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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1583호 기획연재

‘건반 위의 구도자’ 피아니스트 백건우에게 음악의 길을 묻다

음악으로 청중과 함께, 나누고 소통할 때, 난, 가장 행복하다
부산은 '마음의 고향'… 가난했으나 아름답던 시절 늘 기억

내용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피아니스트 백건우(白建宇, 67). 10살 때 국립교향악단과 협연하고  16살 때 미국 줄리아드 음악학교를 시작으로 영국?이탈리아에서 사사, 국제 콩쿠르에서 잇달아 우승하며 '피아노 신동'의 명성을 얻은 천재적 연주자다. 26살 때 라벨의 독주곡 전곡을 완주한 뒤 라흐마니노프, 포레, 부조니를 집중 탐구했다. 2005년부터 3년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을 녹음 한 뒤, 지금은 슈베르트의 피아노곡을 재발견 중. 한 작곡가를 탐구할 땐 책, 그림, 영화까지 섭렵하며 몰입한다. 그 연주는 단순한 건반의 울림을 넘어, 그의 인생관과 음악철학을 아우르는 메시지다. '건반 위의 순례자' '건반 위의 구도자', 그의 최선을 추구하는 연주 스타일을 평가하는 찬사다.

'피아노의 달인일 뿐만 아니라 완벽한 음악가다'(르 피가로)-프랑스 파리에 살며 온 세계인과 음악으로 소통하는 천재 피아니스트 백건우. 그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기사훈장'을, 한국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고, 오늘도 세계를 누비며 나이가 무색할 만큼 왕성한 연주활동 중이다. 협주곡을 한 번만 듣고도 피아노로 연주한 '천재'지만, 지금도 피아노 연습과 악보 연구에 매일 6시간씩 매달리며 음악에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1990년대부터 그랜드 피아노도 없는 중소도시, 연평도 같은 섬마을에서의 연주를 계속하고 있다. 그가 부산직할시 승격 50주년을 기념, 부산에서 '베토벤'으로 부산사람과 만났다. 1976년 영화배우 윤정희(尹靜姬)씨와 결혼, 딸 하나를 두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온 세계인과 음악으로 소통하고 있다.

부산이 낳은 세계적 음악가, 그는 왜 한 작곡가에게 그렇게 몰입하는가. 왜 소도시와 섬마을의 '특별음악회'를 중시하는가? 상업적 광고를 거부하는 그의 인생철학은 어떠한가? '내조의 여왕' 윤정희-'외조의 대왕' 백건우-그 행복한 부부의 전형으로 사는 비결을 또 무엇인가? 3년 만에 고향을 찾는 자랑스러운 부산사람에게 궁금한 것은 그뿐이겠는가?

 

온 세계인과 음악으로 소통하는 피아니스트

먼저, 백건우의 인간성 얘기. 그는 역시 '겸손한 거장'이다. 유명인사들은 더러,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인터뷰를 미루기도 하지만, 그는 '부산이야기'의 인물탐구 인터뷰를 흔쾌히 수용했다. 사진촬영 역시 “리허설 장면이면 어떤가?”고 먼저 제안했다. 유명 스타에의 선입견을 단번에 뒤집을, 반할만한 인간미였다. 하나 더, 그는 지금 파리에 살지만, 실상 '부산사랑'에 있어선 출향인사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깊은 애정을 품고 산다.

그가, 부산직할시 승격 50주년 기념 부산시립교향악단 특별연주회 협연자로 부산을 찾았다. “브람스를 연주할 때는 브람스의 명인이 되고, 바흐를 연주할 때는 바흐의 대가가 된다. 베토벤을 연주할 때는 최고의 베토벤 연주가가 된다"는 찬탄을 받는 그. 그가 부산 팬에게 들러줄 베토벤에의 기대를 그래서 클 수밖에 없다. 실상, '부산사람' 그는 이번 공연에 나름의 부산사랑을 흠뻑 담아내 그 기대에 한껏 보답했다.

 

'최고의 베토벤 연주가' 베토벤으로 부산 찾다

Q. 부산에서의 공연, 얼마 만인가?
A. “2~3년? 2000년 10월 곽 승 지휘자 시절 부산시립교향악단과 쇼팽 피아노협주곡 1번을 연주한 기억이 있다. 부산시향과의 연주, 정말 좋았다. 중국에서 리신차오 지휘자와 여러 번 공연했고, 좋은 추억을 갖고 있다. 훌륭한 지휘자와 부산에서 만나, 정말 기뻤다.”

이번 부산 무대에선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과 제4번을 연주했다. 협주곡 제1번은 베토벤의 초기 작품에서 보이는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지만, 그는 여러 곳에서 자신의 개성을 강조하려 노력한 흔적이 드러나는 곡이다. 피아노 협주곡 제4번은 베토벤의 5개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새롭고 완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오케스트라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뒷받침, 피아노 협주곡인데도 교향곡을 연상케 하는 곡이다.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부산직할시 승격 50주년 기념 부산시립교향악단 특별연주회 협연자로 부산을 찾았다.

