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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옛 부산, 추억·흔적 고스란히 간직한 고장

구덕운동장·공동어시장·송도해수욕장 … 부산 역사 현장 곳곳에
I♥Busan / 우리 사는 부산 / ② 서구

내용

서구는 중구 서쪽에 있다. 항구와 기차역을 낀 중구가 근대기 부산의 중심이었다면 서구는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근현대기 부산의 상징이었다. 중구 영주동에서 산 하나를 넘으면 서구 대신동이다. 배산임수 지형인 서구는 아파트나 고층빌딩이 전망을 가리지 않는다면 어디에서도 산이 보이고 바다가 보인다. 자연공원 구덕산 울창한 숲과 선선한 공기, 수원지 맑은 물은 서구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말 안 해도 대번에 알게 한다.

송도해수욕장.

6·25전쟁 후 임시정부청사·대통령 집무실 있던 곳

구덕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수원지에서 합류한다.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보수천에서 물소리를 높이다가 남항 앞바다에 이른다. 보수천은 현재 복개돼 차가 다니는 도로가 됐지만 부산에서 맨 먼저 상수도 물을 제공했다. 1880년 보수천 상류에 좁은 대롱을 이어서 물을 끌어들였다. 1894년 대롱을 나무관으로 바꾸었다. 1901년 구덕산 주봉 아래와 구덕령 아래 수원지를 만들었다. 1만 명이 석 달 쓸 수 있는 물을 모아 서구와 중구에 공급했다.

구덕령은 어딜까? 서대신동 꽃마을 고갯마루다. 꽃마을은 지금 등산객 붐비는 맛집들 일색이지만 1980년까지만 해도 270세대 가운데 150세대가 꽃을 재배했다. 재배한 꽃을 부산 전역에 내다팔던 '꽃동네'였다. 옛날에는 구덕령을 통해 부산에서 구포, 양산, 밀양으로 갔다. 교통 요충지였다. 임진왜란과 청일전쟁이 벌어지자 왜군은 구덕령을 통해 북쪽으로 진격했다. 구덕터널은 구덕령 아래를 지나간다.

서구 행정동은 모두 13개 동이다. 동대신동 1·2·3동, 서대신동 1·3·4동, 부민동, 아미동, 초장동, 충무동, 남부민1·2동, 암남동이다. 2015년 2월 현재 서구 인구는 11만 7천 명 남짓 된다. 부산 16개 구·군 가운데 인구가 적은 편에 속한다. 중구와 강서구, 동구에 이어 뒤에서 네 번째다. 1957년 부산시가 구제(區制)를 실시하면서 33개 동과 사하 출장소를 관할하는 서구가 설치됐다.

서구가 가장 번성하던 시기는 1950년 6·25전쟁 무렵이었다. 임시수도 정부청사와 대통령 집무실이 서구로 옮겨 왔다. 입법과 사법, 행정의 3부도 서구에 설치됐다. 한국전쟁 피란정부는 1950년 8월 서구 부민동 경남도청에 짐을 풀고 정부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부산은 당시 경남 소속이었고 도청이 부산에 있었다. 국회는 도청 강당 무덕전에 자리 잡았다. 무덕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유도와 검도를 익히던 곳이다. 사법부는 도청 옆 부산지방법원에 터를 잡았다. 1953년 환도할 때까지 서구는 대한민국 중심지였다.  

부산시 기념물 53호인 '임시수도기념관'은 6·25전쟁 당시 대통령 관저로 사용됐다(사진은 임시수도기념관을 관람하는 시민 모습).

부산 스포츠 산실 구덕운동장… 박물관 변신한 임시정부청사

'대한민국 임시수도 기념거리.' 도시철도 1호선 토성역 2번 출구로 나오면 사거리가 나오고 사거리 모퉁이에 높다란 입간판이 보인다. 6·25 임시수도가 여기였음을 기념하는 간판이다.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이승만 대통령 관저로 썼던 임시수도기념관이 나온다. 입간판 너머는 대학 캠퍼스. 사학 명문 동아대 부민캠퍼스다. 캠퍼스 한가운데 붉은 벽돌 건물이 임시수도 정부청사다.

