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근대역사관
#Ⅰ. 다시쓰는 역사 첫 번째: 8월 15일을 부르는 용어에 담긴 역사 인식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과거는 무엇이고 또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과거를 이야기할 때, ‘역사’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이때 역사는 단순한 과거 자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건으로서의 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사는 ‘당시’를 의미하는 한시적인 과거 그 자체만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지나간 미래’이기도 합니다.
지나간 미래로서 우리에게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역사 중 하나가 바로, 일제강점기의 역사입니다. 특히, 일제의 억압적 통치에서 벗어난 1945년 8월 15일은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을 의미하기에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날입니다. 우리가 그날을 지금까지 기리며 기억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올해는 1945년 8월 15일로부터 80돌 되는 해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8월 15일을 어떤 날로 인식하며 기리고 있나요? 우리의 인식은 주로 언어를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는 언어가 지배하는 상징적인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요. 8월 15일을 부르는 용어를 살펴보면 광복, 해방, 독립 등으로 다양합니다. 이는 단순한 표현상의 차이만이 아니라 시점과 시제, 주체와 대상, 그리고 역사 인식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기에 그 의미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을 지칭하는 광복, 해방, 독립 등의 용어에 대해 이미 학계와 언론 등에서는 주체의 관점에 따라 의미 차이가 있음을 검토했습니다. 이들 용어가 피동형 또는 사동형인지 아니면 능동형인지에 따라 차이점이 생긴다는 것이죠. 이 주장에 따르면 우리 스스로 일제의 억압적 통치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하는 광복이나 독립이 해방보다는 더 적절한 표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1945년 당시의 역사는 훨씬 더 복잡했습니다. 8월 15일을 맞이한 것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따른 결과이기도 했지만, 2차 세계대전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광복은 능동적이고 해방은 수동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빛이 회복되는 것 역시 자연의 힘에 의한 것이니까요. 더군다나 역사적 관점에서 당대 사람들은 해방과 독립이라는 용어를 더 자주 사용했습니다.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세계를 의미하는 해방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었습니다. 또한 다른 나라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선다는 독립은 자주적이고 통일된 국가에 대한 희망이 담긴 당시의 자신감을 표현한 것이죠. 또한,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형식적인 해방과 독립은 이뤘지만, 미국과 소련에 의해 군정이 곧바로 실시되면서 자주 통일 국가 수립이라는 실질적 해방과 독립은 아직 미완의 상태였습니다. 해방과 독립은 이러한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미래 지향적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광복은 과거를 반영하고, 독립과 해방은 현재를 반영하며 미래의 희망이기도 한 점에서 각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8월 15일을 기리는 용어의 의미를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은 8월 15일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일입니다. 8월 15일을 기리는 용어를 또 다른 차원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대한민국 정부는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 관한 법률>로 8월 15일을 '광복절’로 제정하고 현재까지 기념하고 있습니다. 처음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법률안에는 ‘독립기념일’로 명시되었지만, 이 의결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광복절’로 수정된 후 의결되었고, 이후 국회 본회의를 거쳐 제정되었습니다. 이런 흐름에서 볼 때, 큰 틀에서는 ‘광복’과 ‘독립’을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독립이 아니라 광복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시기와 대상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광복과 독립은 단어의 원론적 의미를 넘어 ‘국권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국권, 곧 국가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시기가 1945년 8월 15일이고 국가의 대상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면 광복과 독립은 같은 의미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가 ‘광복군’이었고 여당이 ‘한국독립당’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만약 시기가 1948년 8월 15일이고 국가의 대상이 당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라면 독립기념일의 독립은 광복과 전혀 다른 의미로도 해석 가능합니다.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의 왜곡된 역사관에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같은 오해의 여지를 처음부터 불식시키기 위한 것인지, 당시 국회와 정부는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의 날로 인식하고 국권 회복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회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광복, 해방, 독립 등은 1945년 8월 15일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시대적 환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용어가 지닌 의미를 통해 그날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덧붙이자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1945년 8월 15일은 과거의 회복과 함께 현재와 미래의 희망을 담는 날로 기리며 기억하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