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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엄옥자, 나의 춤 나의인생

예술부산 ‘예인탐방’ 29. 승전무 발굴 엄옥자 선생

내용

1965년 통영 서호동 마돈나다방. 이곳은 통영의 풍류객이 자주 모이는 장소이다. 여기서 나는 통영여고 교감 이민기 선생과 함께 통영의 최고 한량 김태현을 만났다. 김태현(1893년생)은 승전무를 보았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 행사에서 집사가 “이순신 장군의 승전을 축하하는 춤을 올려라.”는 말을 하고 나서 기녀 정순남이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정순남은 그의 연인이었다.

그해 나는 경희대 체육과를 졸업하고 모교 통영여중고에 무용 교사로 부임했다. 부산의 경남여고에서 교생 실습을 하고 거기서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경남여고 교장이던 청마 유치환 선생이 나에게 통영 춤을 발굴해야 한다는 소임을 일깨워 주었다. 운명의 힘이 통영으로 나를 이끄는 듯했다.

이민기 선생은 나에게 승전무 연구를 권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인 1961년경, 통영에서는 처음으로 한산대첩 제전이 시작되었다. 군점 행렬 속에 8선녀라는 명칭으로 검무 복색을 한 8명의 여자가 들어있었는데, 그들은 행사 중이나 행사를 마친 후 간단한 춤을 추기도 했다. 그 춤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전쟁에 나가기 전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마다 연희를 베풀어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던 춤, 승전무에 기원이 있었던 것이다.

승전무는 통제영의 교방청 소속 관기들이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 추었다.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준말이다. 1604년 통제영이 지금 통영으로 옮겨왔다. 통제영은 6대 이정준 통제사로부터 208대 홍남주 통제사까지 293년간 존속되어 오다가 1896년 폐영되었다. 그때까지 통제영 교방청의 기녀들이 이순신 장군 행사에서 승전무를 추었다.

조선 말 교방청이 없어지자 관기들은 민간으로 나와 조합을 결성하고 영업을 하였다. 그런 조합을 권번이라고도 하는데 통영에서는 예기조합이라고 불렀다. 정순남 할머니는 1906년생으로 13살에 기생이 되어 통제영 교방청 관기 출신인 김해근(당시 60세 정도)에게 칼춤과 북춤, 입춤을 배웠다. 그때 배운 춤으로 정순남은 이순신 장군의 기신제, 생신제, 그외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나 여러 향연에서 춤을 추었다. 승전무 공연은 일제를 거쳐 광복 후까지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김태현이 보았다는 정순남의 춤은 통영 예기조합 시절의 승전무인 것이다.

사진은 정순남 선생님과 함께 찍은 사진들(왼쪽부터 승전무 발굴 당시와 1970년대 부산집에서 찍은 사진).

승전무는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을 받았다. 기능보유자는 정순남, 이갑조, 주봉진, 나, 네 사람이었다. 이때 승전무에 칼춤이 빠졌다. 문화재로 지정 받을 당시 칼춤은 진주검무가 지정되어 있다는 이유로 통영북춤만 지정을 받게 되었다. 기능보유자 중 이갑조와 주봉진은 악사이다. 정순남은 악사가 연주를 해야 춤을 출 수 있겠다고 하여 당시 악사였던 춘당 이갑조를 함께 찾아갔다. 그분은 장구를 쳤는데 통영의 마지막 예기 조합장이었다. 이갑조 할아버지가 피리의 박경규, 젖대의 주봉진, 해금의 박의성, 북 노상욱 등 승전무악을 연주할 수 있는 악사를 소개해 주었다. 1966년 통영 서호동에 있는 숙부댁 거실에서 정순남 선생으로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승전무는 전수되기 시작했다.

정순남 선생은 춤사위를 일일이 설명해 주셨다. 칼을 돌리면서 이것은 옥은(오그라드는) 사위다, 이것은 겨드랑 사위다 하면서 사위의 명칭을 다 얘기해 주셨다. 그리고 그 춤은 이순신 장군의 기백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다른 춤과 달리 가슴을 쭉 펴고 떡 벌어지게 추라고 했다.

정순남이 전수한 승전무 북춤의 원형은 네 명의 무용수가 동서남북으로 갈라서서 오방색의 옷을 입고 북을 치면서 춤을 추었고, 밖의 네 명은 소박하게 소리만 더했다. 그런데 이 원형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바뀌었다.