동아대 캠퍼스 한가운데 붉은 벽돌 건물은 임시수도 정부청사다. 임시정부 청사는 2009년 5월부터 동아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임시정부 청사는 2009년 5월부터 동아대 박물관으로 쓰인다. 개국원종공신녹권과 동궐도 등 국보 2점, 보물 11점, 부산시 지정 유형문화재 14점, 부산시 문화재자료 5점, 다양하고 진귀한 유물 3만여 점을 전시한다. 2·3층 가운데 2층은 전시실이다. 고고실·도자실·와전실·불교미술실·서화실·민속실로 구성된다. 3층은 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 기록실이다. 캠퍼스에 전시된 전차도 볼 만하다. 국내 3대 남은 전차 중 유일한 미제다. 서울 2대는 일제다.

서구 전찻길은 1925년 처음 놓였다. 부산우체국 앞에서 남포동과 보수동 네거리, 도청 앞을 지나 부용동까지 다녔다. 그러다 1928년 6월 서대신동에 구덕공설운동장이 생기면서 그 해 9월부터 종점이 공설운동장으로 연장됐다. '온천장-동래-서면-부산역전-시청전-재판소전-운종장 전차종점.' 동아대 전차 외벽에 부착된 노선표다. 구덕운동장 정문 앞 대신문화아파트 자리가 1968년 전차 운행 중단 때까지 전차종점과 차고로 쓰였다.

구덕운동장은 부산 첫 공설운동장이다. 부산의 반골정신이 빛나는 곳이다. 서대신동에 공설운동장이 터를 잡은 것은 1928년 6월. 처음에는 조그만 동물원을 곁에 둔 널찍한 공터였다. 일본군 열병장으로 자주 쓰였다. 공터에 운동장 시설을 조성하면서 학교 대항 운동경기가 곧잘 열렸다. 1940년 11월 일본인 간부 군인 노다이 심판이 조선인 학생에게 불리하게 판정하자 학생들이 들고일어났다. 부산항일학생운동 발화점이 구덕공설운동장이고 서구다.

구덕운동장은 부산의 첫 공설운동장이자 최동원 야구선수의 신화가 만들어진 현장이다.

구덕운동장 야구장은 최동원 신화의 현장이기도 하다. 1970∼80년대 무쇠팔 최동원 활약무대가 구덕야구장이었다. 최동원 모교는 경남고교. 야구장 인근에 있다. 최동원은 고교 다닐 때부터 강속구랄지 광속구(光束球)를 던져서 열성팬이 구름처럼 몰렸다. 시합이 있는 날 구덕야구장은 장사진을 이뤘다. 최동원은 팔의 힘으로 공을 던진 게 아니라 정신의 힘으로 공을 던졌다. 지지 않으려는 불굴의 정신이 곧 부산 정신이다.

부산직할시와 함께 발전한 '부산공동어시장'

서구는 부자들 동네였다. 동대신동과 서대신동 지대 낮은 곳은 교통 편하고 공기 청정해 부자들이 선호했다. 부산에서 가장 먼저 들어선 고급 아파트가 1972년 구덕운동장 정문 바로 앞 대신문화아파트였다. 1970년대 거기 산 사람은 다 부자 소리를 들었고 실제로 부자였다. 고교를 대신동에서 다닌 덕분에 문화아파트 사는 친구가 더러 있었다. 다들 때깔이 좋았다. 부산교도소 자리에 들어선 삼익아파트 또한 고급아파트 대명사였다.  

부산공동어시장이 개장한 해는 1963년. 부산시가 직할시로 승격한 그 해다. 부산공동어시장은 직할시 부산, 해양도시 부산의 힘찬 새 출발을 상징하고 벅찬 새 희망을 상징한다.

서구는 교육의 도시다. 근현대 교육 중심지가 서구라 해도 허언이 아니다. 한때 부산에서 학교가 가장 많은 곳이 서구였다. 부경고 전신 부산제일공립상고, 부산여고 전신 부산공립고등여학교, 경남고 전신 부산공립고, 부민초등 전신 부민공립보통학교가 광복 이전부터 있었다. 1946년 5월 부산대, 그 해 11월 동아대가 서구에 들어섰다.

서구는 축복의 도시이기도 하다. 고령사회로 접어든 부산으로선 더욱 그렇다. 서구에는 대학병원이 세 군데나 있다. 부산대와 동아대, 고신대 병원이 서구에 포진한다. 대학병원마다 차별화된 진료로 전문성과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대학병원 하나 없는 자치구가 수두룩하다. 거기에 비하면 서구는 분명 축복의 도시다.

