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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조선공업 발상지 ‘깡깡이마을’ 6·25전쟁 피란민촌 ‘흰여울마을’

내용

영도는 조선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영욕의 부산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부산의 근·현대사와 함께한 영도대교를 비롯해 임진왜란 직후 절영도 임시왜관 터였던 대풍포, 일제강점기 일제의 근대조선공업기지였다가 산업개발시대 깡깡이 아지매들의 고된 노동의 현장이었던 대평동 일대까지….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간직한 영도를 우리는 지금 ‘부산 근대조선공업의 발상지’라 부르고 있다. 봄의 끝자락, 영도대교-영도수리조선소길-깡깡이마을-영도 전차종점 터-흰여울마을 등을 따뜻한 마음으로 한 번 걸어본다.

 

영도 흰여울 마을

 

부산 근·현대사 아우르는 ‘영도대교’


국내 최초로 큰 배가 드나들 때 상판을 올리도록 설계된 도개교인 영도대교. 영도대교는 육지인 중구와 섬인 영도구를 잇는 다리로 1935년 ‘부산대교’라는 이름으로 개설됐다. 1966년 영도대교에 상수도 시설을 설치하기 전까지, 다리의 기능과 더불어 운하의 기능까지 수행하던 구조물이었던 것. 당시 하루에 7번씩 도개를 했는데, 허공으로 끄~덕 다리가 들리는 모습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부산의 명물’이었다. 준공식에는 구경꾼이 5만 명이나 몰렸다고 하는데, 부산 인구가 15만여 명 때의 일이니 엄청난 숫자다.

 

원래 영도대교는 일본인들에 의해 해운과 육로의 수탈을 목적으로 건설됐던 교량이다. 6·25전쟁 피란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부산으로 온 피란민들은 이 영도대교 난간에서 가족 찾는 벽보를 통해 가족 상봉을 애타게 기다리기도 했었고, 다리 밑 점바치들에게 가족의 생사를 묻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듯 신산했던 부산 근·현대사의 질곡을 용케 견디며, 이제는 부산을 대표하는 역사문화유적이자 우리 부산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존재로 남아있다.

 

영도대교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에 6·25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가수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와 동상이 위치해 있다. 영도에서 태어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현인 선생이 자리에 앉아 손을 뻗고서 노래하는 모습으로 2003년에 건립됐다.

 

영도 대평동 수리조선소길은 한국 근대조선공업의 발상지다. 지금은 도시재생을 통해 영도 ‘깡깡이 예술마을’로 거듭나고 있다(사진은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오래된 창고에 벽화를 그린 모습).

▲영도 대평동 수리조선소길은 한국 근대조선공업의 발상지다. 지금은 도시재생을 통해 영도 ‘깡깡이 예술마을’로 거듭나고 있다(사진은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오래된 창고에 벽화를 그린 모습).


대한민국 조선공업 발상지 ‘대평동’


영도대교에서 보면 영도경찰서 해안 길을 따라 대평동 수리조선소길이 펼쳐진다. 멀리 대동맨션 쪽으로 포구가 보이고, 크고 작은 배들이 빽빽하게 줄지어 정박해 있다. 대풍포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대풍포(大風浦)는 영도 대평동에 있었던 포구였다. 원래 남항동 끝자락 호안을 둘러싸고 있던 낚싯바늘 모양의 모래톱으로, 3면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어서 포구로 이용됐던 곳이다. 태풍이 오면 대피하기 좋은 포구라 해서 대풍포(待風浦)라고 불리기도 했던 곳이다.

 

대풍포는 임진왜란으로 폐쇄된 부산포 왜관을 대신해, 선조 34년(1601년) 임시왜관이 설치됐던 곳. 1609년 두모포 왜관이 설치될 때까지 일본 사신이 이곳에 머물며,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의 송환 등 외교업무를 보던 장소이기도 했다. 고종 13년(1876년) 부산항 개항과 함께 일본 어선들의 피난, 건조, 수리 등 선박 관련 업종들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일본인들의 어로 본거지가 된다. 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이곳 대풍포를 중심으로 해안매립이 진행돼 1926년 매축공사를 준공하게 된다. 총 13만2천600㎡가 매립됐는데, 지금의 대평동·대교동·남항동 일대 지역이다. 이로써 대풍포 일대는 항만의 면모를 갖추고 1930년대 다수의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근대조선공업의 중심지가 된다.