연습에 빠진 백건우와 남편 구두닦기에 바쁜 윤정희

지금도 온 세계 청중의 가슴을 흔드는 열정의 피아니스트 백건우, 그는 오늘도 세계를 무대로 그 열정적 연주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3월엔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 여러 화제를 낳았다. 전 세계 순례객이 예수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고난주간(苦難週間),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지휘자 주빈 메타)의 초청으로 3월 28~30일 하이파·예루살렘·텔아비브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을 협연했다. 실내악까지 포함해 사흘간 4회 연주의 강행군이다.

Q. 그 이스라엘 필과의 협연, 어땠나요?
A. “성 금요일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며, 주빈 메타씨와 이스라엘 필, 그리고 베토벤, 그 이상 영광스러울 수가 없죠. 가장 기억에 남는 음악회였어요. 연주를 마치고, 앙코르를 연호하는 청중의 기립박수에 주빈 메타가 저의 등을 떠밀면서 '슈만을 듣고 싶다'고 속삭인 뒤, 그는 더블베이스 주자 곁에 앉아서 경청했습니다. 전,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 1번 중 '아리아'를 연주했어요.” 메타는 기자들에게 말했다. “He is great pianist. 허세를 부리기 쉬운 요즈음, 백건우는 여전히 고전적 미덕을 갖춘 연주자”라고.

 

연주 내내 부인 윤정희는 1층 객석 뒷자리에 앉아 두 눈을 꼭 감은 채 두 손을 포갰다. 오른손 엄지로 묵주의 십자가를 어루만졌다. 백건우의 진심이 청중에게 닿기를 기도한다. 2010년 '최고의 영화' '시(詩)'로 국내외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던 윤정희. 그녀는 이 남편이 연습하는 동안, 무대 뒤 대기실에서 남편 구두를 닦고, 연주용 연미복을 매만졌다.

연주회가 끝난 뒤, 한 스위스 출신 관객이 부인 윤정희와 취재진에게 다가와 속삭이더란다, “내 평생 들었던 베토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연주였다”고. 스물셋에 영화 '청춘 극장'으로 데뷔, 325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당대의 스타. 그녀는 남편 연주회에서 말없이 묵묵히 내조를 계속 하고 있다. “아침에 서울서 영화를 촬영하고 저녁에 지방에 내려가 다른 영화를 찍던 시절부터 짐 싸고 푸는 일이라면 이골이 났어. '백건우 비서 노릇'은 나 아니면 아무도 못할 거야.”

 

소도시 연주·섬마을 콘서트로 음악적 감동 나누기
Q. 세계적 명성을 떨친 국내 연주자 중 중소도시에서 연주를 한 최초의 피아니스트다. 언제부터 지방연주를 하셨나?

A. “1986년부터, 벌써 28년째다. 지방연주를 다니면서 늘 깨닫는다. 언제나 진실된 음악이 담는 소리는 청중과 함께 할 수 있고, 서로 감동을 준다는 거다. 사실 외국 같으면 중소도시 연주회, 별 의미 없다. 한국이니 그 뜻이 다르다. 국내연주를 하다 보니 중요도시 몇 군데 빼 놓곤 전혀 음악회가 없더라. 음악은, 모든 사람을 위하는 것, 찾아가서라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KBS와 연이 닿아 과감하게 시작했다. 첫 중소도시 연주는 전북 전주에서였다. 그때는 도시마다 음악회장이 없을 때다. 극장, 강당, 체육관에서, 피아노도 빨간색, 하얀 색, 작은 것 큰 것, 국산, 일산…. 만족한 연주의 조건이 모자라 힘들었지만, 청중들은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더라. 요즘은 지방 음악회가 많지만, 그때 그런 음악회를 시작했다는 데 큰 보람을 느낀다.”

그의 93년 순회음악회를 한 언론은 '애향 나들이'로 표현했다. 고국의 10개 도시를 19일간 순회하는 연주 대장정, 창원을 시작으로, 광양 춘천 안동 대구 울산 과천 광주 수원 서울을 돌며 모두 11차례 독주회를 갖는 일정이다. 최고 연주자가 클래식 실연을 접하기 어려운 지역을 동서남북으로 찾아가 직접 피아노음악의 매력을 맛보인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Q. 연주가로서 개인적 지향도 있을 듯 한데요?
A. “20여년 전 귀국 때 시골 절만 찾아다닌 적이 있어요. 그때 나의 조국과 산하를 숨쉬면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갖지 못하면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힘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앞이 막히는 느낌이 들더군요. 지금은 그때와 달리 조급한 마음은 아니에요. 그저 우리네 땅에서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과 만나 차분히 음악만 놓고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연주자 백건우는 숨고, 음악만으로 청중과 만나고 싶습니다.”