남부민동 부산공동어시장에는 생선상자가 산처럼 쌓였고 바다처럼 널렸다.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어시장이다. 없는 게 없고 물량도 엄청나다. 국민생선 고등어 국내 소비량 80%가 부산공동어시장에서 풀린다. 부산공동어시장이 개장한 해는 1963년. 부산시가 직할시로 승격한 그 해다. 그러기에 부산공동어시장은 직할시 부산, 해양도시 부산의 힘찬 새 출발을 상징하고 벅찬 새 희망을 상징한다.

부산공동어시장은 1960∼70년대 원양어업 전초기지였다. 원양어선은 죄다 여기서 출항했고 여기로 귀항했다. 험한 바다에 나가 목숨을 담보로 벌어들인 외화는 한국을 경제대국으로 일으키는 종잣돈이 됐다. 한국 수산시장의 메카란 자부심과 1960∼70년대 경제성장 원동력이란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곳이 부산공동어시장이고 서구다.   

추억 가득한 '송도해수욕장' 옛 명성 되찾아

2015년 2월 현재 서구 인구는 11만 7천 명 남짓이다. 2010년 12만 6천 명에 비하면 줄어드는 추세다. 그렇지만 서구가 부활하는 조짐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되살아나는 송도해수욕장이 그렇다. 암남공원과 대신공원, 구덕문화공원, 천마산 조각공원, 해안산책로, 남항대교 등은 서구가 자연친화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도시임을 알려 준다.

1913년 개장한 송도해수욕장은 한국 첫 공설해수욕장이었지만 1980∼90년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해안도로를 넓히고, 친수공간을 만들고, 거북섬과 송림공원에 관광테마공간을 만드는 등 노력을 통해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송도해수욕장 부활이다. 1913년 개장한 송도해수욕장은 한국 첫 공설해수욕장이었지만 1980∼90년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해수욕을 하지 못할 만큼 물이 더러워지고 모래가 줄었던 탓이다. 도로가 좁아 교통 역시 불편했다. 부산사람에게 송도해수욕장은 유년의 추억이 담긴 공간. 안타까움이 컸다. 해수욕장 주변 주민들과 서구청은 원인을 찾아 대대적이면서 줄기차게 자정 노력을 기울였다.

자정 노력은 빛난다. 자정 노력을 통해 송도해수욕장은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다. 연안정비사업을 벌여 태풍과 모래 유실에 맞섰다. 해안도로를 넓히고 친수공간을 만들고 거북섬과 송림공원에 관광테마공간을 들였다. 한여름에도 텅텅 비었던 해수욕장은 이제 한여름은 물론 사시사철 말씨가 다른 사람, 살색이 다른 사람으로 붐빈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는 연안유휴지 개발사업을 통해 국제관광휴양 인프라를 갖춘 글로벌 송도로 나아갈 전망이다. 2013년 개장 100주년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렀으며 송도여름바다축제, 현인가요제, 부산고등어축제, 송도달집축제를 매년 연다.

암남공원·해안산책로 가슴 탁 트이는 절경

해수욕장에서 암남공원으로 이어지는 나무길, 해안산책로는 가히 천하제일경이다. 해안산책로에 맛들이면 송도를 떠나기 싫어진다. 송도로 이사 오고 싶어진다. 산책로 끝에 있는 암남공원은 낚시터와 천막 횟집들과 숲속 오솔길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특히 오솔길은 미로라서 그 안에 들면 영영 빠져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남항대교는 영도와 송도를 잇는 해상교량. 푸른 바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한 10년은 젊어진 기분이다.

서구 암남동과 영도구 영선동을 연결하는 남항대교 야경.

서구는 중구와 함께 원도심 중심이었다. 중학교를 송도에서 나오고 고교를 대신동에서 나온 사람으로서 서구는 언제 어디서든 향수를 자아낸다. 그럴 수만 있다면 평생 한 번은 살아 보고 싶은 곳이 서구다. 고 이태석 신부도 서구 사람이었다. 서구에서 나고 자랐다. 다큐멘터리 '울지 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의 감동적인 삶이 한국을 감동시키고 세계를 감동시켰듯 우리 사는 부산의 서구가 한국을 감동시키고 세계를 감동시키는 명품도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누구든 평생 한 번은 '살고 싶은 행복도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작성자
동길산 시인
작성일자
2015-05-13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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