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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부산이야기 통권 제115호(2016년5월호)호 기획연재

나무토막 깎고 다듬어 생명의 혼 불어넣는다

40년 전통 목공예 외길 정진 … ‘기술’ 뛰어넘어 ‘예술’ 반열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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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남구 용당동광안공예연구소 작업장. 몇몇 목공예 기능인들이 목각을 다듬느라 시간을 잊고 있었다. 더러는 구름문양을 기계톱으로 잘라내고 다듬고, 어떤 이는 나한상을 빚고, 어떤 이는 불상대좌의 연화문을 조각도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곁에 사람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오로지 작업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목조각 공방 한편 조각대에 앉아 해태상을 조각하는 김규영(57) 명장을 만났다. 법당 수미단(須眉壇) 부착할 20cm 크기의 목조 해태상이 명장의 손에서 생명을 얻어가고 있었다. 머릿속에 그려진 해태상이 그의 손길을 통해 재현되는 순간이다. 가볍게 조각도의 칼끝이 예리하게 파고들어 갈기를 만들고, 내민 앞발 발톱도 날카롭게 다듬어진다. 굵은 안경테 명장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며 다문 윗입술이 잔잔한 얼굴에 근육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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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손재주부산공예학교 수석 졸업

 김 명장은 경남 진주시 진성면, 장마가 지면 항상 물에 잠겼던 남강변 가좌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지독한 가난을 경험하고 살았다. 평생 목수일밖에 몰랐던 아버지는 명장이 초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공구가방 둘러 메고 도시로 찾아 떠나고, 집에는 병든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남매가 남겨졌다. 할머니와 어머니 병수발 하랴 끼니 마련하랴 어린 동생들 건사하랴, 어린 나이에 짊어진 멍에가 너무 벅찼다. 게다가 어머니마저 장티푸스로 별세하고 보니 천애의 고아가 따로 없었다. 새엄마를 따라 부산 당감동에 단칸방을 얻어 이사 왔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주례중학교 3학년 담임교사가 가정방문을 왔다. 그토록 어려운 가정형편 내색 한번 안하고 항상 밝으며 학업성적까지 뛰어난 명장의 용기와 꿋꿋한 기상을 보고 놀랐다. 담임교사는 명장에게 당시 개교를 앞둔 특수학교인 부산공예학교 진학을 권했다. 진작부터 보아온 뛰어난 손재주로 공예기술을 배워서 당당히 앞길을 개척해 보라고

 

 1974 부산공예학교 목조각과에 입학했다. 부산공예학교는 학생들이 미술의 과정을 섭렵하도록 교육과정이 구성된 이른바 실험학교였다(공예학교는 1974 개교 이후 디자인고등학교를 거쳐 지금은 한국조형예술고로 교명을 변경했다).

 

 1학년부터 3년간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고교 3학년 11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목공예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지방경연대회에서 수상한 우수한 기능인들이 모여서 겨룬 결과였다. 부산공예학교 1 졸업생, 19 어린 나이로 전국기능경기대회 최연소 금메달리스트가 것이다.

 

 

 

20살에 공예사 공장장 … 1987광안공예사설립

 

 김 명장은 졸업을 앞두고 일본인이 경영하는부산공예사 공장장으로 당당히 스카우트 됐다. 즈음 일본에서는 가정마다 불상과 조상의 위패를 함께 모시는 가정용 소규모 불단이 대유행이었다. 높이 2m 정도의 2층장 형태로 불단 1층은 수미단을 닮은 불단이고, 2층은 감실을 만들어 부처를 모시거나 더러는 조상위패를 만들었다. 정교한 목조각이 불단을 감싸는 화려하고 장엄한 불단이었다.

 

 부산에도 같은 종류의 업체가 30여곳 있었으나 명장이 총괄해 만든 가정용 불단은 일본에서 단연 인기여서, 부산공예사는 대량생산 체계를 갖추고 불단반제품을 매달 수천 세트씩 수출했다. 많은 기술자들이 분업해 제작했고 기술자도 400여명으로 불어났다

 

 그런 한편 어린 공장장을 얕본 고참 기술자들의 반목으로, 한때 작업장이 냉랭하기도 했었단다. 심지어 능력 위주의 일품 분배에 불만을 품은 고참 여럿에게 물매를 맞기도 했지만, 이를 악물고 진심어린 설득과 조각 실력으로 버텨냈다.

 

 그런 배짱과 자신감으로 결혼 1987광안공예사 설립했다. 연로한 장인이 운영하던 광안동 철공소 건물을 물려받아 뜻이 맞는 3명의 직원과 함께 했다. 지난 10 간의 수요자 중심의 대량생산에서 벗어났다. 공예인으로서의 품격을 갖추고 싶어서였다. 자신이 연구하고 창안한 공예품으로 승부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동의과학대학 야간대학에 다니며 1980 디자인기사 자격도 획득하고, 목조각 기능의 이론을 정립하는 내면의 세계를 공고히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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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영 부산 초대 공예 명장은 뛰어난 목공예 솜씨로 한국은 물론 일본인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사진은 명장이 공예소 직원들과 작품을 제작하는 모습).

