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대신 그 회사 부산 사무소의 직원이 되었다. 그가 바로 훗날 일본 우에노음악학교에서 성악을 배우고 돌아와 피난민을 위로한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른 가수 현인의 아버지였다.



왜 ‘영도’였고, ‘석유’였으며, ‘동력선’이었을까. 영도는 근대 수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동력선이 건조되고 석유가 판매되기 시작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1884년 조일통상장정과 1889년 조일통어장정으로 한반도 해역에서의 어로가 허가된 일본인 어부들은 “물 반, 고기 반”이라던 부산 앞바다의 어족자원을 노리고 부산으로 몰려왔다. 1887년 자갈치에서 영도로 이전한 다나카조선소가 일본형 발동기선을 건조하기 시작한 이래 일본인 조선소는 삽시간에 17개로 늘었고, 1889년에는 부산수산회사라는 수산물 위탁판매장도 설치되었다. 이후 동력선 운행을 위한 석유가 유통되기 시작한 영도에서는 1903년 27명의 도매업자가 영업에 나섰고, 1910년 유류 도매업을 시작한 다테이시는 1934년 군수(軍需) 산업체인 제유 공장을 세워 일본군의 대륙침략을 지원했다.



석유와 선박으로 촉발된 어업 발전은 음식으로 확대되었다. 1904년 영도에 ‘이주어촌’을 건설한 일본인 어부들은 주로 갯장어와 붕장어, 도미, 광어 등을 잡아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3배의 어획고를 달성했다. 그 생선으로 만든 ‘생선회’와 ‘어묵’이 유통되면서 부산인들의 입맛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일본인이 드나드는 요정이나 음식점에서 차려 내던 ‘생선회’가 한국인의 식탁에도 오르고, 회를 뜨고 남은 고기를 갈아 기름에 익힌 ‘어묵’이 인기를 얻으면서 영도를 비롯한 부산 각지에 어묵 공장이 들어섰다. 어느 겨를엔가 부두 노동자가 바닷바람을 맞으며 ‘어묵’을 먹는 모습은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1926년 매립이 끝나면서 물양장과 선류장(船留場), 요식업소, 유곽이 즐비하게 들어선 대평동은 조선업과 수산업의 중심지였고, 그런 점에서 이 지역 명칭으로는 “바람이 잔다”는 뜻의 ‘대평포(大平浦)’보다 “근대의 바람이 일어나는” ‘풍발포(風發浦)’가 더 적절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이곳 물양장에서 한반도로 퍼져 나간 유리, 도기(陶器), 왜간장, 소금, 비누, 과자, 성냥 등은 한국인의 생활에 매력과 함께 충격을 안겨 주는 바람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처럼 영도에서 시작되어 “한국에서 처음”이 된 라디오와 전화, 사진 등 근대문물은 부산과 한국 전체를 속속들이 바꾸기 시작했다. 이를 받아들여 퍼뜨리는 영도와 부산은 인체에서 인후(咽喉)에 해당하는 기관이었다. 1922년 소설가 염상섭의 “부산의 운명이 조선의 운명”이라는 말을 패러디하자면, 영도의 운명이 부산의 운명이었고, 부산의 운명이 곧 한국의 운명이었다.


2. 영도의 과도기

1907년 이인직이 소설 「혈의 누」에서 “화륜선과 경부선 철도가 닿는 도시”라고 찬탄한 부산은 국제도시이자 교통도시였다. 시베리아 철도가 개통되면서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여객 3분의 2가 부산을 경유했고, 그들을 실어 나를 국제선 정기항로가 부쩍 늘어났다. 그에 따라 1920년대 이래 영도 주위의 선박 왕래 역시 번다해졌다. 1930년대 들어 만주사변 발발로 대륙에서의 긴장이 고조되자 일본을 오가는 전함과 수송선 왕래도 한층 잦아졌다.



