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동래온천에 눈 뜨다!

골목길에서 어슬렁 거리기 (18)

내용

나흘째다. 온천장 목욕탕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거 말이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아예 아침 목욕까지 하고 갈 요량으로 식전 댓바람에 온천장 골목에 발을 넣는다. 오전 8시를 조금 넘겼는데도 녹천탕 쪽 골목은 승용차들이 너덧 대 줄을 섰다. 10여 분 정도 기다려야 겨우 주차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일요일엔 농심호텔 초입부터 차가 길게 늘어선다. 가뜩이나 좁은 도로에다 이 일대 목욕 업소들의 주차시설까지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을 풀러 온 길이 당연히 짜증길이 된다.

온천장은 비극적이게도, ‘그저 그런’ 온천지(溫泉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향토애가 덜해서가 아니다. 백암온천, 덕구온천, 수안보온천, 부곡온천에도 가보았지만 그들과 비교해도 뚜렷한 차별점을 찾을 수 없다. 관광버스 두서너 대도 댈 수 없는 좁아빠진 도로와 주차시설에서부터 동래온천은 국민적 온천휴양지로서 자격 미달이다.

‘한국 온천 이야기’의 저자, 다케구니 토모야스 교수의 말을 빌리면 한마디로  “동래 온천가 거리를 걷고 있으면 ‘온천지에 왔다’는 실감이 거의 나지 않는다.”로 요약된다.

나흘이나 온천장 여기저길 어슬렁거려 보아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던 거다. 풀고 가야 할 숙제였기에 계속 온천 골목을 못 벗어났던 게다. 골목 어슬렁거리기가 바야흐로 실존적 질문과 철학적 사유로 넘어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실, 동래온천은 그저 그런 온천이 ‘결코’ 아니다.

가까이는, 조선시대만 해도 왕족들이 목욕을 즐겼던 곳이며, 일본인들까지 목욕 한 번 해보기를 소원했던 최고의 온천지였다. 듣기 좋아라고 하는 뻥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다 나와 있다.

세종 20년 3월 1일에, 조선의 신하들은 세종대왕께 동래온천과 관련하여 이런 건의를 했다.

내이포(乃而浦)는 진해 웅천에 있던 개항장이었다. 제포(薺浦)라고도 하였는데, 부산포와 함께 삼포(三浦) 가운데 하나였다. 제포 30호, 부산포 20호, 염포에 10호의 왜관을 설치하여 왜인들을 거주하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부산포보다 엄청 큰 규모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교역을 위해 한양에 갔다가 제포로 돌아갈 때 바로 제포로 가지 않고 꼭 ‘동래온천’에 들러 목욕 한판 하고 갔었나 보다. 제포 가는 길에도 영산온천(지금의 부곡온천)이 있었음에도 꼭 ‘동래온천’을 찾았던 이유는 무얼까?

군사적 기밀을 탐지한다든지 다른 여러 가지 속셈이 있었겠지만,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동래온천이 걔들 취향에도 그저 그만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세종실록>과 <단종실록>에 나온다.

세종실록에는 대마도 군수인 종성가(宗盛家)가 조선 조정에 올린 6가지 부탁을 들어줄지 말지를 의논하는 기록이 나온다. 그 중 하나가 “동래온천에서 목욕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거였다.

단종실록에도 내용은 다르지만 왜인들이 줄을 서서까지 동래온천을 애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내용인즉, 이렇다.

광평대군(세종의 5남) 부인(평산 신씨, 신자수의 딸이다)이 동래온천에서 여러 달 머물며 목욕을 하는 바람에 왜인들이 목욕을 할 수 없어서 머물러 있는 자가 자못 많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지키며 조신해야 할 아녀자가 오랫동안 온천이나 하면서 지역민에게 민폐를 끼치고 나라 망신까지 시킨 죄를 물어 자식 교육 잘못 시킨 아버지 신자수를 파면하라고 왕에게 건의한다.

그런데 이 상소의 원문에는 “東萊溫井 倭人群浴之處”라는 표현이 보인다. “동래온천은 왜인들이 떼를 지어 목욕하는 곳”이란 말이다.

<예종실록>과 <세조실록>에도 조선의 왕족들이 동래온천을 이용했던 기록이 나온다. 연창위 공주(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와 양녕대군(세종의 큰 형님), 임영대군(세종의 넷째 아들)이 동래온천에서 목욕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의 변방이었던 동래까지 조선 왕족들이 목욕을 하러 올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영남 사림파의 종조(宗祖) 점필재 김종직도 말년에 중풍 마비 증세를 치료하기 위해 동래 온천을 찾았다는 기록이 성종실록에 있다.

