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부산이여
상생의 새 구상, 한반도 그랜드 디자인 심포지엄을 다녀와서
- 내용
이른 아침 부산역을 떠난 기차는 창가에 부서지는 눈부신 아침햇살을 느끼려는 순간, 이내 캄캄한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동굴 속에는 부산이 없다. 예전, 부산을 떠나갈 때, 혹은 부산에 왔음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던 풍경들, 항구에 정박한 커다란 배들과 높이 쌓인 컨테이너 박스, 초대형 크레인, 바다 위를 드리운 푸른 부산 하늘과 해무(海霧)들은 이제 아예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부산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서울’로 간다. <상생의 새 구상, 한반도 그랜드 디자인> 심포지엄에 참석해 도시설계의 거목 김석철 명지대 석좌교수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다. 발표 주제 중에 ‘부산-낙동강 도시연합’ 이라는 대목이 눈을 확 끌었기 때문이다. 아, 부산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하실까 못내 궁금했다.
김석철 교수는...
김석철 교수는 세계적인 도시설계가다. 한국 근대건축의 토대를 놓은 김중업, 김수근 선생을 사사했으며, 지금의 여의도와 한강 개발사업을 디자인했고, 서울대와 서울 예술의 전당,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이 그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
그이의 표현대로, 그의 명성은 오히려 외국에서 더 알아준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쿠웨이트 자라 신도시, 공자의 고향인 중국 취푸(曲阜) 신도시, 베이징 경제특구, 아제르바이잔 바꾸 신도시 등을 설계했다. 외국에서는 그를 위해서 대통령 전용 헬기와 차를 내줄 정도로 극진한 대접을 받는단다.
미래의 대통령에게...
심포지엄은 10일 오후 2시 서울 명동 YWCA 대강당에서 열렸다. 한국지방발전연구원과 세교연구소가 공동 주최했고, 도서출판 창비가 후원했다. 김석철 교수의 새 책 <한반도 그랜드 디자인-2013 대통령 프로젝트> 출판이 계기가 됐다. 책의 구성과 내용은 올해 말에 뽑힐 대통령, 혹은 미래의 대통령에게 한반도 공간구조 재편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며, '지방권 분권정부', '수도권 혁신', '북한 도시건설' 등 3가지 주제 아래 7가지 중점 사업을 제안하고 있다. 부산과 관련해서는 따로 27쪽을 할애해 ‘부산-낙동강 도시연합’에서 기술하고 있다. 책 내용을 여기서 설명하는 건 적절치 않다. 대신, 심포지엄에서 나온 부산 관련 발언들을 그대로 옮길 생각이다.
일흔을 앞둔 노교수는 강연 전날 밤에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병중이라 강연이 어려울 것이라 했는데, 역시 강연 내내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하지만 마이크를 쥔 그의 열정은 모두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10년 전에 위암 판정을 받았고, 올해도 두 차례에 걸쳐 식도암과 임파선암 수술을 받았다 한다. <한반도 그랜드 디자인-2013 대통령 프로젝트>는 5개월간의 투병 생활 동안 구상·집필한 책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그가 병마와 싸우며 한국과 부산의 내일을 위해 보내는 피의 절규인지도 모른다.
향후 5년간 상상치 못한 큰 불황이 닥친다."향후 5년간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큰 불황의 늪에 빠져들 것입니다.
지금은 한반도가 살아남을 “생존”을 이야기해야 하는 때입니다.
지금처럼 돈은 마구 찍어내면서 어디에 투자할지 모르는 세계 자본을 끌어들여서 성장과 발전을 지속시켜 나가야 합니다.예멘 뉴 아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예멘 대통령도 그런 말을 합디다. ‘도시 건설이 가장 확실한 투자 사업’이라고. 지금부터 도시 개발을 통해 세계 자본이 참여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야 합니다.”
김석철 교수의 첫 마디는 이랬다. 지금이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진단이다. 그 위기를 세계 자본이 투자할 만한 매력적인 도시개발 사업을 만들어서 돌파하자는 생각이다. 평생을 도시설계에 바쳐온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부산은 이미 ‘도시국가’ 수준
김석철 교수는 이날, 한반도 그랜드 디자인을 설명하면서 크게 ‘지방권 자립’ ‘수도권 혁신’ ‘북한도시 건설’ 3개 분야로 정리해 이야기했다. 여기서는 지방권 자립, 지방분권정부와 관련하여 부산을 언급한 내용들만 옮긴다.