 

 

독창적 작품세계 매진목공예 작품 일본인 사로잡아 

 그가 관심 가진 모든 분야가 목조각공예의 소재가 됐다. 그간 만났던 일본인 구매자들에게서도 아이디어를 수렴했다. 특히 198485 일본 연수 당시 공부한 일본식 접목조각(나무에 붙여가며 범위를 확대해 가는 목조각) 기법은 새로운 목조각공예 장르였다. 기법을 응용해 일본인 시라가와(白川) 의뢰한 대추나무 조각 작품구름이 있는 비천상 만들었다. 작품은 일본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한국 목조각 장인의 ·예능 수준을 경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일본에서 끊임없이 불교조각 문의와 주문이 쇄도했다. 명장만의 불교조각 디자인 세계를 창안해야 했다. 보상당초 문양과 운문문을 새롭게 해석해 수미단과 불전탁을 만들고, 인왕상을 비롯해 사천왕상 부처 보살들을 조각했다. 특히 상광사(일본 이마리시) 인왕상은 3m 넘는 크기의 목조각으로 건축물의 완공을 축하하는 낙성식에 초대받고 감사장도 받았다. 이외에 수많은 난간과 수미단을 조각하고 불상대좌와 광배도 조각했다

 

 국내에서의 활동도 괄목할 만하다. 충남 계룡산 신원사(중악단) 인등(引燈) 550점을 일일이 손으로 조각했다. 명장은 부처를 문수보살로 대신하고 보살상 앞에 구멍을 뚫어 불을 밝히게 만들었다. 등운암의 108석가모니 원불과 강원도 월정사 9층탑을 본딴 모본 8 9층탑의 목조각도 빼어난 작품으로 손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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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 아미타여래불.

​❷ 선녀난간조각.

 

 

한국공예예술학원 설립공예인 후진 양성 힘써

 김 명장은목공예는 인생이고 철학의 완성이지예. 그리고 성장해가는 목표입니더. 고등학교 운명적으로 만나면서부터 세상의 어떤 오락보다 재미있는 것이 목공예지예라고 말했다. 아무런 의미 없이 던져진 나무토막을 깎고 다듬어서 생명의 혼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야말로 공예인의 사명이고 새로운 창조에 대한 희열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공예인이었다.

 

 김 명장은 2007 영산대학교 공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조각을 전공해 2010 졸업했다. 고교 시절 정규수업 바깥 세상에서 만난 스승 김재호 선생의한국적 조각의 토대야말로 전통조각에서 찾아야 한다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폭넓은 공부가 필요했다. 단순한 손놀림, 기술의 세계를 초월하는 철학적인 사상이 필요했다. 동양의 성수로 인식돼 우리의 사상세계를 넘나들었던()’ 깊은 관심을 갖게 됐고, 상상의 동물을 현실 속에 재현했던 공예인들의 작업을 동경하게 됐다.

 

 김 명장은 석사학위 논문불교미술에 나타난 용의 현대적 표현방법 통해 (문양) 현실 속에 가져왔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사신총 문양을 응용한 영기(靈氣) 목조건축에 장식된 용면와(龍面瓦) () 형상에 표현하면서 2009 일본 고쿠라시 정광사의 법당 난간에기둥을 타는 거대한 용조각 제작했다. 총길이 15m, 1.2m 마리가 지름 55cm 기둥 6개의 윗부분을 타고 휘감으며 지나가는 목조각이다. 정교하게 조각된 마리 거대한 용이 서로 다투듯 마주하면서 몸체를 기둥에 비비꼬아 휘감고 있는 모습으로 정광사를 대표하는 목조각이 됐다.

 

 2013년에는 모교인 공예학교의 설립이념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연구소 내에한국공예예술학원 설립해 목공예에 관심 있는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수료생들 중에는 벌써 기능을 검정 받아 부산시기능경기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도 있다. 그리고 동의과학대학 정종민 교수(고교 동기) 영산대학교 최진식 교수가 뜻을 함께해 내일의 공예인을 양성하는 일에도 혼신을 다하고 있다

 

 김 명장은 2013 부산시 초대 공예명장이 됐고, 지난해부터 충남 부여 한국전통문화대학의 객원 교수가 됐다. 어린 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시련을 겪으면서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목공예에 혼신을 다해, 국내보다 오히려 일본 등지에서 목공예의 기능과 공예인으로서의 인품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한국의 전통적인 목공예인으로 부끄러움 없기를 항상 다짐하며 오늘도 조각칼 잡은 손에 힘을 쏟는다

 

 

작성자
주경업 부산민학회장
작성일자
2016-04-27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부산이야기 통권 제115호(2016년5월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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