동래온천은 한 때 조선 최고의 온천지로 영화를 누린 때도 있었다. 비록 식민지 치하 일제 자본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동래온천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일제하 동래선 전철을 운영하던 ‘조선 가스 전기 주식회사’가 대욕장(大浴場)인 ‘동래온천 욕장’을 개설하면서부터다. 일제가 만든 이 대욕장(大浴場)은 어떻게 생겼을까? 부산일보 1916년 10월 16일자 기사는 이렇게 전하다.

이 대욕장은 일본 본토 내의 대욕장 사업의 성공 모델을 동래 지역에 적용한 것이며, 일본인용과 조선인용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제는 대욕장 개업과 동시에 주변 토지를 정리·조성하여 별장지로 빌려주고, 이미 1906년부터 영업을 하고 있던 봉래관과 대욕장, 전철역을 잇는 도로를 개설해 본격적으로 요정과 여관들이 들어서도록 했다. 지금 온천장의 원형(原型)이 이때부터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래온천은 현재 총 34개의 온천공(온천물을 뽑아내는 구멍)이 있다. 이 중 현재 이용하는 것이 22개 공이고 나머지 12개는 예비용이다. 예비공은 말 그대로 온천 이용 허가는 되어 있으나 물을 뽑아 쓰지 않는 공이다.

온천은 개발 주체가 누구냐, 그리고 온천물의 공급 형태에 따라 크게 시영공과 사설공으로 나뉜다. 시영공은 상수도사업본부 시설관리사업소가 관리하고 있는 부산시 양탕장을 통해서 현재 22개 업소에 온천물을 공급하고 있다. 하루에 797㎥(=797,000ℓ)의 온천물을 공급한다. 시영공에서 온천수를 팔아 얻는 연간 수익은 약 1억5천만 원 정도다.

개인이 자체적으로 온천 관정을 뚫어 온천물을 사용하는 사설공을 가진 업소는 10개다. 10개 업소가 하루에 뽑아 쓸 수 있는 온천물은 모두 2,380㎥(=2,380,000ℓ)에 달한다. 하지만 이 물을 다 쓰지는 않고 있다. 시영공, 사설공 합쳐서 하루 평균 1,716㎥(=1,716,000ℓ) 정도 사용한다.

동래구에서 2008년~2009년 사이에 실시한 온천자원조사 결과 일일 적정 양수량이 3,300㎥/day으로 조사됐다. 과거보다 수위가 하강되어 온천수 유지와 수위 상승을 위해 기존 이용허가량 3,553㎥/day에서 3,117㎥/day로 하향 조정했지만 그보다 덜 쓰고 있는 것이다.

동래온천의 온천수는 어느 업소든 온도와 성분이 다 비슷하다. 대부분 평균 60도를 웃돈다. 가장 뜨거운 물은 금천탕이다. 70.9도다. 조선시대 지리서 <동국여지승람>에서 동래온천에 대해 “온천의 열로 계란을 익힐 수 있고, 병자가 목욕을 하면 문득 낫고, 신라시대에는 왕이 여러 번 행차했다”고 기술되어 있다는 게 거짓이 아니다.

동래온천에 대해서 “님 쫌 짱인 듯”하다 라고라고라?^^

사실은 동래구 건설과 김광열 주무관의 설명을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숙직 서고 댁에서 쉬시는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전화로 너무 친절하게 이것저것 많이도 가르쳐 주신다.

이러한 동래온천이기에 ‘그저 그런’ 온천으로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아깝다. 목욕탕 건물만 크고, 새롭게 바뀌었지 아버지 손에 이끌려서 등판이 뻘겋도록 뜨거운 온천 목욕하고 바나나 우유 하나 얻어먹는 재미로 다녔던 30여 년 전의 동래온천이랑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다케쿠니 토모야스 교수의 지적대로 온천지에 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확실한 변신이 필요하다.

동래온천 때문에 내 가슴 불난다 불나
동래온천 앞에 내가 녹는다 녹아
관광객들 모두가 “내 안에 동래온천 있다”고 노래할 수 있는, 온 국민 온천휴양지로 거듭 나야 한다.