의도가 훌륭해도 청중이 연주자를 따라오지 못할 때는? 그는, 청중의 수준이 낮기 때문에 잘 알려진 곡을 연주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하지 않는다. 대중적인 곡으로 프로그램을 짜면 청중동원에는 도움이 될 터. 그러나 연주회는 청중과 연주자가 1대 1로 만나는 자리 아닌가. 쉬운 곡이건 어려운 곡이건 연주가 훌륭하고 설득력 있으면 다 전달이 된다는 믿음이다. 연주회가 끝난 뒤 청중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연주장을 처음 찾았다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음악적 감동을 받은 경우가 많았단다.

 

북한 포탄이 쏟아졌던 그곳에… “쇼팽이 찾아왔다”

백건우, 그는 '섬마을 콘서트'도 갖고 있다. 2011년 9월, 북한의 포탄세례를 받았던 연평도를 찾아 평화의 선율을 선사하면서부터다. 인천 옹진 연평도 조기역사박물관에서 첫 야외 콘서트를 열었고, 이어 전북 부안 위도, 경남 통영 욕지도까지 세 곳을 순회했다. 그는 연평도 관객 앞에서 쇼팽의 '뱃노래', 리스트의 '물 위를 걷는 성 프랑수아', 드뷔시의 '기쁨의 섬', 베토벤의 '월광' 같은 낭만적인 피아노 선율을 들려줬다. 1,000명이 넘는 청중이 공연장을 찾았고 의자에 앉지 못한 관객은 바닥에 깔개를 깔고 앉거나 근처 언덕에 올라 노을 속에서 음악을 감상했다. 앙코르곡으로 리스트의 '잊혀진 왈츠'를 선사했다. 부인 윤정희도 함께 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1990년대부터 그랜드 피아노도 없는 중소도시, 연평도 같은 섬마을에서의 연주를 계속하고 있다(사진은 2011년 연평도 콘서트).

Q. 섬마을 콘서트를 연 계기는?
A. “부산에의 기억 때문이다. 어릴 때 부산에서 자랄 때 산에 올라가면 바다가 보였다. 부산에서 본 섬 풍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외국에 일찍 나가서 생활해 왔지만, 나이가 들수록 고국을 찾게 된다. 오래전부터  프랑스 연습실 벽에 대형 대한민국 지도를 붙여놓고 섬마다 동그라미를 쳐놓았다.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싶은 마음, 나의 언어인 음악으로 또 하나의 고향인 바닷가 주민과 사는 얘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인 셈이다.”

배우 윤정희가 영화 '화려한 외출'(1977) 촬영차 욕지도에 갔을 때, 결혼 1년차 신랑 백건우도 따라갔다. 1주일간 섬 이곳저곳을 그냥 돌아다녔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매혹적인 섬이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섬에는 대기실도, 음향 시설도 없다. 연주자는 간이 천막에서 숨을 돌리고, 관객은 방석에 앉아 감상한다. 협찬 받은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가져간다. 피아노와 객석 거리가 1m에 불과하고, 좌석 번호도 없다. 어디든 앉아 피아노 선율을 들으며 생업에 지친 심신을 녹이고 달랬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마음 씀씀이다.

Q. 연평도 콘서트를 마친 뒤 느낀 점은?
A. “공연을 마친 뒤 주민들과 막걸리를 나눴다. 내가 '아름다운 섬에서 여러분과 함께 음악을 나눌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더니, 조윤길 옹진군수는 '고맙다, 그리고 (포격 당해)슬픈 섬을 기쁜 섬으로 만들어 줬다'고 답했다. 뒤풀이가 끝나고, 주민들은 우리 부부가 탄 버스를 지켜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계속 '고맙습니다!', '또 오세요!'를 반복하면서. 사회자도 없고 우왕좌왕 소란할까 걱정이었다. 그런데, 참 아름다운 모험이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연평도 콘서트를 마치고 “아름다운 섬에서 여러분과 함께 음악을 나눌 수 있어 좋았다”며 “참 아름다운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백건우, 그는 이번 부산협연을 마치고, 다시 울릉도 저동항(6.3일)과 통영 사량도(6.7일)에서 섬마을 콘서트를 가졌다. “듣고 싶은 분들에게, 음악을 전달하는 것은 나의 의무다”, 그의 음악철학에 충실한 결과다.

알려진 계획에는 없던, 절해고도에서의 1인 청중 연주회도 이번 섬마을 연주 여정 중 나왔다. 서울 한 일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저동항 연주회를 앞둔 1일, 울릉도에서 다시 배를 타고 20분을 더 가야하는 죽도를 찾았다. 이 고도를 지키는 유일한 주민을 위해서다. 학창 시절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선물 받았으나, 이제 어머니를 보내고 사모의 정에 젖어 사는 40대 중년남자. 그는 백건우의 연주로, 어머니가 생전 즐겨 부르던 '매기의 추억'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비창' 중 2악장을 감상했다. 남자는 어머니 생각에 노래 부르다 목이 메고, 백건우는 함께 눈망울을 촉촉하게 적시며 건반을 두드리고. 남자는 백건우 부부에게 영덕 게를 넣은 라면을 끓여 대접했다.

