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전체기사보기

광복 75주년,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의 ‘넋’ ‘기억의 터’에 안식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내 5층에 개관…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위패 모신 추모공간
광복 75주년…아직도 끝나지 않은 친일청산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잊지 말아야 할 역사 가슴으로 배우는 곳

관련검색어
광복 일제 친일청산
내용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내에 ‘기억의 터’가 문을 열었다. ‘기억의 터’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된 희생자들의 넋(위패)을 기리고 유족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한 추모공간이다(사진은 ‘기억의 터’ 에 모신 위패를 둘러보는 시민들 모습).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내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공간 ‘기억의 터’ 모습.
- 출처 및 제공 : 문진우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과 ‘기억의 터’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 불러봤네. 내 발로 걸어간 것도 아니여, 어머니 소리도 크게 못 부르고 그 말만 하면 몽둥이 맞았네.”

“우리 어린애들이 부모 생각 절로 나서 안 우는 날이 없었어. 그냥 금수 취급하듯이 하고, 사람같이 취급을 허덜 안혀. 수족만 멀쩡하면 막 가는 거야. 옛말에 그래, 묻지마라 갑자·을축생은 군인에 가야 한다.”

“매달 오 원씩 집으로 보낸다고 해서 월급에서 뺐는데, 집으로 하나도 안 갔어. 배가 고파서 취사반에 가서 누룽지 주워 먹다가 얻어맞고.”

부산 남구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5층에 자리한 ‘기억의 터’ 벽면에 절규인 듯 새겨진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생생한 증언이다.


‘기억의 터’, 강제동원 희생자 기억하자 의미

대일항쟁기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됐다 유골 한 점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의 넋(위패)이 광복 75주년을 맞아 부산에 안식했다. 부산 남구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내에 ‘기억의 터’가 지난 6월 19일 문을 열었다.

‘기억의 터’는 대일항쟁기 일제의 수탈과 착취, 만행을 고발하는 증거이면서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유족의 슬픔을 보듬는 ‘추모공간’이다. 최대 4천여 위의 위패를 봉안할 수 있으며, 우선 815위의 위패를 모셨다. 광복 75주년을 맞아 아직도 한국인 희생자는 없었다는 일본의 역사 왜곡을 꾸짖는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한 맺힌 절규이자 역사의 현장이다.


2∼3-11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내에 ‘기억의 터’가 문을 열었다. ‘기억의 터’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된 희생자들의

  넋(위패)을 기리고 유족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한 추모공간이다. 사진은 ‘기억의 터’ 벽면에 새긴 피해자 증언과 기증 사진

  자료들을 둘러보는 시민들 모습). 사진·문진우
 

조선인 4명 가운데 1명 강제동원

‘강제동원’은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자행한 인적·물적 동원과 자금 통제를 말한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이전에는 일반 모집의 형식을 빌려 조선인들을 토목공사장이나 광산에서 집단노동을 시켰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국가 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을 통해 본격적인 강제동원에 나선다.

강제동원된 조선인의 숫자는 무려 782만여 명(중복 동원 포함). 1942년 기준 조선총독부 통계연보는 당시 조선의 인구가 2천630여만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4명 가운데 1명꼴로 강제동원된 것이다.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광산(탄광)이나 군수공장, 건설 현장에 투입돼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착취를 당했다.

어린 소녀들은 군수물자를 만드는 공장으로 끌려갔다. 당시 한반도 내 일본 군수공장은 7천여 개가 넘었다. 감옥 같던 공장에서 어린 소녀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중노동에 시달렸고, 심지어 야간 노동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한 푼의 돈도 못 받았다. 그렇다고 도망칠 엄두조차 못 냈다. 자신이 공장일을 하지 않으면 일본 순사가 고향 집 부모님을 괴롭힌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도 알았기 때문이다.

강제동원된 조선인 대다수는 고된 노동과 착취로 고통받았고, 평양 미림비행장 노동자 800여 명이 공사 후 기밀 유지를 위해 죽임을 당한 것처럼 집단 학살도 곳곳에서 자행됐다. 그래서 유골조차 없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최근 들어 강제동원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지만, 희생자 대부분은 우리 역사에서 잊힌 존재였다. ‘강제동원’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이들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의미를 담아 전시관 이름을 ‘기억의 터’로 했다.