첫째는 승전무가 궁중무 계열로 규정된 것이다. 나는 1967년 고상열(문화재 관리국 무형문화재 담당자), 문화재 위원 김천홍(1909~2007,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과 제39호 처용무의 예능보유자), 이흥구(무형문화재 40호 학연화대합설무 예능보유자)와 함께 승전무 북춤 보고서를 위한 무보 작업을 진행했다. 이때 김천홍은 승전무를 궁중무 계열로 보고, 우리는 그의 의견에 따라 춤의 계보를 정리했다. 의상, 명칭, 악사의 악법이나 복색 등도 궁중무용 양식으로 변형되었다. 북 둘레의 무용수를 원무라고 하고, 바깥의 무용수를 협무라고 하는데, 이 명칭도 그때 붙여진 것이다.

둘째 승전무를 민속경연대회 출품용으로 꾸미기 위해 크고 화려하게 바꾼 것이다. 원래 북춤은 무희 4명과 소리기녀 4명이었는데 원무 4명과 협무 8~12명으로 보고했다. 그리고 협무도 그냥 서있는 것보다 춤을 추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입춤을 추도록 내가 구도를 새로 잡았다.

셋째 춤사위를 추가하거나 변형했다. 발굴 당시 정순남이 기억하는 북춤 사위는 쌍오리, 머리위돌림사위, 북노래 4대목, 도입부분의 입춤이었다. 그런데 북노래 4대목 중 '달아 높이 고이 돋을사'와 '낙지자樂之者 오늘이야'와 '우리 우리 충무 장군 덕택이요'는 동작이 같아서 너무 지루했다. 나는 '충무장군'의 창사부분이 핵심이라고 판단하여 이 부분의 동작을 바꾸었다. 그리고 후렴의 '지화자' 부분에서도 돌림사위만 있었으나 좀더 동적이면서 흥을 돋우기 위해 몇 동작을 추가했다. 걸어가던 발동작도 너무 느려 지겹다는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여 원형에서는 염불 1장단에 1걸음이었던 것을 염불 반장단에 한 걸음으로 처리하였다. 이를 검증한 정순남은 '화려하게 잘도 맹글었다.'며 웃었다.

넷째 춤사위를 단순하게 조정했다. 당시 통영여고 무용반 학생들은 나의 지도를 받으며 민속경연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오랜 연륜이 쌓인 정순남의 춤을 흉내내기 힘들었다. 학생들이 출 수 있도록 내가 동작을 조정하는 가운데, 동작에 역동성이 떨어져 체조처럼 되어버렸다. 이때 학생들이 나에게 전수받은 동작은 현재 통영지방에서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중학교 시절 무용발표회(아래).

승전무의 칼춤은 1987년 추가되었다. 정순남은 검무와 북춤이 합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것을 나는 관계기관에 진정하였다. 그것이 인정되어 승전무는 북춤과 검무가 합하여 완전한 형태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승전무는 통영검무와 통영북춤을 함께 일컬으며, 통영지방 전통춤 중에서 유일하게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승전무 칼춤 보유자는 나이고, 북춤 보유자는 한정자이다.

통영검무는 조선시대 군복을 변형한 차림이다. 머리에는 전립을 쓰고 붉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으며 가슴에는 홍띠를 메고, 양손에 한삼을 끼고 춤을 추다가 칼을 든다. 춤사위는 크게 한삼춤, 손춤, 칼춤의 세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마루 한삼춤에서 겨드랑 사위는 손과 몸동작이 병선에서 노 젓는 모습을 재현하는 듯하다. 둘째 마루 손춤은 한삼을 벗고 앉아서 추는 춤인데 약지를 땅에 대고 다른 손가락을 움직여 만드는 손놀림(배김사위)이 교태스럽다. 셋째 마루 칼춤에서 가장 멋있는 사위는 진격태와 연풍대이다. 진격태는 마주보고 두 줄로 늘어선 무용수들이 외칼 혹은 쌍칼을 흔들며 전진하고 후퇴하는 동작인데, 칼을 든 무사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연풍대는 원으로 둘러선 8명의 무용수가 자전하면서 공전하는 매우 역동적인 춤이다.

통영 북춤은 입춤, 앉은춤, 북춤, 창사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입춤은 원무 네 명이 걸어 들어와 인사를 하는 춤이며, 앉은춤은 다시 인사를 하듯 내려 앉아 양손으로 한삼을 뿌리는 장면이다. 원무가 일어나 북을 향해 걸어갈 때 협무가 무대로 걸어 나오고, 원무가 북 주위에 배치되어 북춤이 시작된다. 북춤에서 3진 3퇴는 승전무의 전쟁 예술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춤은 무용수들이 북을 치고 세 걸음 물러섰다가 북을 향해 세 걸음 나아가서 북을 치는 동작인데, 병사들의 돌격을 연상케 한다. 창사는 앞에서 언급한 4대목과 그 이전의 느린 지화자 그리고 그 후의 빠른 지화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4대목의 창사에는 모두 '지화 지화 지화자'의 후렴이 붙어 있다. 창사의 내용은 진중의 공간('달아'), 병선 출항 때의 흥겨운 뱃노래('어기야'), 이순신 장군의 공덕에 대한 찬양('충무장군'), 승전의 즐거움에 관한 것('낙지야')이다. '지화자'는 좋다는 뜻이니 병사들의 사기를 높여주는 의미이다.

