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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6호] #3. 사람 이야기 두 번째: 작가 박미경과 함께 하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기억

부서명
전시팀
전화번호
051-607-8043
작성자
이아름
작성일
2025-06-09
조회수
9
내용

#3. 사람 이야기 두 번째: 작가 박미경과 함께 하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기억




광복 80주년을 맞아, 박차정 의사의 삶을 동화로 전한 

「박차정: 민족과 여성의 진정한 자유를 꿈꾸다」 저자 박미경 작가를 만났습니다. 

인터뷰가 진행된 5월 27일은 박차정 의사의 기일이라 더 뜻깊었는데요. 

인터뷰 전 박미경 작가의 곁을 맴돌던 하얀 나비가 더 애틋하게 느껴지기도 하였습니다.





박미경 작가는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여성들의 삶을 글로 되살려내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꽃신 신고 독립운동」, 「나혜석, 시대를 그리다」에 이어, 「박차정: 민족과 여성의 진정한 자유를 꿈꾸다」를 통해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박차정 의사의 삶을 동화적 서사로 복원해냈습니다.

박미경 작가의 글은 기록이자 위로이며, 다음 세대를 향한 다정한 목소리입니다. 박미경 작가는 말했습니다.

 “이름조차 불리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이제는 우리가 불러야 할 때입니다.”



Q1. 작가님, 반갑습니다. 독자분들에게 짧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글 쓰는 게 좋아서 글을 쓰기 시작한 부산의 소설가입니다. 2004년에 아동문학평론지에 동화 <비둘기가 사는 집>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동화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동화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은 소설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과는 또 다르더군요. 꾸미지 않은 맑고 깨끗한 동심으로 아이들에게 이 세상을 쉽게 소개해주는 사람이 동화작가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Q2. ‘박차정’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심정은 어떠셨나요? 어떤 계기로 박차정 의사에 관한 책을 쓰게 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저는 한동안 복천동에 살았어요. 박차정 생가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길을 늘 지나다니면서도 가 볼 생각은 하지 않았죠. 사실, ‘박차정’이라는 이름만 처음 듣고는 남자분인 줄 알았습니다. 그저 ‘이 동네에도 독립운동가가 한 분 계시는구나.’하는 생각 정도만 하며 지냈죠.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인물로 만나는 부산정신>이라는 시리즈로 부산의 독립운동가 5명의 책을 기획했어요. 그중에 박차정 의사도 있었죠.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자는 취지로 동화작가가 섭외되었는데, 저도 섭외 제안을 받았습니다. 5명의 독립운동가 중에 ‘박차정’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동네를 지나다닐 때마다 봤던 이름이라는 것이 생각이 났어요. 막연히 ‘같은 동네에 산 내가 더 잘 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제가 박차정 의사를 맡겠다고 얘기했죠. 그때부터 박차정 의사와의 인연이 시작되었어요.


Q3. 책의 집필 과정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쓰셨나요?

  

2017년쯤에 섭외 제안을 받고, 2019년에 책이 나왔습니다. 자료가 너무 없어서 자료 조사에 꽤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되도록 많은 분을 만나 자료를 조사했어요. 객관적으로 믿을 만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박차정 의사 부모님의 고향인 기장에는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박차정 의사의 집안 역시 독립운동가 집안으로서 당연히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가풍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자연인 박차정은 어떤 사람일까가 궁금했어요. 어떤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결심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시대를 살아가려 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박차정 의사의 알려진 말과 행동 뒤에 숨겨진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해보면서 ‘박차정’이라는 사람을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Q4. 박차정 의사는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여성 독립운동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하신 분인데요. 이런 직책을 맡게 된 배경에 박차정 의사의 어떤 정신이 있었다고 보시나요?


조선의 여성은 가부장제하에서 삶을 희생당했습니다. 게다가 일제강점기가 되고 나서는, 가부장제의 억압과 함께 일제의 탄압도 받는 이중고를 겪게 되었죠.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다행히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박차정 의사는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호주 선교회에서 만든 일신여학교는 남녀평등사상이 교육지침이었어요. 박차정 의사는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이곳에서 독립운동가의 바탕을 길러, 학생 투쟁 운동을 비롯하여 근우회, 신간회, 청년회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본격적인 투쟁은,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후, 서울지역의 여학생 동맹과 함께한 시위인데요. 이 일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고문받게 됩니다. 여성으로서 선봉장에 나서 힘든 투쟁을 해 나간 것이죠. 박차정 의사는 시와 글도 잘 썼다고 하는데, 재능이 있는 문학으로 투쟁할 수 있었는데도,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투쟁을 했습니다. 후에 직접 전장에 나가 총을 드시기도 하셨죠.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이런 강한 투쟁 정신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Q5.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는 여전히 드물고, 작게 다뤄집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의사의 이야기를 집필하면서 작가님이 느끼신 바가 있으신가요?


