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근대역사관
#1. 다시 쓰는 역사 두 번째: 부마민주항쟁, 얼마나 잘 알고 계십니까?
“부마민주항쟁(이하 부마항쟁)을 아시나요?” 어디에선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어느 정권 때인지, 연도와 날짜가 어떻게 되는지, 첫 시위가 발발한 장소가 어디인지… 이 정도를 답변할 수 있다면, 나는 ‘부마항쟁을 잘 안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부산 시민들의 부마항쟁에 대한 인지도는 얼마나 될까요?
부마항쟁 40주년이 되던 2019년, 부산대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는 여러모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하여 씁쓸합니다. 학생, 교수, 직원, 조교 등 총 4,357명이 응답한 이 조사에서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이름만 들어봤다거나(24%), 대략 알고 있다고 응답한 경우(69%)가 절대다수였고, 잘 알고 있다고 응답한 이는 단 7%에 불과하였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76%가 대략이라도 알고 있다니 나쁜 결과는 아니라고 누군가는 안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항쟁의 발원지가 부산대라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38.2%였고, 심지어 국가기념일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대답이 절반에 가까웠다고(42.26%) 하니, 말 그대로 무관심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약 70%가 ‘대략’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 도서관 앞에서 시작된 ‘유신철폐’ 시위는 시내로 번졌고, 18일 마산으로 확산되어 대규모 항쟁으로 타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항쟁은, 18년간 이어진 박정희 독재정권을 끝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3일(16∼18일), 마산에서 2일(19∼20일)간 지속된 이 항쟁에 정권은 각각 계엄령과 위수령을 선포하는 것으로 대응하였고, ‘발포’ 발언이 오가던 ‘그날’ 대통령의 술자리는 결국 하극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항쟁의 발원지 부산대에는 항쟁 9주년인 1988년 ‘부마민중항쟁탑’이 건립된 것을 비롯하여, 20주년, 40주년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기념물의 숫자가 늘어나 캠퍼스 곳곳에서 항쟁의 열기를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마항쟁을 잘 안다고 자신하시는 여러분!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뿐 아니라, 그 ‘전후’도 항쟁 기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2020년 6월 9일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약칭 ‘부마항쟁보상법’) 일부가 개정되면서 종전에 비해 기간 규정에 다소 여유가 생긴 셈인데, 그 결과 부마항쟁에 영향을 주었던 이 시위도 항쟁의 한 갈래로 뒤늦게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현재 부산광역시 남구청이 위치한 곳에는 1979년 당시 부산공업전문대학(이하 부산공전)이 있었습니다. 훗날 부산공업대학(교)으로 개칭하였다가, 수산대학교와 통합하면서 지금의 부경대학교가 되었지요. 그러니까 현재의 부경대 용당캠퍼스로 이전하기 전, 남구청 자리에서 부산대 시위 꼭 한 달 전인 9월 17일 반유신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2년제 전문대에서 반유신 시위라니? 누구라도 의아해할 이 시위의 동력은 10명 남짓의 인문학 공부 모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모임에 참여한 학생들의 사연은 제각각이었습니다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세상과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었을까요? 그들이 함께 읽고 토론하며, 연극 공연까지 올려 곱씹어 보았다는 작품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입니다. 지금은 교과서에도 수록되는 고전이 되었지만, 그 시절에는 무시무시한 ‘금서’였답니다.
스무 살 남짓 또래 친구들의 이 공부 모임이 반유신 시위를 위한 결사체로 성격이 바뀐 계기는 그해 8월의 ‘YH 사건’이었습니다. 가발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야당 신민당사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자, 박정희 정권은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 해산하였고, 그 와중에 노동자 1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분개한 청년들은 2학기 개강과 함께 시위 준비에 돌입하였으나, 부산공전의 시위만으로는 성과를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타 대학 학보사나 동문 친구들을 방문하여 시내에서 시민들과 함께 시위를 벌이자고 설득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었던 부산대를 동참시키는 데 실패했고, 학교 측이 사전에 계획을 탐지하여 주도자 학생을 감금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대로 좌절되는 듯했으나, 다른 학생들이 시위를 강행하면서 결국 계획했던 날짜보다 하루 일찍 성사되었습니다. 비록 무르익지 못한 공전의 분위기로 인해 10∼15분 남짓 만에 학교 측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지만, 당당히 부마항쟁의 서막을 연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록에 관심이 많습니다. 최초, 최후, 최장, 최대… 이런 수식어들은 언제나 뜨거운 논쟁거리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런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부산공전 시위가 어렵사리 점화에 이른 불씨였다면, 부산대 시위는 대폭발의 도화선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부산대 외에도 항쟁의 불씨는 곳곳에 살아 있었고, 항쟁의 사적지로 기억될 장소는 많다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부산공전 시위를 예로 들자면, 과거 캠퍼스였던 지금의 남구청 일대뿐 아니라, 시위를 계획하기 위해 모였던 해운대 바닷가, 거사의 성공을 기도드렸던 대연성당 등 생각지도 못했던 우리의 일상 공간이 바로 역사의 무대였습니다. 더 많은 장소를 기억하고 기렸으면 합니다. 부산공전의 후신 부경대학교에 이 ‘역사적 점화’의 순간을 기억하는 작은 기념비를 세우는 것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