사실 확인 차 윤정희 선생과 통화했다. “죽도 다녀오신 얘기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수고 많으셨네요?”, “아, 그 얘기 신문에 났던가요?” 아, 이런 감동적 스토리가 우리 주변에 그리 흔한가? 백건우 같은 멋쟁이는 또 그리 흔할 터인가?

백건우의 연주는 단순한 건반의 울림을 넘어, 그의 인생관과 음악철학을 아우르는 메시지다.

피아노 신동에서 '건반 위의 구도자'까지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1946년 5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교사였던 아버지는 서양문화에 조예가 깊은 아마추어 음악가였다. 일찍부터 서양음악에 친숙할 수 있는 환경이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8살 때 부산에서. 10살 때 최초의 독주회를 가졌고, 당시 국립교향악단과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으로 협연무대를 가졌다. 15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어드에서 공부하고, 나움베르크 콩쿨, 레벤트리트 콩쿨, 부조니 콩쿨 등의 국제콩쿨에 입상하여 세계적 연주가로 도약할 발판을 다졌다. 1972년 라벨의 피아노 독주곡 전곡연주를 통해 세계무대에 알려졌다. 한 작곡가씩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전곡연주 등의 심도 있고, 무게 있는 연주회를 주로 갖고 있다.

Q. 피아노를 익힌 계기는?
A. “어렸을 때 부산에서 살며, 서양음악에 친숙한 부모님의 영향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서양음악에 많은 지식을 갖고 계신 아버님 덕분에, 고전 뿐 아니라 현대곡도 듣고, 음악과 현대무용까지 접촉했다. 프랑스 발레단의 발레도 본 기억이 있다. 피아노를 남보다 쉽게 치고 곡도 빨리 배웠던 듯 하다.”

Q. 미국 줄리어드에서 공부하게 된 계기는?
“15살 때 미국의 드미트리 미트로폴로스 콩쿠르에 참가, 연습실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를 우연히 들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콩쿠르 주최 측에 '저 아이를 도와주라'고  말했단다. 이후 전액 장학금을 받고 줄리아드 음악원에 입학,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Q. 어린 시절 천재성을 감안하면, 젊은 시절부터 권위 있는 상을 휩쓸며 화려한 경력을 쌓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A. “난 그런 것이 참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너도나도 빨리 성공하고, 빨리 돈 벌고, 빨리 이름을 알리는 것을 좋아한다. 당장 눈에 보이니까. 그러나 그건 마치 파우스트가 자기 영혼을 팔아버리듯 (세속의) 흐름에 휘말리는 거다. 현실적으로 화려할지는 모르지만 거짓된 삶이다.”

 

세계적 연주가? '자기만의 음악' 특히 중요

Q. 세계적 피아니스트, 재능인가? 노력인가? 무엇이 필요한가?
“사실대로 말하면, 정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음악을 시작해야 한다. 워낙 경쟁이 심하고 나날이 경쟁은 더 심해질 것이니. 재능 위에,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운도 좋아야 좋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음악이 있느냐 없느냐다. 음악, 취미로는 권하고 싶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Q.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프랑스로 옮겨 간 이유는?
A. “어린 나이에 많은 연주를 하다 보니 내 음악세계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 없이, 스스로 모방하는 그런 쪽으로 가더라. 내가 창작가가 되려면, 정말 예술가로서 자기 세계가 뚜렷한 사람이 되려면 이 줄을 끊어야겠다 싶어 유럽으로 갔죠.”

파리에서의 첫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프랑스 작곡가 라벨의 곡을 뛰어나게 해석, 또 한 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젊은 동양인 피아니스트가 선보인 풍부한 레퍼토리와 고전적인 기교, 힘과 서정성을 조화시킨 깊이 있는 연주는 당시 유럽 음악계의 큰 이슈로 떠올랐다.

Q. 리스트를 연주하면서 또 한 번 전환점을 맞이했다는데.
A. “그렇다. 리스트가 한 개인으로서 성장하는데 굉장히 큰 도움을 줬다. 나는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오히려 관찰하는 그런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리스트라는 작곡가는 자기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작곡가고. 리스트를 연주함으로써 심리적 변화를 겪었고, 삶에 있어서도 큰 도움을 줬다. 음악적 치료를 받은 셈이다.”

리스트를 통해 한층 성장한 그, 좀 더 폭넓은 음악세계를 청중들과 나누기 시작했다. 청중에게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는 열망이 담긴 그의 음반들은 프랑스의 최고 음반상을 석권하며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디아파종 상 1992, 1993년, 누벨 아카데미 뒤 디스크 상 1993년).