동래온천 골목에 들어서면 허심청 외에는 특색 있거나 특성화된 시설이 전혀 없다. 목욕탕 건물들도 서로 다 비슷해서 그게 그거처럼 보인다. 사실은 목욕탕 내부도 거의 다 비슷하다. 온천물만 사용한다 뿐이지 시설 좋은 동네 목욕탕보다 못하다는 느낌이 드는 곳도 더러 있다. 외지인들은 어느 목욕탕이 어떤 역사가 있고, 안에 어떤 시설들이 있어서 어떻게 편하게 목욕을 하고 쉬고 나올 수 있을지, 혹은 목욕탕 안에서 어떤 역사적인 현장이나 물건을 만날 수 있을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하다못해 요즘은 모텔도 내부 시설이랑 누가 자고 갔다는 사진을 떡하니 붙여놓고 자랑하는데 말이다. 엉뚱하게도 ‘가족탕’이 그나마 틈새 상품 역할을 하고 있다.

부산시와 동래구가 최근 들어 온천 족욕탕과 상징조형물, 상징거리를 만들었지만 그 조차도 관광객들의 필이 팍 꽂힐 만큼 특색 있는 것이 못된다. 2009년에는 대한민국 온천 대축제를 개최했고, 스파윤슬길 일원에서 예술의 거리 행사도 열었지만 그게 다다. 일회성에 그치고 있다. 일년 내내 관광객의 발길을 붙잡아 둘 상설 아이템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러니 동래온천은 ‘때나 밀고 꼼장어나 칼국수나 한 그릇 먹고 가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이 자연스럽게 재교육이 되어버린다. 관광객들의 욕구를 자극하고 상상력을 불어넣어 다시 오게 만들고, 추억거리를 만드는데 정말 돈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도록 노력하지 않은 지자체와 상인, 관계자들의 타성과 마케팅 노력 부족에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동래온천이 온 국민 온천휴양지로 거듭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론, 부산시와 동래구에서도 개발의 그림을 그리고는 있지만 분명한 방향과 로드맵은 없는 듯하다.

이 지역 유지들과 상인, 각 분야 전문가, 주민들이 그야말로 동래온천의 옛 명성을 되살려 마을을 발전시키고 파이를 키운다는 공동의 목표와 공생의 방향 아래 함께 주체가 되어, 다같이 변신을 위한 지혜와 노력을 모으는 것이 상식이자 답이지 않을까. 거기에 지자체의 지원과 힘을 업는 거다. 상식 속에 답이 있다.

자, 도움이 된다면 한마디 거들지 않을 수 없다. 나흘간 온천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든 생각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우선, 관광버스 두어 대라도 편하게 댈 수 있는 주차 공간이 급하다. 주말 등산객 바라보고 장사해서야 어떻게 온 국민 온천휴양지라 할 수 있겠나. 그런다고 엉뚱하게도 온천 골목과 멀리 떨어진 데다 만들까싶어 저어된다. 다른 온천지(溫泉地)처럼 승용차들도 차를 대고 걸어서 바로 온천 골목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동안 땅값만 올려놓아서 쉽지 않은 문제지만, 그래서 지역 유지들의 향토애와 애민정신에 발로한 ‘통 큰 결단’이 더더욱 필요한 대목이다. 동래라고 ‘최부자’ 같은 분이 안 계시겠는가.^^

소프트웨어적인 문제, 즉 온천욕의 고부가가치화를 위해서는 조선 중기 효종 때 영의정까지 지낸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동래온천에서 온천 치료와 요양을 했던 기록이 적혀 있는 <한강선생봉산욕행록(寒岡先生蓬山浴行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한국 온천 이야기’에 소개되어 있다. 봉산(蓬山)은 지금의 동래를 지칭한다.

한강(寒岡) 선생이 동래온천에서 온천 치료를 받은 것은 총 41회다. 첫날은 온천물을 길어와 씻기만 했고, 목탕자(木湯子)에서 3번, 외석정(外石井)에서 16번, 내석정(內石井)에서 21번 목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목탕자(木湯子)와 석탕자(石湯子)는 온천욕을 위한 욕조로 보인다. 재질에 차이가 있는 것은 쏟아지는 원천수를 그대로 받아서 쓰느냐(석탕자), 온천물을 덜어서 식혀 쓰느냐(목탕자)는 차이일 듯하다. 환자의 몸 상태에 따라 온도와 전신목욕, 반신목욕의 차이를 둔 것 같다.