그러자 군부를 중심으로 군선(軍船)을 만들어 내라는 요구가 비등하는 참에 정어리 조업 활황과 식민지 공업의 발전으로 강선(鋼船)의 수요가 부쩍 늘었다. 이에 부응해 식민 당국은 “조선업을 중심으로 부산이 세계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그 사명을 영도에 떠맡겼다. 조선총독부의 독려와 지원을 받는 일본 최대의 조선업체 미쓰비시중공업은 1937년 영도 봉래동에 조선중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조선업 요충지”가 된 영도의 지정학적 운명은 전쟁 수행을 위한 원료·원자재 공급과 조선업이 맞아떨어지는 일본과 한국의 결절점(結節點)이었다. 바다 건너 규슈 지역 북부에는 메이지 시대 일본 최대의 석탄 생산지인 치쿠호오탄광 지대가 있었다. 그곳에서 캐낸 석탄 6톤으로는 인근 기타큐슈에 있는 야하타제철소에서 1톤의 강철을 만들 수 있었고, 그 강철로 영도에서 군선(軍船)을 건조할 수 있었다. 그 배로 무기와 병력을 실어 나르면 중국의 무순탄광 지대를 점령할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더 많은 석탄으로 더 많은 강철, 더 많은 강철로 더 많은 기차·대포·탄환을 만들어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완수가 가능하리라는 것이 일제의 책략이었다.

점차 파시즘에 매몰되어 가던 일제는 침탈과 지배의 야욕을 감추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표방한 ‘한반도 근대화’는 허울 좋은 명분이자 거짓이었다. 19세기 말 일제가 추진한 항만 건설부터가 표면적으로 내세운 ‘교통과 관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륙침략을 위한 교두보 구축이 진짜 목표였다. 1919년 자갈치와 영도 사이에 투입된 발동기선 운영도 영도 주민의 편의와 무관한 일본인들의 돈벌이 수단에 불과했다. 1934년 부산대교(영도다리) 건설 역시 ‘궁민구제’를 내세우긴 했으나 실제로는 영도를 쓸모 있는 지역으로 만들어 일본인의 토지 매수와 보상, 재산 증식, 생활반경 확장을 노린 사업이었다.

그처럼 식민 당국이 추구한 명분과 실제가 달랐기에 그들이 추구한 근대화의 그늘은 짙고도 깊었다. 항만이나 발동기선, 부산대교처럼 일본인의 일방적 이익을 추구하는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일제는 애초 식민도시 부산을 건설하면서부터 ‘이중도시(二重都市) 건설’을 방침으로 삼아 식민지인과 일본인의 주거지를 분리했으며, 그러한 차별을 교육과 사법제도, 문화정책 등 모든 식민정책에 적용했다.

그에 해당하는 가장 치졸한 예가 영도에 설치된 유흥시설을 부르는 명칭이었다. 그들은 동삼동에 주둔하던 일본군 해군특공대 장사병이 드나들던 대평동 ‘미사키마치’의 유흥시설을 제법 근사한 이름 “유곽(遊廓)”이라 불렀다. 그에 비해 한국인 노무자나 어부들이 주로 드나드는 봉래동 ‘히빠리마치 골목’의 그와 같은 매매춘 시설에는 “창녀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곤 한국 전역에서 징발해 남태평양 전선으로 떠나보낼 종군위안부들을 그 인근에 설치한 ‘영도 제1합숙소’에 가두어 두고, 일본에서 건너오는 해군 병사를 상대하게 했다.

“한국에서 처음”을 수용하거나 감당하면서도 영도는 어디까지나 ‘군사기지’이거나 ‘준공업지’, ‘이주어촌’ 아니면 “주변부”나 “2급지”로 불렸다. 그런 차별과 푸대접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주어진 역할을 감당해 온 지역이 영도였다. 그러므로 영도는 지난 역사를 기억하는 지역 원로들의 말처럼 “섧게 자라고도 효자 노릇 하는 자식” 격이었다.


3. 영도의 저력

일제강점기를 치르면서 영도는 피동적 근대화와 식민 통치로 인한 혼란과 충격, 차별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도 지역민은 도리어 그 시련으로부터 선한 포용력과 삶의 의지를 길렀다.

그들의 선한 포용력이 특히 빛을 발한 것은 6·25 전란기 피난민을 맞이하면서였다. 1950년 피난살이가 시작되던 초기, 영도 봉래동의 대한도기회사 부지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이 임시 거주지를 마련했다. 하지만 난데없는 대화재로 그마저 사라지자 피난민들은 영도의 해안가를 비롯해 영도다리 아래 빈터에 움막을 짓고 이슬을 피해야 했다. 다시 1953년에는 역전 대화재로 발생한 이재민을 이주시키면서 봉래산 기슭을 비롯해 청학동, 신선 1·2동, 봉래 3동, 영선2동에 수백 채의 판잣집이 들어섰다.