2∼3-1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희생자들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의미를 담아

  전시관 이름을 ‘기억의 터’로 했다. ‘기억의 터’ 입구 모습. 사진·문진우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 명확한 증거 

‘기억의 터’에 들어서면 왠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일제강점기 당시 사진과 증거 자료, 희생자들의 위패로 빼곡한 이곳을 찾은 방문객은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오랜 시간을 머무른다. 위패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태어난 날, 사망한 날이 적혀 있다. 대부분이 20대 초반을 갓 넘긴 어린 청춘이다. 그래서, 젊음과 목숨을 송두리째 빼앗긴 한 사람 한 사람의 위패를 결코 쉽게 지나칠 수 없다.

위패 815위의 사망 장소는 일본이 263명으로 가장 많고, 남양군도 171명, 사할린 114명, 뉴기니 70명, 필리핀 50명, 중국 43명 등이다. 사망 시기 확인이 가능한 희생자는 497명으로 이들은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이 제정·실시된 이후인 1939∼1945년에 사망했다. 이들은 ‘우리가 바로 너희가 벌인 전쟁범죄의 증거’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2∼3-2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4층 피해자·기증자 기념공간. 사진·문진우
 

2∼3-5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희생자들의 유물과 다큐멘터리 영상뿐만 아니라 피해자와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사진·문진우


2∼3-4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일제강점기 고난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4층 상설전시실Ⅰ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자료를 살펴보고 있는 시민들 모습. 사진·문진우

강제동원 비극…직접 체험하며 배우는 역사 

‘기억의 터’가 들어선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하 역사관)은 지난 2015년 12월 10일 개관했다. 부산 남구 대연동 산자락에 있는 역사관은 ‘함께 기억하고 널리 알리는 역사관’을 목표로 한다. 일제강점기 광범위하게 자행된 강제동원의 참상을 국민에게 알리고 피해자와 유족의 아픔을 함께 기억하고 치유하려는 목적도 담았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된 인력의 22%가 경상도 출신인 데다 관부연락선(부관페리) 등의 출항지로 부산항이 강제동원의 출발지였던 역사성을 고려해 부산에 세워졌다.

역사관은 일제강점기 고난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4층 상설전시실Ⅰ, 5층 상설전시실Ⅱ와 상징조형물, 6층 기획전시실이 전시공간이다. 7층은 하늘광장과 추모공원이다(6층과 7층은 코로나19로 현재 휴관).

4층 상설전시실Ⅰ은 일제가 저지른 강제동원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제동원의 시작에서부터 실체, 광복과 귀환, 마무리되지 않은 피해자들의 상처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특히 조선인 524명의 목숨을 빼앗았지만 아직도 미제인 채로 남은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도 소개하고 있다. 우키시마호 폭침은 광복을 맞아 조선인 수천 명을 태우고 ‘오미나토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들어오려던 배를 일제가 의도적으로 폭침했다는 의심을 받는 사건이다.

5층 상설전시실Ⅱ는 강제동원의 현장을 체험하는 공간이다.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피해자의 아픔과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해 놓았다. 강제동원 과정과 조선인 노무자 숙소, 탄광, 중서부 태평양 전선, 일본군 위안소 등을 보여주는 그림과 실물 모형, 홀로그램 영상 등이 이어진다. ‘죽을지 살지 모르는 길을 떠나는데… 발길이 안 떨어져’라는 벽면의 문구가 큰 아픔으로 다가온다.

올해는 광복 75주년이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면서도 8월 15일 광복절에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찾아보는 것도 뜻깊고 의미 있을 것 같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 모여 살던 곳

‘빛 되찾았다’ 의미 담아 ‘광복동’으로


∎광복동(光復洞) 유래

부산 중구 광복동(光復洞)은 1876년(고종 13) 일본인 전관 거류지가 되면서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상업과 업무 기능이 모여들면서 주거 인구는 줄어든 반면 유동 인구는 급격히 늘어나 부산을 대표하는 상업지역으로 점차 발전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지역으로, 원래는 부산 동래군 부산면이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동명을 바꿀 때 일본인에 의해 번창하던 곳에서 ‘빛을 되찾았다’는 의미를 담아 ‘광복동’으로 했다.

작성자
조민제
작성일자
2020-07-28
자료출처
다이내믹부산
제호

다이내믹부산 제202008호

첨부파일
다이내믹부산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자료관리 담당자

소통기획담당관
강아랑 (051-888-1291)

페이지만족도

페이지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평균 : 0참여 : 0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를 위한 장이므로 부산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부산민원 120 - 민원신청새창열림 아이콘"을 이용해 주시고, 내용 입력시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등 개인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광고, 저속한 표현, 정치적 내용, 개인정보 노출 등은 별도의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