처음에 1일 1회 목욕하던 것을 갈수록 1일 3회로 늘여가는 것도 환자의 몸 상태를 살피면서 체계적인 온천 치료를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온천 치료로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풍비가 완전히 나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안색과 기혈이 전보다 훨씬 나아져서 사람들이 모두 “목욕의 효과라고 말하였다”고 기록한 것을 보니, 동래온천이 어느 정도의 영향은 주었으리라.

이렇게 ‘입욕 일지’까지 들이대며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딴 데 있지 않다. “동래온천을 하면 건강해진다”는 느낌이 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 한의원과 연계하여 ‘스파케어’를 만들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노인층과 환자들을 위한 요양과 치료를 위한 온천 프로그램, 여성들을 위한 한방 피부 스파 같은 것은 어떤가. 주차시설만 받쳐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본다.

이런 건 어떤가? 온천수 배달 사업. 일본에서는 인기 있는 신종사업에 속한단다. 동래 온천장까지 직접 올 수 없는 분들을 위해서 요양원이나 병원, 가정 등에 동래 온천물을 배달하는 것을 ‘사회적기업’ 사업으로 해보는 건 어떨까. 사회적기업에 대해서는 온천물 값을 적정하게 혜택을 줘야 하지 않을까.

버려지는 온천수를 활용하여 온수 보일러로 재활용할 수는 없을까.

태국의 송끄란 축제 같은 ‘물 축제’는 왜 안 될까? 온천물은 뜨거우니 보관할 수 있는 용기를 개발하고, 대나무 물총에 온천물을 담아서 서로 물세례를 퍼부으면서 신나게 놀 수도 있지 않은가.

일본에서는 온천지역마다 온천 계란(おんせんたまご)이 명물로 인기가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끓는 온천물에 즉석에서 삶아 파는 반숙 계란이다. 동래온천에서는 왜 이런 게 인기 상품이 되지 않을까? 물 온도가 낮아서일까? 그렇다면 테이크아웃 온두부는 어떤가? 목욕하고 허기진데 이만한 게 있을까? 유기농 콩을 사용해 고급스럽게 만들어 컵 아이스크림 용기 크기로 팔면 되지 않을까? 동래 온천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명물이 없다는 말이다.

시대는 바야흐로 먹으면서 구경하는 ‘테이크아웃 시대’다. 퍼질러 앉아서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뜯어먹는 동래파전은 테이크아웃으로 팔 순 없는 걸까? 파전만 팔지 말고 동래파전과 관련한 이벤트는 왜 개발이 안 되는 걸까?

일본에는 원숭이를 앞세워 온천물을 팔아먹는데, 동래온천은 백학과 사슴이 온천물에 발 담그고 나았다는 전설만 있지 정작 온천물에 발 담그는 아기 사슴 한 마리도 없지 않은가. 동래온천 하면 딱 떠오르는 토산품이나 기념품 하나도 없다.

식민지의 아픔이 있는 시대이긴 했지만, 1920년대 동래온천은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질 좋고 풍부한 온천수, 잘 정비된 욕장과 숙박시설, 그리고 교통편이 좋다는 삼박자를 두루 갖춘 조선 굴지의 온천으로 널리 회자되었다.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온천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온천장 주변에는 대형 백화점도 있고, 골프장도 있으며, 국내 3대 사찰도 있고, 부산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금정산도 있다. 그러나 지금 온천장은 빛바랜 흑백사진이나 붙여놓고 옛 영광만 추억하는 분가루가 벗겨진 늙은 배우처럼 돼버렸다. 90년 전의 인기에조차 미치지 못하고 있다.

온천장을 그야말로 ‘온천지(溫泉地)에 왔다’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것은 한갓 책상 위의 일이 아니다. 지역 유지들이 먼저 시야를 넓게 가지고 지역을 살리는데 나서야 한다. 이렇게 살아도 좋다는 마음이라면, 온천장의 변화는 요원하다. 국가와 지역 차원에서 변신의 길을 열어주는 총체적 지원도 물론 중요하다.

동래온천의 옛 명성을 회복하는 길이 뭘까, 이번 골목길 어슬렁거리는 너무 머리가 띵하다.^^;;

작성자
원성만
작성일자
2011-03-10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첨부파일
부산이라좋다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이전글 다음글

페이지만족도

페이지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평균 : 0참여 : 0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를 위한 장이므로 부산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부산민원 120 - 민원신청 을 이용해 주시고, 내용 입력시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등 개인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광고, 저속한 표현, 정치적 내용, 개인정보 노출 등은 별도의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부산민원 120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