물과 연료 부족에 시달리며 간이주택과 공동취사, 공동화장실로 버티던 피난민들이 그 험난한 피난살이를 이겨 내기에는 정부의 구호 조치나 생존 의지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들이 그나마 삶을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곳간을 열어 식량을 나누고 사랑방과 헛간을 비워 잠자리를 마련한 영도 주민의 배려와 보살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처럼 피난민과 더불어 고난과 아픔을 나눈 영도 주민들이었기에, 그들은 2013년 피난 시절 기억이 담긴 영도다리가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대뜸 피난민 출신 이웃과 함께 목소리를 모아 복원을 요구하고 나섰다.




1951년 10월 현 부산보건고등학교 부지에 천막 교사를 세워 독자적으로 개교한 연희대(연세대)를 비롯해 주요 대학이 연합대학 형태로 교육을 이어 간 일 또한 영도 주민의 지지와 성원이 드러난 사례였다. 세계사 어디에서도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전시(戰時) 교육”의 중심 연합대학 신입생 경쟁률은 무려 3.81대 1에 달했다. 이처럼 전쟁의 와중에 공부할 마음을 갖도록 만든 것은 일찍이 1908년 사립 옥성보통학교를 세우고 나룻배 다섯 척을 운행하여 운영을 지원하던 영도 주민의 교육열이 투사된 결과였다.

무엇보다 영도 주민의 적극적 삶의 의지를 드러낸 이들은 해방기와 6·25 전란기, 산업화기에 근로자로 나선 여성들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부산을 찾아왔으나 가장인 남편의 부재나 무능으로 위기에 처한 주부들이 체면을 돌아보지 않고 노동 현장으로 뛰어들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다름 아닌 영도 여성들이었다.

기왕에도 영도에서는 어부인 남편이 잡아 온 해산물을 팔기 위해 행상으로 나선 아낙들이 동삼동에서 시내로 나가는 아리랑고개를 넘나들곤 했다. 1887년 이후로는 제주에서 건너와 ‘제주마을’을 만들어 영도에 정착한 ‘출가해녀’들이 억세고 당찬 물질을 보여주었다. 그 아낙들과 해녀들이 서슴없이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 일하는 모습은 귀환 동포나 피난민, 이향민으로 영도를 찾아온 여성들의 근로 의욕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해방 직후부터 1960~70년대 산업화기, 영도 영선동과 신선동, 청학동 판잣집에 거처를 마련한 여성들은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을 드나들느라 아침저녁으로 영도다리에서 출퇴근 경쟁을 벌였다. 스스럼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시장에 좌판을 펼치거나 난전을 마련한 그들의 존재는 어느덧 부산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더구나 ‘원양어업 붐’이 일어난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줄잡아 2~300명을 헤아리는 여성들이 영도의 선박 수리업체에서 ‘깡깡이아지매’로 일했다. 대평동 ‘조선소거리’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뱃전의 녹을 떨어 내던 그들은 난청을 비롯한 산재와 임금 수탈, 주위의 질시에 시달리면서도 가정을 지키는 한편 원양어업과 조선(造船) 강국의 뒤를 떠받친 숨은 영웅들이 되었다.

그처럼 시대적 고난과 생존 위기의 극복, 그로 인한 회생(回生)과 재생(再生)은 영도에서의 삶의 문법이었다. 그것은 단지 ‘근대화’를 피동적으로 수용하고 감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위험과 시련을 이겨 내는 적극적인 의지였다.

필시 그로부터 동력을 부여받았을 기적적 사례가 영도에서 기사회생한 조선업이었다. 한때 일본에서 만든 철로 강선(鋼船)을 건조하던 영도의 조선업은 1945년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막을 내렸다.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길고도 암울했던 침체기를 보내는 동안 영도에서의 조선업은 영선동과 봉래동 선착장에서의 목선 건조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불어닥친 ‘원양어업 붐’은 영도 ‘조선소거리’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었다. 선령 20~30년의 400톤급 중고 강선(鋼船)을 수리해 뛰어든 원양 어로의 무대는 1980년대 초반이 되자 블라디보스토크 인근해와 포클랜드 연안해로 넓어졌다. 영도 대평동 포구에는 하루 400척의 배가 드나들고 수천 상자의 생선이 거래되었으며, 선원모집센터가 붐비고 골목마다 선술집과 다방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원양어선에서 내린 어부들은 커다란 다랑어를 끌고 다니며 밥값, 술값을 계산했고, 가정과 식당마다 냉장고에 통조림이 들어찼다.

