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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천연자원 풍부한 아프리카 경제대국

Culture & Life / 세계테마여행 / 가봉
한국과 1962년 수교 … 슈바이처 박사 봉사 흔적 곳곳에

내용

가봉의 리브르빌 공항을 빠져 나오는 길은 여느 서부 아프리카의 국가와는 달리 아주 깨끗하다. 도로에서 보이는 건물 모양은 예술적인 디자인이 가미돼 원시 아프리카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택시와 버스를 섞어놓은 듯한 승합차들이 도로변에 질서정연하게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경적도 울리지 않아 번잡함도 없다.

20세기 초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주요 항구였던 수도 리브르빌은 독립 당시 인구 3만1천명의 작은 행정 도시였으나 내륙지방에 이르는 교통의 기점이 되면서 현재는 국가 인구의 절반이 거주한다. 리브르빌은 영국이 시에라리온에 세운 프리타운처럼 프랑스에 의해 건설된 명칭 그대로 자유의 도시다. 상선에 노예로 팔려갈 위기의 원주민들이 프랑스 군대의 구조로 해방돼 정착한 곳이 리브르빌이었던 것이다.

가봉은 아프리카에서 소득 수준과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다. 석유, 망간, 목재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외국자본의 투자가 활발한 편이라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비해 윤택한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부족 간 내전 없어 안정된 국가

가봉은 아프리카 대륙 서부의 적도선상에 위치한 나라다. 당연히 아프리카 최고의 열대우림지역으로 국토의 88%가 울창한 숲이고, 13개의 국립공원이 차지하고 있는 국토비율만 해도 11%나 될 만큼 숲과 계곡, 다양한 동식물군이 혼재한다. 대서양에 닿아 있는 서쪽의 해안평야지대는 내륙의 습지와 연결되며 산림과 만나는 지역에는 사바나 초원도 분포한다. 해안평야 북쪽 지역은 대부분 남쪽보다 더 넓고 해안선이 불규칙하며 해발고도 305∼610m 정도의 고원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가봉은 아프리카에서 소득 수준과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다. 면적은 남한의 2.5배에 인구는 2014년 기준 167만명에 불과한 데다 석유, 망간, 목재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외국자본의 투자가 활발한 편이라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비해 윤택한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40여 개 부족 간에 내전을 겪지 않은 것도 경제발전의 또 다른 이유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제력이 바탕이 돼서인지 사람들도 온순하고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가 세련되고 배려가 돋보인다.

시장에서 사탕수수를 판매하는 모습.

1962년 아프리카 국가 최초로 한국과 수교

가봉은 한국과의 관계도 특별하다. 1967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오마르 봉고 전 대통령은 2009년 사망할 때까지 42년간 대통령직을 유지했다. 봉고 대통령은 우리나라에 네 번씩이나 방문했고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났다. 봉고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을 했던 1975년 당시의 세계 질서는 치열한 냉전 상황이었다. 우리나라는 아프리카 국가와의 외교 교두보를 확대하기 위해 가봉과의 외교관계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지금이야 남북한의 경제력과 외교력의 차이가 엄청나지만 1970년대 북한은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당시 남북한 양쪽 다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아니었고 하나의 동맹국이라도 아쉬운 상황에 가봉을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1962년 아프리카 국가 중 한국과 최초로 수교한 가봉이 1974년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시작하니 한국 정부는 비상이 걸렸다. 그 와중에 아프리카 가봉의 봉고 대통령이 한국 편을 드니 한국으로서는 가봉이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가봉의 랑바레네에는 아프리카 밀림의 성자로 불렸던 슈바이처 박사가 평생 의료봉사 활동을 했던 곳이다.

봉고 대통령이 방한할 때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있었다. 수많은 정관계 인사들이 김포공항에 나와 영접했고, 수십 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에 동원돼 가봉국기와 태극기를 흔들었다. 당시 경복궁에서 환영행사가 열렸고, 봉고 대통령이 경희의료원을 시찰할 때 침술 치료와 보약을 처방해 주는 등 극진하게 대접했다. 당시 기아자동차는 신형 승합차를 출시하면서 '봉고'라는 이름을 붙여 봉고 대통령의 존재를 전 국민에게 인식시켰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 초청으로 네 번째 방문했을 당시 봉고 대통령이 직접 승합차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에서 딴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한국의 극진한 환대에 감동받은 봉고 대통령은 3박4일의 순방일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떠났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몇 시간을 머물다 돌아갔다.

한국과의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긴 봉고 대통령은 사망 시까지 42년간의 독재통치를 이어왔고 지금은 아들인 알리 봉고가 대를 이어 대통령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 내에서 경제적인 발전을 이어왔지만 도로망 등 기간산업이나 국립박물관 같은 관광자원에 대한 투자에는 매우 소극적이며, 독립기념일 행사나 곳곳에 보이는 대통령의 사진 등 정체성 확립에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을 보면 강력한 국가 통치 시스템이 적용되는 것 같아 보인다.