김 교수는 대한민국이 ‘서울 중심의 나라’가 된 데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내며, 그 돌파구로 인구 2500만 명 규모의 ‘지방권’을 수도권에 대응할 정도의 자립적인 국가 단위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했다.
부산은 이미 ‘도시국가’ 수준까지 왔다고 했다. 하지만 “동북아 허브항만의 이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으며, 항만과 함께 시들어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말을 듣자, 그만 가슴 속이 울컥! 했다. 해양수산부가 폐지될 때, 부산은 이미 그때부터 시들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전당이 서고, 마천루가 빽빽이 솟아오르고, 문현 금융단지가 가시화되고, 부산시민공원이 조성되어도, 부산은 늘 뭔가 허전했다. 부산의 정체성은 “바다”이고, 해양에서 그 꿈을 찾고 펼쳐야 하는데 현실은 자꾸 바다로부터 멀어지고 있지 않은가!
서낙동강에 운하도시와 공항·항만 복합단지, 배후산업단지를 두는 강서운하도시특구 조감도.서낙동강 운하도시를 만들어 부산의 스케일을 키우자
김석철 교수는 부산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과거 정권에서 부산에 대해 치명적으로 잘못한 것이 있다. 부산의 식수인 낙동강 상류에 공단을 조성한 것이다. 현 상태에서는 낙동강 수질 개선이 어렵다. 낙동강 옆으로 수로(운하)를 파서 상류의 폐수를 빼내고, 운하와 낙동강 사이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수 있다. 선거에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책에는 써놓지 않았지만 부산신항 배후단지가 시급하다. 김해공항 16.5㎢을 배후물류단지화 해야 한다. 항만만 가지고는 동북아 물류허브 기능을 할 수 없다. 공항과 통합기능을 가져야 한다.”
그는 <한반도 그랜드 디자인> 책에서도 이렇게 써놓았다. 큰 틀에서 정리하자면 이렇다.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대규모 지역경제권이 중심이 된다. 산업혁명 이후에 건설된 세계도시의 대부분은 항만도시다. 항만을 중심으로 물류유통이 이루어지고 산업과 금융이 일어났다. 부산항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10대 재벌 중 7개 기업이 부산에서 탄생했을 정도다. 아시아의 주요 물류가 유럽과 북미로 가기 위해서는 부산신항을 통과하는 루트가 가장 유리하다. 그러나 부산항을 옮기는 데만 주력해서 부산신항은 옛 부산항을 뛰어넘는 강력한 도시권역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항만과 공항과 경제 특구 클러스터가 세계경제의 중심이 되고 있으나 부산신항과 김해공항은 공동경제권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부산신항과 지방권 통합공항이 하나로 연결되면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부산 같은 바다도시에서 자연스럽게 스케일을 키우는 길은 하구에 운하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부산의 토지 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운하다. 서낙동강 일원과 부산신항 일대가 낙동강 경제공동체의 핵심지역이다. 세계 물류의 흐름만이 아니라 세계적 대학과 창조적 신산업을 함께 끌어들일 수 있다.”
부산을 원부산, 서부산, 동부산으로 재편하는 부산어반드림 다이어그램.신공항 건설 논의도 뜨거웠다
김석철 교수는 ‘지방권 통합공항’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신공항 건설은 이 자리에서도 민감한 사안이었다. 패널들의 갑론을박이 치열했다.
“인구 500만~800만을 수용하는 공항도시는 적합하지 않다. 해외이용객 증가 추세도 한계가 있다”는 주장에서부터, “이미 있는 지방공항 문제를 그냥 두고 신공항을 만들겠다는 건 과잉투자”라는 신중론까지. 하지만 부산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부산은 동북아의 지중해에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남부권의 교두보이다. 위치적으로 괜찮다고 본다. 소프트 인더스트리(soft industry)를 확충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빡빡한 하루 일정을 마치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 서울의 휘황한 불빛이 차장 가득 들어왔다. 낮에는 차창 밖 한강 풍경, 밤에는 도시의 야경 불빛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왔음을 알려주건만, 부산은 부산역 플랫폼을 벗어나면 이내 캄캄한 암흑천지다. 부산을 느낄만한 “순간의 틈”도 주지 않는 도시. 개방과 포용을 이야기하는 부산이 외려 오감(五感)을 차단하는 도시가 되고 있지는 않나 하는 걱정이 달리는 어둠과 함께 엄습한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 때문이 아니더라도 <부산의 그랜드 디자인>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무겁게 부산역에 발을 디딘다.
- 작성자
- 원성만
- 작성일자
- 2012-10-12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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