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터전 애환의 고갯길 <기장옛길>
동래, 철마, 양산으로 통하는 장터길
- 내용
장자편에 보면 도행지이성(道行之以成)이란 말이 있다. ‘길은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걸어다니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크게 공감이 가는 말이라 나는 평소 등산이나 트레킹을 하면서 없는 길이라도 자주 다니다 보니 길이 만들어지는 현장을 몸소 경험하고 있다.
기장옛길 안내 표지판
기장읍 서부리에 1km 남짓한 옛 산길이 있다. 용소옛길 또는 기장옛길로 부르는 제일 높은곳이라고 해봐야 해발 100m도 안되는 나즈막한 고갯길이다.
기장옛길
기장옛길 안내 표지(기장읍성, 기장옛길)
잔도의 흔적 표지판
기장옛길 중간지점돌탑과 기러기 목각상
기장옛길 출발지점
이 기장 옛길은 기장읍성에서 동래로 연결되는 도로로 옛사람들이 두 지역을 왕래하며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도로이다. 따라서 건립 시기를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으나 2,0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하고 있다. 옛날 소 장수나 봇짐장수, 백성들이 이고 지고 걷던 길이며, 조선 후기 기장, 동래, 철마, 양산 등지의 장터를 오가며 걷던 길이다.
여근석 전설(여근석 안에 돌을 던지며 소원을 빌었던 자리)
이 고갯길은 기장으로 부임해 왔다 떠나가는 많은 현감과 군수, 그리고 관찰사와 어사들의 허다한 사연이 얽힌 고갯길이기도 하다.
기장엣길 유래
기장옛길 마애석각(현감, 군수의 이름이 새겨져 있음)
또 배고프고 못 살던 보릿고개 시절 우리네 엄마들이 갈치와 미역 등 해산물을 이고 지고 동래와 송정 장터로 팔러다니던 한 많고 눈물겨운 고갯길이기도 하다.
기장옛길 정자터
무거운 짐을 이고서 하루종일 시달리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릴 때 빈 광주리 머리에 얹어 이고 이 고갯길을 내려오며 불렀다는 고된 삶의 팔자타령 소리는 이 계곡의 적막을 깨뜨리면서 개울물도 따라 슬퍼했다는 애환이 담긴 고갯길이기도 하다.
계곡을 따라 형성된 기장 옛길
기장 옛길은 조선 시대 기장현으로 관리가 부임할 때 이용했던 길이자, 개항기 동학 혁명[1894] 당시 청년들의 봉기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며, 일제 강점기 신작로 개설 이후 애국지사들이 추격을 피해 넘던 길이라고 한다.
잔도의 흔적(험한 벼랑같은 곳에 낸길)
일제강점기 이 지역의 민족주의자들이 이 고갯길을 넘어 망명의 길을 떠나면서 굽이마다 돌아보며 주먹을 불끈 쥐던 고갯길이기도 하며 조선 말기 고을 백성을 괴롭히던 어느 현감을 마을 청년들이 잡아 상여틀에 묶어 저승가를 부르면서 동문 밖으로 져다버린 길이기도 했다.
2천년을 두고 양반과 서민 그리고 수 많은 등짐장수와 나뭇꾼들이 밟아왔던 고개의 바윗길은 권세자와 천민들의 자취는 간곳 없고 고갯길만 외롭게 기장지역의 오랜 역사를 남겨주고 있는 소중한 옛길이다.
애환의 기장 옛길
사람은 길을 만들고 길은 사람을 이어준다. 길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녹아 있다.
기장옛길 정상 부분
우리 인생도 쭉 뻗은 고속도로 같은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험한 비 포장길도 있고, 오르막 길이 있는가 하면 내리막 길도 있다. 인간에게 길은 특별하다. 길 너머에는 깨달음이 있다고 흔히들 이야기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길을 닦아서 연다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있는 일이다. 길이라는 것은 지역간의 장벽을 허물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하고 비전을 제시해주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기장옛길 출발지점 용소천 오리가족의 한가로운 오후
우리의 삶과 애환이 서려있는 기장옛길 시간나면 한번 찾아보고, 보호하고 관리하여 후손들에게 소중한 유산으로 물려주는데 함께 동참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김동균(金東均)
- 작성자
- 김동균
- 작성일자
- 2023-02-23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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