승전무 외에도 나는 많은 춤을 배웠다. 이매방 선생은 부산 와서 처음 만난 스승이다. 1970년쯤 범일동 지하에 있던 학원을 찾아가면 선생은 작은 체구를 웅크리고 의자에 앉아서 '왔니'라고 인사하곤 했다. 선생의 춤은 무르익은 젓갈 맛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맛깔스러웠다. 승무에서 선생은 한주먹이 되었다가 장삼을 펼칠 때는 비상하는 학의 날개가 되는 듯 했다. 힘이 있고 선이 극치를 이루는 그런 춤을 아무도 따라 추지 못한다. 선생께서는 춤을 가르친 제자 중에 내가 제일 잘 따라한다고 했는데 서울 가시고는 배움이 지속되지 못했다. 그 후 이동안, 한영숙, 김숙자 선생께도 배웠다.

훌륭한 선생님들의 춤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원향 살풀이춤은 나의 호를 딴 내 춤이다. 이 춤은 여러 선생님의 춤에다 정순남의 입춤과 승전무 호흡의 기법을 토대로 만든 춤이다. 나는 이 춤을 1996년 '명인명무'라는 무대를 통해 첫선을 보였는데, 대학 은사 김백봉 선생이 보러 와서 극장에서도, 그리고 나중에 부산으로 전화해서도 칭찬해주셨다. 선생께서는 워낙 칭찬에 인색한 분이라 그 격려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원향 살풀이춤의 가락은 박병천 선생(1932~2007,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의 용신풀이에서 따온 것이다. 한번은 선생의 구음이 너무 좋아서 생음악 반주로 공연한 적이 있다. 선생은 가족으로 구성된 악사들을 데려와서 연주를 했다. 그때 선생이 내 춤을 보면서 '꼭 엄옥자 살풀이춤에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지키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나는 여자 구음보다 남자들의 구음이 더 맞아서 지금도 선생의 용신풀이를 약간 변형해서 반주음악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는 동작에 연연하거나 리듬에 맞추기만 하는 춤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엇박을 즐기며 정신적인 것을 추구한다. 살풀이춤을 출 때 나는 오늘 누구를 위해서 살을 풀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춤을 춘다. 1992년 강이문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서울 공연이 잡혀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장례식 날 무대에서 살풀이춤을 추는데 하늘에서 선생이 빙긋이 웃어 주셨다. 살풀이춤을 통하여 나는 그렇게 영혼과 만나고 싶다.

2008년 8월 부산대학교를 은퇴하고 다음 해 부산국립국악원 무용단 예술감독을 맡게 되었다. 국립국악원은 전국에 4곳이 있는데 각 역할 분담이 있다. 서울은 정재 위주로 공연을 하고, 남원은 판소리를 위주로 한 극을 주로 하고, 진도는 숙박시설까지 갖춘 교육기관이다. 부산은 영남지역의 춤을 개발하고 전수하고 창작한다. 나는 영남지역의 민속춤을 우리 무용수들이 배워 무대에 올리도록 하고 있다. 지금까지 3년 동안 무속, 진주교방문화 관련 춤만 빼고 거의 다 올렸다.

무대와 마당은 차이가 있다. 동작은 같더라도 마당에서 공연할 때와 무대에서의 공연은 구성이 다를 수밖에 없다. 작년 밀양 백중놀이도 무대화하였다. 그것은 밀양에서 하는 백중놀이  원형과는 다르지만, 보존회 사람들도 무대에 올린 것을 보고 새로운 모습을 좋아했다. 앞으로 동래, 수영야류도 국악원 무대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통영은 내 어머니이다. 나는 통영에서 태어나 자랐고, 통영 춤을 배우며 무용가가 되었다. 국악원의 임무를 마치면 통영으로 돌아갈 것이다. 거기서 승전무의 아름답고 우아한 춤사위를 보급하면서, 아직 발굴되지 않은 통영의 춤을 찾아내어 전수할 것이다. 다시 운명이 나를 통영으로 인도하고 있다.

작성자
예술부산 2012년 4월호
작성일자
2012-12-04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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