슈바이처 박사 의료봉사 했던 '랑바레네'  

적도의 남쪽 75㎞지점에 유명한 랑바레네가 있다. 아프리카 밀림의 성자로 불렸던 슈바이처 박사가 평생 의료봉사 활동을 했던 곳이다. 수도 리브르빌에서 270㎞ 떨어진 곳으로 오고에 강가에 자리 잡고 있다. 오고에 강은 열대우림을 거느리고 기니 만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나가는 국토의 동맥이자 젖줄이다. 1913년 슈바이처 박사가 처음 이곳 랑바레네에 도착했을 때 백인 의사가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하루에 수십 명씩 찾아왔는데, 병원 건물이 미완성 상태라서 사택 옆의 닭장을 임시 진료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진료실로 사용했던 건물과 사택 건물은 지금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박물관으로 들어서자 늙은 펠리컨 한 마리가 정원을 거닐고 있다. 박물관 내부에 슈바이처와 함께 산책하는 펠리컨 사진이 전시돼 있다. 사진 속의 펠리컨은 낮에는 강이나 늪지대로 날아갔다가 밤에는 꼭 슈바이처에게 돌아왔다고 한다. 슈바이처와 함께 산책을 했던 펠리컨이 아직 살아있을 리 만무하니, 박물관에서 전시를 위해 키우든 우연히 펠리컨이 박물관을 찾았든 슈바이처 박사의 일생을 다시금 생각케 한다.

박물관 내부는 당시 슈바이처 박사가 쓰던 의료기와 신발, 안경 등의 유품 그리고 침실과 서재 등이 잘 보존돼 있다. 박사의 손길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책장에 꽂힌 낡은 책들과 입었던 옷 등이 활동할 당시의 사진들과 겹쳐 마치 그가 밀림 랑바레네에서 보냈던 시간들 속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듯 했다.  

슈바이처 박사의 다재다능함은 정말 대단했다. 대학에서는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목사로 대학교수 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음악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연주회를 열고, 직접 음반을 녹음한 수준급 연주가이기도 했다. 바흐 연구가로서 그에 대한 책도 썼고 평생 자서전과 여러 저서를 냈으며 연주회의 수익금은 랑바레네의 병원을 운영하는 방편으로 활용했다.

슈바이처 박사 진료실 박물관으로 … 유품 생생히 보존

그는 일찍이 서른 살까지는 자신을 위해 살기로 하고 그 이후의 삶은 타인을 위해 바치기로 결심했다. 이런 결심의 배경에는 아마도 그의 어린 시절 환경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그는 당시  프랑스 땅이었던 알자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시골에서 자랐는데 기독교적인 가정환경과 궁핍한 시골마을의 친구들을 보며 자연스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서른이 넘은 나이, 타인의 삶을 위해 새 삶을 모색하던 그는 선교회로부터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6년의 시간을 들여 의술을 공부한다. 스스로 의사자격을 얻은 후 간호사 출신의 여인과 결혼해 홀연히 아프리카 오지, 이곳 랑바레네로 떠나왔다. 그리고 남은 그의 생은 아프리카 흑인을 위해 온전히 바쳤다. 팔방미인에 천재에다 봉사와 희생정신까지 겸비한 인물인 셈이다.

슈바이처 박사가 진료실로 사용했던 건물과 사택 건물은 지금은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박물관 내부는 당시 슈바이처 박사가 쓰던 의료기와 신발, 안경 등의 유품 그리고 침실과 서재 등이 잘 보존돼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그런 슈바이처의 모습은 아프리카에선 좀 달랐던 것 같다. 의사로서는 헌신적이었으나 흑인들을 대함에 마치 인종주의자 같은 면모를 보였다는 전설(?)이 어느 정도 신빙성 있는 사실로 전해온다. 괴팍하게 고함치고 거친 말로 모욕하고 말이다. 게으르고 개념 없는 흑인들이 그에겐 잘 다루어야 할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규율과 질서, 규범 같은 범주로는 묶을 수 없는 아프리칸 특유의 정서가 슈바이처에게는 한없이 자유롭고 개념 없는 족속으로 비쳐졌을지도 모른다. 슈바이처가 "만약 그들을 감옥에 가두면 그들은 오래 못 가 죽을 것"이라고 말한 걸 보면 짐작할 만하다. 슈바이처가 병원 운영 기금을 마련하려고 유럽에 돌아갔다가 7년 만에 다시 랑바레네에 와서 쓰러진 병원을 다시 세우느라 애쓸 때 유럽인 건축가가 흑인들을 다룰 재주가 있는지 걱정한 걸 보면 알 만한 정황이다.

가봉의 한 고등학교 음악수업 모습.

슈바이처 박사 아내와 함께 묻혀 있어

하지만 그가 인종주의자가 아님은 확실하다. 그의 아내는 유태인이었고, 후일 그가 유명해지자 나치정권이 그를 이용해 독일인의 우수성을 선전하려 했지만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가 유럽에 돌아갔을 때 1차 세계대전이 터져 독일인인 그는 구금돼 프랑스 포로수용소에 있었다. 이후 전쟁에서 독일이 패하자 알자스는 프랑스 땅이 됐고 그는 프랑스 식민지인 가봉에서의 의료활동을 위해 프랑스 국적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은 독일인이 아니라 아프리칸이라고 말하길 좋아했다고 한다.

슈바이처 박사는 이곳에서 50년 이상 의료봉사 활동을 했고 지금은 박사의 뒤를 이어 손녀인 크리스티앙 앙젤이 랑바레네 병원을 운영 중이라고 한다. '생명에 대한 경외'로 표현되는 슈바이처의 철학은 랑바레네의 버팀목이 된 사상이며, 박사는 인류의 형제애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음을 인정받아 195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박물관 뒤편의 조그만 묘지에는 이 위대한 아프리칸 슈바이처 박사의 묘와 부인의 묘가 같이 있다. 또 이들 부부와 의료 활동을 한 동료들의 무덤도 있다. 시멘트로 만든 십자가에 투박한 글씨로 이름과 생존연대만 기록돼 있어 성인이라 불렸던 이의 명성에 비하면 너무 소박한 모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치장보다 그 이름이 새겨진 것만으로도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겠는가.

작성자
글·사진 도용복
작성일자
2015-04-02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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