 

학구적·철학적 연주로 '건반 위 구도자 '찬탄

백건우는 한 작곡가의 곡을 깊이 파고드는 연주자로 유명하다. 한 작곡가를 선택하면 철저하게 파고드는 학구적이고 철학적인 연주 스타일.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전곡 연주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졌다. 그는 보통 연주자들은 시도조차 꺼리는 베토벤 전곡 연주에 성공하며 세계의 음악계를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콧대 높은 유럽 음악계에서도 이제 그를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인정한다(프랑스 예술문화 기사훈장, 2000년). 하지만 그는 새로운 베토벤, 새로운 리스트는 항상 존재할 수 있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본다.

Q. 한 작곡가를 파고드는 이유는? 특별한 계기가 있나?
A. “음악은 늘 한 발짝 앞서 나간다. 내가 알고 있는 음악이 이만큼이라면 공부를 하다보면 음악은 더 앞에 가있고, 더 커지고, 더 찬란하고, 더 웅장하고, 그러면서 성장한다. 이제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고, 진실된 노력의 대가는 틀림없이 있는 것이더라.”

백건우는 어떤 것이든 묘사가 가능한 소리의 세계가 참 신비스럽다고 했다. 새 작곡가의 작품을 하는 이유는 음악세계를 넓혀가고 싶기 때문. 하지만 브람스를 한다고 해서 베토벤을 떠나고 싶은 건 아니다. 베토벤 안에서도 늘 새로운 베토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그는 늘 평생을 음악 속에서 산다.

Q. '건반 위의 순례자' '건반 위의 구도자'라고 불린다. 어떤 느낌인가?
A. “음악에 종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구도자다. 한 작곡가를 탐구할 때는 관련 영화와 책, 그림까지 섭렵할 정도로 몰입한다. 1972년 뉴욕에서 라벨의 독주곡 전곡을 완주한 것을 시작으로 그동안 스크리아빈, 라흐마니노프와 포레, 부조니 등을 연구했다. 2005년부터 3년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의 녹음을 완성한 후 7일간 전곡 연주 대장정을 가졌다. 지금은 슈베르트 피아노곡을 재발견 중이다. 슈베르트 음악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곡들이다.”

해외언론들이 그에게 붙이는 찬사는 그저 허사일 수 없다. '진정한 비르투오조(Virtuoso:탁월한 기량을 지닌 연주 명인)', '전설의 유령을 부르는 천둥을 이끌어내는 능력을 지닌 피아니스트', '부조니(독일의 명피아니스트·작곡가)의 환생'…. 프랑스 음악학자 레미 스트리커는 그의 연주를 풀어 평가한다, “그의 테크닉은 완벽하고 그의 연주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의 소리는 매우 따뜻하고 아름답다.”

 

백건우 음악, '반짝 빛나기'보다 '철학·감수성' 추구

백건우, 그에게 유럽 음악계가 깜짝 놀란 사건은 적지 않다. 세계적으로 리스트의 후기 곡들이 연주되지 않았던 1970년대 그는 런던·파리에서 6회에 걸쳐 리스트의 피아노곡을 선보였고, 베를린 페스티벌에서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라벨 피아노 전곡을 연주했다. 1992년엔 스크리아빈의 소나타곡을 녹음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당대 최고'라는 찬사를 누린 미국 피아니스트)보다 뛰어나다는 평가가 나왔다.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프랑스의 권위 있는 디아파종상 수상, 프랑스 3대 음악상 수상…. 이후로도 그 명성은 계속 높아졌다.

백건우, 그가 '이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사랑받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음악에 대한 이해와 연습에 늘 열중한다. 작곡가들을 하나하나 꼭꼭 씹어 섭렵한 뒤 자신만의 해석으로 녹여내는 탁월함도 남다르다. “음악은 거울이다,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 좋은 음악을 위해서는 타고난 재주뿐 아니라 음악에 대한 태도, 인간성 연마까지 참 갖춰야 할 점이 많다.” 그의 말은 음악적 진정성, 그것을 향해 있다. 젊은 시절 반짝 빛나는 연주를 넘어, 철학과 감수성이 녹아 있다.

Q. 백건우에게 음악이란?
A. “난, 내 인생 전부를 바친 음악에 아직도 샘솟는 열정과 호기심을 느끼고 있다. 음악 속에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니 거기에 끌려서 살아온 인생, 갈수록 세계가 더 넓어지고 더 궁금해지고, 하고 싶은 게 더 많아져서 걱정이다. 요즘 고민은 전에 보이지 않던 게 보인다는 거다. 하면 할수록 그렇다.”