“전국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영도 대평동 ‘조선소거리’에서는 200여 개를 헤아리는 철공소와 선구점, 부품상 근로자마다 “배에 관한 것이면 무엇이나 만들 수 있고 제공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넘쳤다. 어느 겨를엔가 중고선만 수리하던 조선소가 자체 제작한 디젤엔진을 수출할 정도로 기술 습득과 진보 역시 빠르고 놀라웠다.

1990년대 이래 선박이 대형화되면서 영도 ‘조선소거리’에는 대대적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인근 감천동이나 다대포, 진해, 거제로 빠져나가 약진을 거듭하던 조선업체는 드디어 2000년대 초반 한국을 세계 1위 ‘조선 강국’ 자리로 올려놓았다.

그런 시대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영도 주민들도 바다로 나아가 삶을 개척했다. 원양어선 선원과 파월 장병, 중동 파견 근로자, 송출 선원은 영도 포구와 부산항에서 배에 몸을 싣고 먼바다로 나섰다. 영도는 그들을 키워 낸 산실(産室)이었고, 그들이 뛰어든 바다는 헤겔의 말처럼 “운명 전환의 입각점”이었다.


4. 영도의 문화유산

부산포에 딸린 작은 섬 영도는 진시황의 고사에 등장하는 봉래산(蓬萊山) 주위에서 신선이 노닐고 불로초가 자라는 별세계였다. 이를 달리 말하면 거주지로 인정받지 못하는 방외(方外)의 낙지(落地)라는 뜻이었다. 특히 조선조 초기부터 시행된 공도령(空島令)으로 섬을 비우면서 육지와의 단절은 더욱 심해졌다.

영도가 시야에 들어오고 돋보이기 시작한 건 근대기부터였다. 대평동에 조선업체가 들어오고 물양장과 선류장이 설치되면서 생필품과 일용품 공장이 속속 들어섰다. 태평양전쟁 막바지가 되자 일제는 “미군을 막아 낼 천혜의 보루(堡壘)”라거나 “일본 나가사키까지 해류에 실어 물자를 주고받을 바다의 고속도로”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인위적이고 일방적이며 편의적인 잣대로 남의 삶터를 제멋대로 이용하고 명명하는 식민제국의 작태였다.

지역의 진정성은 그런 잣대나 속셈이 아니라 지속적인 삶의 맥락이 깃든 문화유산에서 찾아야 한다.

1985년부터 시작된 일본 요코하마의 ‘미나토미라이21’은 현재 부산에서 진행 중인 북항재개발의 모델 격인 사업이었다. 천문학적 자본 투자에 비해 성과가 시들했던 그 사업을 뒤늦게나마 떠받쳐 준 것은 지역에 축적된 문화유산이었다. 개화기 은행 건물에서 예술작품을 전시한 〈뱅크아트1929〉와 개항기 붉은 벽돌 창고를 활용한 명품 상가 조성, 모토마치에서 파는 전통 수공예품, 요코하마 항구의 야경, ‘외국인 묘지’ 주변의 풍광 등이 부각되면서 비로소 요코하마는 개항 당시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세계적 무역항이자 도시국가인 싱가포르 역시 최첨단 교통과 업무용 빌딩만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한 쾌적함(amenity)을 센토사섬으로 보완하고 있다. 인공해변과 멀라이언 파크, 빌라촌을 누비는 모노레일은 도시민과 관광객을 원주민의 수상가옥촌에서 주 3일 계속되는 뮤지컬 공연 무대로 안내한다.

그와 비교할 것도 없이 태종대와 봉래산 반딧불, 숱한 문화유적을 지닌 영도는 요코하마나 싱가포르에 비해 훨씬 윗길의 청정지역이자 문화의 저장고이다.




신석기시대 패총으로 유명하고 ‘아랫서발’, ‘검정바우’, ‘웃서발’ 등 옛 지명이 남아 있는 동삼동 풍어제는 영도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주민 상당수가 오랫동안 연근해 어로에 종사해 온 이 마을은 1970년대 태종대를 잇는 도로 개설로 횟집과 식당이 즐비하게 들어선 ‘도시어항’이 되었다. 이곳에는 매년 정월 14일 중리산 자락의 ‘할배당’과 마을 안 ‘할매당’을 오가며 치르는 동제가 150여 년간 전승되고 있다. 60여 년 전부터는 매년 음력 3월 초 동해안별신굿을 유치해 풍어제를 지내 왔다. 10여 년 전 잠깐 풍어제를 중단하고 축제 형식의 굿판을 개최했을 때 마을 노인들의 이의와 불만이 쏟아졌고, 결국 마을 원로들이 나서 강릉단오제 공연팀을 불러 풍어제를 복원했다. 도시화되어 가는 어항에서 도리어 ‘원형적 제의’를 선호하고 전승하는 매우 특이하고도 귀한 사례였다.

