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사랑도 몰라요 성도 몰라

동래온천과 기생문화⑥

내용

기생은 늘 정기적인 교육으로 기예(技藝)를 갈고 다듬어야 했다. 전편에서 얘기한 예능실기(藝能實技)대회는 일종의 기예시험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는 당시 기생들이 직업인으로서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 수련과 관리를 해 왔는가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예이다.

교육이 끝나면 기생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화장과 몸단장을 하고 권번으로 나왔다. 행수기생(行首妓生)과 호장(戶長)의 지시에 따라 예약된 기생부터 차례로 청하는 요정으로 나갔다. 권번 대기실 한 쪽 벽에는 교실 흑판 같은 큼직한 목판이 보기 쉽게 걸려 있었다. 그 아래로는 권번에 가입된 모든 기생들의 이름을 쓴 손바닥 크기의 명패가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경쟁 심리 유도·인기 따라 서열 갈려

예약을 받아 한 기생이 불려 나가면 그 기생의 명패는 뽑혀서 바로 목판의 못에 걸렸다. 명패는 기생들이 불려 나가는 차례대로 목판의 윗자리에서부터 아래로 걸려 나왔다. 목판의 맨 윗부분은 며칠 전에 예약을 받았거나 오전 중에 예약을 받은 기생들의 명패가 걸렸다. 그리고 당일 저녁이 되어 요정으로부터 부름을 받는 기생은 차례대로 목판의 아랫부분에 걸었다.

이렇게 해서 목판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에 자기 명패가 걸리는 평균 횟수에 따라서 기생들의 인기도가 측정되었다. 이러한 관습은 때론 100명이 넘는 기생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한편, 기생들 사이에 은근히 경쟁심리를 불어넣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정주지 않기·성 안묻기 불문율

행수기생들이 기생교육을 받는 동기들에게 가장 철저하게 주입시키는 정신교육 중의 하나가 어떤 손님이건 함부로 정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결혼하지 않은 총각과 이미 단골 기생이 정해져 있는 손님과의 관계는 철저하게 금지하는 불문율이었다.

만약 그 불문율을 어긴 사실이 알려지면 그 기생은 그 날로 권번에서 쫓겨나야 했다. 헤프게 정을 뺏기다 보면 돈벌이에 소홀해지고, 그러다 나이 먹으면 돌볼 사람도 없고 돈도 없어 결국은 불행해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화류계의 오랜 경험철학을 바탕으로 애송이 기생들의 불행을 미리 막아주려는 선배들의 배려가 배인 자구책이요 대비책이었다.

관기제도가 없어진 이후에도 기생은 이름만 부르게 하고 성은 철저하게 감추게 하였다. 더러는 그것을 단순한 관기제도의 유습이라 하기도 하고 가문을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사실은 기생사회의 철저한 직업정신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기생과 자리를 같이 하는 한량들이 행여 자신의 파트너가 되는 기생의 성이 같은 경우 서로 거북하여 자리를 피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막기 위해서 성을 쓰지 않았다. 따라서 기방 출입을 하는 남자들도 누구 할 것 없이 기생의 성이나 본관은 묻지 않는 것을 불문율로 삼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로맨스

그러나 아무리 철저하게 교육을 받고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을 한다 할지라도 기생도 감정을 가진 사람이다. 이 손님 저 손님 접촉하다 보면 정말 정이 드는 사람도 생기는 것이 당연했다. 어쩌다 호기를 부리며 요정을 찾아오는 학생이나 총각에게 반하여 몸과 마음을 다 뺏기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1930년대 동래 온천장의 일급 명기(名技)로서 이름을 날렸던 연홍(蓮紅)이란 기생이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대여섯 명의 친구들이 함께 마련한 술자리에 참석한 한 청년과 첫눈에 서로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그는 동래고보(東萊高普) 재학 중에 3·1운동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형기를 마치고 막 나온 사람이었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었던 그는 출옥 후 장래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설득하여 일본으로 유학할 것을 권유했다. 학비와 일본 체재비용은 자기가 저축해 두었던 돈으로 지원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하던 그도 결국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본 유학을 결행했다.

유학을 끝낸 그는 귀국하여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매우 의리가 있고 성격이 강직한 사람이었다. 유학 중에도 끊임없이 연홍에게 연서를 보냈으며,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자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귀국을 앞둔 해에 한 사업가의 첩으로 들어앉았다. 그리고 그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당신은 이제 나를 잊고 당신이 갖춘 학식과 인품에 어울리는 교양 있는 양가집 규수와 결혼해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바란다. 나는 그 동안 당신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당신이 꿈꾸었던 대로 조국의 해방과 독립, 그리고 조선민족의 평화를 위해서 큰 일을 하시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그녀를 찾고자 백방으로 애썼으나 아예 만나기를 거부당하였다. 그는 후일 장관까지 지냈다. 연홍은 광복 이후 온천장에서 조그만 여관업을 하다가 자신의 재산 전부를 복지재단에 기증했다. 그리고 그 복지재단에서 경영하는 고아원에서 고아를 거두다가 운명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측근의 사람에게 그 장관에게 부고를 전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그 장관이 부인과 세 자녀를 거느리고 참석하였다.

비극적 사랑 멜로물 소재로 등장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마음에 든 남자를 위해 온갖 희생을 무릅쓰며 뒷바라지를 해준 결과가 비극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대개의 남자들은 목적을 성취하면 서로가 굳게 맺었던 언약을 깨고 냉혹하게 뒤돌아서고 말았다. 상대 기생은 배신감에 젖어 남은 일생을 증오심으로 보내며 불행에 빠지기 마련이었다. 지난날 가끔 멜로드라마의 소재가 되었던 전형적인 내용이다. 하기야 요즈음도 여자의 희생 위에 출세를 한 후에는 등을 돌리는 사기꾼 같은 사내들이 더러 있는 모양이지만.

일본인들의 집중적인 개발과 본격적인 휴양객의 유치작전으로 동래온천장은 전국 온천장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다.

온천 개발붐 타고 전국적 명성

그 무렵 함께 개발되기 시작한 해운대 온천과 해수욕장도 명성을 높이는 데 한몫을 했다. 동래온천장의 이름이 날로 높아지면서, 각지에서 찾아오는 휴양객들의 발걸음이 끊일 날이 없었다.

광복 후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국의 신혼 여행지로서 동래 온천장과 해운대를 가장 많이 이용한 것도 이때에 얻은 명성 덕분이었다.

동래온천의 명성과 함께 자연 동래온천의 기생들도 전국적인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영남 각지에서 내로라 으스대던 부호의 자제들과 한량들이 동래온천의 기생방을 찾아 몰려들었다.

관기제도 철폐 이후 설자리를 잃고 있던 인근의 양산 경주 울산 밀양 마산 창원 진주 등에서 관기 출신의 기생들과 동기 지망생들이 동래권번으로 속속 찾아들었다. 호남지방과 멀리 경기 평양에서까지 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1년 7·8월호
작성일자
2013-11-12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첨부파일
부산이라좋다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이전글 다음글

페이지만족도

페이지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평균 : 0참여 : 0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를 위한 장이므로 부산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부산민원 120 - 민원신청 을 이용해 주시고, 내용 입력시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등 개인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광고, 저속한 표현, 정치적 내용, 개인정보 노출 등은 별도의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부산민원 120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