Q. 지금의 음악세계를 구축한 나름의 철학이 있다면?
A.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많다. 재주도 있어야겠지만 음악에 대한 태도나 인간성도 중요하다. 음악은 명백한 거울이기 때문에 거짓이 없다. 난, 젊었을 때는 감정적으로 곡을 연주하고 섬세하게 보지 못했다. 이제는 곡을 들었을 때 더 조심스러워지고 음악이 나한테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귀를 기울인다. 음악 프로그램을 구성하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린다. 일일이 악보를 만져보고 쳐보면서 구상한다. 다른 음악인들과 얘기를 많이 나누고 조언도 많이 구한다. 반복해서 연주하며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Q. '음악은 연주자를 비추는 거울이다'? 연주를 통해 비춰지는 인간 백건우는 어떤 모습인가?
A. “내가 아무리 남의 흉내를 내려고 해도 결국은 자기를 그리는 것밖에 안 된다. 우리가 신이 될 수 없고, 인간으로서 인간을 상대하고 인간에게 호소한다. 바로 그것이 음악인 것 같다. 그래서 섬에 살면서 처음 클래식 음악을 듣는 사람들도 음악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연주하는 곡이 독일의 어떤 작곡가의 곡이고, 어떤 화음과 리듬을 사용했다고 설명하려 한다면 섬마을 주민들이 (그 연주를)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소리(음악)에 인간의 진실한 심정을 담는다면 누군들 이해를 못하겠는가. 그것이 음악이 갖는 힘이고, 그렇기 때문에 음악이 아름다운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

Q. 연주 준비 중 피아노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A. “아무리 열악한 상황에서 연주를 포기할 순 없다. 반복해 건반을 누르며 피아노를 길들여 나간다. 어떤 악기가 주어져도 할 수 있는 최고의 공연을 선보이는 것이 관객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디누 리빠띠(Dinu Lipatti)라는 훌륭한 루마니아 피아니스트가 있다. 그 분의 마지막 연주 때 얘기다. 굉장히 몸이 편찮아 의사가 '무대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청중과 약속을 했다'면서 끝까지 연주한 역사가 있다. 나 역시 책임을 다시 느끼고 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한다.”

Q. 피아노를 하는 후배들에게 한 말씀 조언을 한다면?
A.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어 무척 자랑스럽다. 다만, 앞 음악인생을 걸어온 선배로서 걱정되는 부분은 있다. 내가 피아노를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재능이 있으면 시작은 쉬울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재능을 자기가 키워나간다는 것이 참 어렵다. 결국은 '개인과 세계'의 싸움이니….” 그는 후학양성에도 관심이 많지만, 음악가들은 시골에서 농사짓는 분께도 배울 점이 있고 외국 여행을 하면서도 배울 수 있다고 강조한다. 폭 넓은 경험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강조점은 분명하다 “피아니스트는 '자기 소리'가 있어야 한다. 이게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다. 아름답다든지, 투명하다든지 자기만의 소리가 있어야 한다.”

 

난, 부산사람, 예술적 감수성 부산서 키웠다
백건우는 '부산사람'이다. 1950년 5살 때  6·25 전쟁 피난민으로 부산에 와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살았다. 집은 동래구 온천동 금정산 기슭, 금정산과 온천천의 벚꽃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 강렬한 산과 꽃의 색에 취해 금정산에서 많이 놀았다. 한창 감수성을 키울 무렵, 자연 속에서 자유를 느끼며 가난했으나 아름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지금도 “부산!”하면 즉각 호감을 보이는 까닭이다.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부산시립교향악단과 특별연주회를 준비하고 있다.

Q. 백건우에게 부산은 어떤 곳인가?
A. “부산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에 내 삶에 있어 아주 중요한 곳이다. 자주 찾지는 못하지만, 첫 어린 시절 추억이 남아있는 부산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부산이 너무 좋다. 부산의 바다도 너무 좋다. 어린 나에게 예술적 감수성을 심어준 곳 아닌가… 사실 내 인생, 떠돌이 생활이다. 뉴욕에, 파리에 오래 살았어도, 역시 어린 시절 나의 정서를 키운 부산이 마음의 고향이다.”

Q. 부산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A. “해운대 바다다. 너무 아름답다. 부산에 오면 늘 해운대서 쉬고 잔다. 이번에도 해운대 한 호텔에 머문다. 근처를 산책하고 드라이브하고, 어릴 적 동경했던 그 넓은 바다를 보며 좋았던 시절을 기억을 회상하고….”

“달맞이길도 자주 가나?”고 물었더니, “아, 달맞이길, 산책하며 해운대 해변을 내려다보는 그 경치, 그저 환상적이다.”

Q. 부산만의 매력, 강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A. “많이 달라졌다. 난, 어렸을 때 부산을 굉장히 로맨틱한 도시·낭만적 풍경으로 기억한다. 그 때 항구·포구와 산, 그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기억이 진하다. 아버님은 어린 나를 음악회와 영화관에 많이 데리고 다니셨다. 유행하던 음악감상실에서 음악도 많이 듣고, 그런 예술 속에서 자라 아름다운 추억이 진한 모양이다. 지금 부산은 세계도시 아닌가. 영화·영상에서, 전시·컨벤션이며 관광에서, 해운대의 그 맨해튼 같은 현대적 풍광에서 여러 예술적 풍모까지, 세계 속의 유명도시 아닌가. 그건 부산이 자랑하는 개방성·도전성의 알찬 결실이라 생각한다.”