영도의 선박 수리업체에서 일하던 ‘깡깡이아지매’의 삶 역시 산업화기를 통과하며 영도가 축적한 문화유산이다. 그들은 ‘아리랑고개아지매’와 ‘출가해녀’, ‘자갈치아지매’, ‘국제시장아지매’에 이어 ‘재칫국아지매’, ‘공동어시장아지매’와 더불어 헌신과 희생의 가치를 실천한 부산 여성 근로자들이다.




2016년부터 5년간 영도 대평동 ‘조선소거리’에서는 ‘깡깡이아지매’의 삶을 모티프로 한 문화예술사업이 전개되었다. 이 사업에서는 독일 작가 핸드릭 바이키르히의 벽화 ‘깡깡이아지매’를 비롯한 80여 점의 공공미술 작품이 선보였다. 마을회관을 신축해 1층에는 바리스타 교육을 받은 주민이 운영하는 커피숍이 들어서고, 2층에는 패널과 장비 등을 전시한 ‘깡깡이박물관’을 조성했다. ‘예술상상마을사업’, ‘산업관광’, ‘문화도시사업’, ‘통선복원사업’ 등을 전개하는 한편, 주민들이 직접 ‘마을신문’을 제작하고 ‘정원동아리’ 등에 참여하며 ‘마을해설사’로 활동했고, 시를 발표하고 춤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사업으로 “성공적 도시재생 모델”로 외부에 알려진 대평동에는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하려는 다른 지역 주민이나 공무원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그처럼 온축(蘊蓄)된 영도의 문화유산 가치를 외부인이 먼저 인정한 적도 있다. 2010년경 부산시가 초청한 미국의 유명 건축가이자 미래학자에게 부산 전역을 보여 주고 “가장 부산다운 곳이 어디인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로부터 얻은 대답은 뜻밖이지만 신선했다. 그는 해운대나 원도심이 아니라 영도 고신대 아래 비탈길 골목을 가장 부산다운 장소로 꼽았다. 해운대 신시가지나 마린시티, 원도심의 주택가나 상가는 다른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만, 고신대 아래 주민들의 삶이 만들어 낸 골목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경관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좀 더 시간을 들여 그에게 영도에 전해 오는 봉래산 영도할매 전설과 아씨당 설화, 장사바위 이야기와 동삼동 동제와 풍어제, 깡깡이아지매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어땠을까. 영도가 단지 ‘한국에서 처음’만 받아들인 게 아니라 근대문물을 수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전란을 이겨 내고, 산업화를 주도한 사례를 구구절절 설명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그 미래학자는 영도에서 과거가 아니라 ‘오래된 미래’의 가능성을 보았다거나 후기산업사회의 잠재력을 찾았노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영도를 바라보는 시선을 인구 감소와 빈집 증가, 노령화율 30%라는 오늘날의 현실에만 고정시키지 말아야 한다. 생태와 약자를 우위에 놓고 자연 속에서 추구하는 여유와 휴식, 느림과 쾌적함이야말로 첨단 기술과 과학 이상의 가치가 있음을 전제로 영도의 자연과 문화를 다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최근 들어 타지에서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영도를 “카페의 성지(聖地)”라 부르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커피 산업을 지역 브랜드로 특화시키고 해양관광문화 시설을 구축하여 글로벌 페스티벌을 개최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 영도이다.

그런가 하면 북항재개발로 구현될 첨단도시의 기능을 동삼동의 전통문화와 봉래동·대평동의 근대 문화유산과 수변 경관, 청학동의 해양산업 클러스터로 보완하거나 조화시킬 적지 또한 영도이다. 2035년 완공 예정인 도시철도 계획과 신공항 개항의 효과를 연장시켜 도시공간을 재편하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확장하여 영도를 더욱 돋보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은 흔히 “한국에는 왜 노포(老鋪)가 없는가?”라고 묻는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 온 한국의 도시에서는 낡은 상점이나 대를 잇는 전문점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산에는 영도가 있다. 지난 시절을 회고하는 노년층이 말년에 둘러보길 원하고, 지난 시대를 재현하려는 영화감독들이 영도를 찾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오래되어도 낡지 않고,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한 가치로 현재와 미래에 두루 유용하게 쓰이는 자원을 문화유산이라 한다. 영도는 그런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