밀양에 있는 박차정 의사의 묘소를 가 보면 비석에 ‘여성 운동가 박차정’이 아니라 ‘김원봉의 처, 박차정’이라고 적혀있습니다. 박차정 의사는 누군가의 부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사셨고,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분입니다. 비석에 ‘김원봉의 처’가 아니라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로 남겨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부분에서 우리나라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위치가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박차정 의사가 추구한 것은 ‘조국의 독립’과 ‘여성의 독립’이었습니다. 부녀복무단장을 하게 된 것도 여성운동을 하기 위해서였죠. 박차정 의사는 여성의 삶이 좀 더 나아지기를 바란 사람이었어요. 여성들이 깨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우리나라의 여성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로서 많은 노력을 하셨어요.  종종 박차정 의사에 관한 강연을 할 때면, 박차정 의사의 삶처럼 여성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서 얘기하게 됩니다. 박차정 의사가 지금을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주는 메시지도 바로 이런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Q6. 이 책을 집필하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혹은 쓰기 힘들었던 장면이 있었나요?


박차정 의사의 삶을 들여다보면 가슴 아픈 부분이 정말 많습니다. 자료 조사를 하면서, 박차정 의사의 동생인 수필가 박문하의 수필집을 읽었는데요. 수필집에 ‘4남매가 광복군으로’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글에는 박차정 의사 가족의 삶이 그려져 있어요. 막내아들이었던 박문하는 어린 시절에 호떡 장사, 구두닦이 등을 하며 돈을 벌었다고 해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형과 누나들은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 상황이었죠. 호떡을 팔러 나간 밤에, 창가에서 흘러나오는 어느 가족의 웃음소리 듣고 자신의 가족이 사무치게 그리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부분을 읽으며, 박차정 의사가 가족과 함께한 시간이 참 짧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어요. 부친이 일제에 항거하며 자결한 1918년은 박차정 의사가 7, 8살 때이고, 이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독립운동을 했으니까요.




심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이 남은 몸을 이끌고 독립운동을 계속 한 점 역시 마음이 아팠습니다. 박차정 의사가 돌아가신 충칭은 안개도 잦고, 동굴도 많아 폭격을 피하기가 좋은 지역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습기가 많고, 수질이 좋지 않은 지역이라 상처 많은 몸을 회복하기가 쉽지 않았죠. 열악한 환경에서 버티느라 몸이 더 쇠약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Q7. 책이 역사책보다 더 술술 읽힌다는 반응도 많았습니다. 특별히 독자와의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고민하신 부분이 있으신가요?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독립운동단체의 이름만 해도 어렵고 생소해 동화의 주된 독자인 아이들이 거부감을 느낄 것 같았어요. 명칭은 어쩔 수 없으니 대신 문장을 쉽게 쓰려고 굉장히 노력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사상에 관한 내용입니다. 당시는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사상을 받아들이는 관점이 지금과는 달랐어요. 자금이 부족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마찬가지로 일제에 항거하고 있었던 중국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기도 했어요. 김원봉의 의용대 역시 중국에서 자금을 지원받았고, 중국 소속의 군인으로 편입돼 훈련을 받고, 북경대에서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자금을 지원받는 상황이니, 사상은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과 맥락을 고려해 역사적 흐름 속에서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사상에 중점을 두지 않고,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노력에 더 무게를 두려고 했죠. 후대에 와서 박차정 의사를 비롯하여 오빠인 박문희, 박문호 의사도 건국훈장을 받게 된 것을 보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인 흐름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 것 같습니다.  


Q8. 박차정 의사는 작가님께 어떤 존재로 남았나요?


저에게 박차정 의사는 마음을 나눈 친구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글로 마음을 나누면서, 박차정 의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으니까요. 박차정 의사처럼 주체적으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여성의 삶은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며느리, 누군가의 부인’으로 정의되곤 하는데요. 박차정 의사는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것을 떠나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Q9. 광복 80주년을 맞아, ‘박차정’이라는 이름을 다시 불러보는 지금, 작가님께 ‘광복’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광복은 나라를 되찾는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박차정 의사의 정신을 알아가며 진정으로 제 안에서 광복이 일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덕분에 앞으로 부산의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결심도 하게 됐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분들이 아직도 많이 계십니다. 독립을 입에 담는 것조차 힘든 시대 상황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했던 작은 일이더라도 후손들에게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부산의 작가로서 우리 지역에 숨어있는 이야기와 정신을 알리는 것이 저에게는 ‘광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터뷰 내내 하얀 나비가 곁을 맴돌던 모습을 떠올리면, 문득 박차정 의사께서 나비가 되어 우리 곁을 맴돌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계셨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신 박미경 작가님과 소중한 이미지를 제공해주신 호밀밭 출판사 장현정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2025년 작가 박미경이 박차정 의사에게 보내는 한 통의 편지로 인터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