Q. 부산팬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A. “부산팬들은 부산사람 기질 그대로, 정말 열정적이다. 매번 공연에서 나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깊이 느끼고 있다. 앞으로도 부산팬을 자주 만나고 싶다. 나도 딴 도시보다는 부산엘 자주 오는 셈이다, 의식적으로. 나의 연주에 계속 자주 오셔서 즐겨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다.”

백건우는 이번 부산협연 때도 금요일 공연을 앞두고, 수, 목, 금 사흘 동안 시향과의 리허설을 강행했다. 좋은 연주를 위해, 그처럼 열정적인 준비를 다하는 것이다.

 

백건우-윤정희, '매니저·예술 동반자'로 함께 산다

이쯤에서, 백건우에게 궁금한 바, 빠트릴 수 없는 삶의 얘기를 더 묻는다. 우선 그는 아무리 개런티가 많아도 상업적 공연, 광고 출연 등은 결코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인 윤정희씨도 “결혼생활 37년 동안 그에게 최소한 수백 건의 광고요청이 들어왔고, 나와 함께 출연해달라는 요청도 많았다. 그런데 단 한 건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음악가로서 재능을 인정받았는데 여기서 뭘 더 욕심을 내나'하는 입장이고 나도 같은 생각이다”,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Q. 부에 대해 특별한 철학이 있나?
A. “사실, 광고라고 하는 것과 음악인으로써 얻은 이름의 가치를 바꾸고 싶지 않다. 난 음악인으로 남고 싶지 그 가치를 팔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우리 부부는 화사스러운 삶은 필요하지 않다.”

 

한 가지 더, 부인 윤정희와의 스토리다. 두 사람은 '심청'이 맺은 인연이다. 1972년 뮌헨올림픽 문화축제 때 한국영화 '효녀 심청'(감독 신상옥)의 주연배우 윤정희는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의 세계 초연을 보러 온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처음 만나 반했다. 두 사람은 2년 뒤 프랑스 파리의 한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운명 같은 사랑을 시작했고, 2년 뒤인 1976년 결혼,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 중인 딸을 하나 얻었다. 현재까지 서로의 매니저이자 예술의 동반자로 살고 있다. 휴대폰 하나를 둘이 '공유'할 만큼, 두 사람은 비밀이 없는 사이다.

안단테(Andante) 같은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스타카토(Staccato)처럼 여전히 통통 튀는 매력을 발산하는 영화배우 윤정희는 일상에서도 완벽한 화음을 이루며 산다(사진은 왼쪽부터 리신차오 부산시립교향악단 지휘자, 피아니스트 백건우, 영화배우 윤정희).

Q.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 금슬이 좋은 부부로 유명하다. 예술가로서 개성이 강할 텐데 마찰 없나?
A. “윤정희, 정말 대단한 배우다. 어떻게 자기 직업에 저렇게 충실할 수 있을까? 난 윤정희가 16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 이창동의 5번째 장편 '시'(2010)를 찍을 때도, 옆에서 지켜보며 굉장히 자랑스러워했다. 어떻게 저렇게 연기에 빠질 수 있을까 놀라웠다.” 백건우의 표현은 실상 '배우 윤정희'에 대한 존경이다. 윤정희는 '시'에서 홀로 손자를 키우며 늦깎이로 시를 배우는 미자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이 영화가 프랑스 칸 영화제에 진출, 배우인생 최초로 칸 레드카핏을 밟고 10분간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백건우는 물론, 아내를 응원하기 위해 바쁜 연주일정을 쪼개 칸에 동행했다.

인터뷰를 지켜보던 배우 윤정희도 공감한다. “부부가 견해차가 없다면 심심해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성격상 오래 참지 못하고 곧바로 풀어버립니다.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고 서로 보완적입니다. 먹는 거, 여행하는 걸 둘 다 좋아합니다. 남편 역시 워낙 영화를 좋아해 하루에 최소한 1편을 봅니다. 저와 처음 만났을 때 나중에 영화감독을 할 거라고 해서 그럼 '바이바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반면 저는 클래식 음악이 없으면 못 살죠.”

세월이 흘렀지만 부부는 마치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 같다. 늘 서로에게 무디지 않고 세심한 관심을 기울인다. '배우 윤정희'가 칸에 가면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아내의 핸드백을 들어주고, 남편이 연주할 땐 아내가 연주복을 들어준다. 둘 다 예술가라서, 그들의 작업이 미완성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런 가치관이 잘 맞아서 각자 색깔이 뚜렷하지만 문제없이 잘 지내는 것 같다는 거다. 부부는 색깔은 달라도 각자의 색깔이 더 선명하게 빛날 수 있도록 서로 배려한다. 안단테(Andante) 같은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스타카토(Staccato)처럼 여전히 통통 튀는 매력을 발산하는 영화배우 윤정희는 서로 그렇게 일상에서도 완벽한 화음을 이루며 산다.

이번 인터뷰 때도 아내는 남편과 함께 부산문화회관 응접실에 자리했다. 사진촬영을 할 땐 남편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으로 가다듬어주기도 했다. 백건우가 아내를 쳐다보며 붙이는 한 마디, “우리 부부는 원래부터 정해진 짝이 아닌가 싶다.”

차용범 부산시 미디어 센터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남은 도전? 힘닿는 한 음악에 매달릴 터

Q. 음악 외에 즐기는 일 없는지?
A. “난 사진과 여행을 좋아한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든 내 눈을 통해서든,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이해하는 게 좋다. 모르는 나를 모르는 세계에 도착시키는 것, 언어나 지리를 모르는 곳에서 헤매기도 하면서 새롭게 삶의 열정을 느끼며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것, 얼마나 좋은가. 난, 아무래도 '궁금증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

Q. 평소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나?
A. “나에게 스트레스란 없다. 어떻게 보면 똑 같은 곡, 악기 앞에서 나날을 보낸다는 것, 참 따분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나에겐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는 작업이다.”

Q. 다시 태어나도 피아노를 하고 싶은가?
A. “그럴 것 같다.” 이건 확신에 찬 답변이다.

Q. 행복한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
A. “음악으로서 청중과 한 마음이 될 때….”

Q.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A. “난, 인생을 계획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후 수입을 따져가며 노년 계획도 세우고 그러던데, 예술가는 좀 다를 듯 하다. 어떤 작품이 나올지 본인도 모르니, 항상 여유롭고 자유롭게 창작세계에 매달려야 하지 않을까. 난, 힘닿는 한 음악에 종사하고 싶다.”

Q.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A. “거짓 없이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

백건우의 강점은 무엇보다 연주가로서의 주관과 그 세계가 뚜렷하다는 것, 항상 쉼 없이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콘서트 피아니스트 이외의 다른 활동은 전혀 해 본 적인 없는 전문연주가의 길을 계속 걷는다는 것, 연주예술가로서의 소명을 지켜나가려는 굳은 노력에서 가능한 사실임을 결코 넘겨버릴 수 없다. 지극한 완벽을 추구해왔기에 주로 연주회를 통해 활동을 해오다가, 9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레코딩을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백건우는 앞으로도 빛나는 찬사들을 들어가며,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솔리스트, 이 시대 최고 피아니스트의 길을 당당히 걸어갈 것이다, '백건우의 연주는 신비로운 여행길이다'(프랑스, 르 마틴), '백건우는 한마디로 경이롭다'(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붙임]인터뷰 원고를 정리하는 과정을 부산시 공식 블로그(쿨부산)에 올렸더니, 서울 계신 '윤정희 팬' 한 분이 전화를 걸어왔다. 요지는, 윤정희 선생도 '부산사람'인데, 알고 있는가? 윤정희, 2012년 전미영화평론가협회 선정 '세계의 여배우' 2위 선정사실 아는가? 등등. 그는 백건우와 윤정희 스토리를 압축해 담은 CD 한 장씩을 이내 보내왔다.

윤정희 선생께 물었다, “아니, '부산사람'이신가요?”, “네, 우리 가계(家系) 모두 부산이에요. 저도 유년에서 여고 시절까지, 한참 부산에서 자랐죠.” 그랬다, 그의 선대(先代)는 모두 부산이었으며, 그는 외할머니의 손녀사랑에 끌려 광주-부산을 오가며 지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일제시대 일본 유학생으로, 부산에서 신문기자를 거치기도 했고. 단, 이번 백건우 인터뷰 땐 '남편 백건우'에 포커스 맞췄으므로, 그는 자기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그랬다, 이 '미묘한 뉘앙스와 감수성으로 가득한 세계적 여배우' 역시 자랑스러운 '부산사람'이었다. 이 인물탐구 코너는 '부산사람 윤정희'를 다시 초대할 수 있을까?

 

1946년 서울 출생.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1956년 10세 때 국립교향악단과 협연 통해 데뷔, 미국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피아노 전공, 줄리어드스쿨 음악대학원 졸업. 1989년부터 프랑스 디나르 에메랄드 코스트 국제음악제 음악감독, 2007년 제13회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분 심사위원. 뉴욕 미트로폴로스 콩쿠르 특별상(1961), 부조니 콩쿠르 입상(1969), 프랑스 디아파종 음반상(1992·1993),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호암상(예술상)(2000), 경암학술상(예술부문, 2009),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2010) 수상.  

사진 최우창·MBC제공

작성자
차용범
작성일자
2013-06-24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1583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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