 

‘깡깡이길’은 크고 작은 조선소와 수리조선소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수리조선소에서 선박수리가 한창이다.

▲‘깡깡이길’은 크고 작은 조선소와 수리조선소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수리조선소에서 선박수리가 한창이다.


6·25전쟁 이후로는 어로에 종사하던 어부가 급증함에 따라 남항동, 대평동의 선박건조 및 수리기술 또한 급속하게 발전해여, 한때 “대평동에서 못 고치는 배는 없다”고 할 정도로 수리조선업이 발달하게 된다. 현재도 십여 곳의 수리조선소와 200여

 

개에 달하는 선박 관련 공업사와 선박부품업체가 마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국내 조선업의 발전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수리조선소길 일대의 대평동은 한국 근대조선공업의 발상지이자 유적지다. 한진중공업, 대선조선 등 크고 작은 조선소가 영도에 밀집해 있는 이유도, 대평동이 지니고 있는 역사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그 길을 따라 걷는다. 영도경찰서 뒤편, 과거 땔감용 나무와 숯을 팔던 점포가 있었던 ‘나무전 거리’를 지나자, 포구 입구 ‘대풍포 매축지 기념비’가 사람을 맞는다. 물양장 너머 대동대교맨션이 자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스탠다드 오일’이라는 미국 석유회사가 있었던 자리. 수리조선소길의 시작점이다.

 

흰여울마을은 6·25전쟁 당시 피란민촌으로 형성된 마을이다(사진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 흰여울마을_사진제공·영도구).

▲흰여울마을은 6·25전쟁 당시 피란민촌으로 형성된 마을이다(사진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 흰여울마을_사진제공·영도구).


대평동 수리조선소길을 따라 걷다

수많은 선박들이 정박해 있는 뱃머리길을 지나자 옛 대평동 선착장이 나온다. 영도 대평동에서 자갈치시장까지 도선이 오가던 곳이다. 1926년 조성돼 영도대교가 건립되기 전까지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2009년까지 부산에서 유일하게 버스 차비와 같이 도선료를 받고 도심의 나룻배 역할을 했던 해상교통운송수단이었다.

 

요즘 대평동 수리조선소길 일대를 ‘깡깡이마을’이라고도 부른다. ‘깡깡이’는 선박 표면에 묻어있는 녹이나 이물질을 털어내기 위해 사용되던 망치. 철선을 두드리면 ‘깡깡’ 소리가 난다고 붙여진 이 ‘강깡이’는 주로 여인네들이 도맡아 작업을 했는데, 이들을 ‘깡깡이 아지매’라고 불렀다. 이 ‘깡깡이 아지매’들은 늘그막에 거의 보청기를 착용하게 된단다. 심각한 난청 때문이다. 하루 종일 ‘깡깡이질’을 하고 나면, 집에 돌아와서도‘깡깡’대는 이명에 밤새 시달린다고.

 

‘깡깡이길’을 걷다보니 인근에는 크고 작은 조선소와 수리조선소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어마어마하게 큰 배들이 뭍에 올라와 있는데, 그 크기가 대부분 10~20층 건물 크기이다.

 

그 사이로 ‘우리조선’이 보인다. 이곳이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 최초로 발동기를 장착한 근대식 목선조선소인 ‘다나카 조선소(1887)’가 있던 자리다. 근대 조선산업 1번지, 대평동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곳이다. 우리조선소 옆으로는 ‘동아조선소’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다나카조선소에 이어 세워진 ‘나카무라조선소’가 있던 자리이다. ‘다나카조선소’와 ‘나카무라조선소’ 설립 이후 당시 대풍포 주위로는 크고 작은 조선소와 수리조선소가 60여 개가 들어선다.

 

흰여울마을은 도시재생을 통해 젊은 문화예술인들이 빈집을 이용해 다양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카페와 문화주점, 게스트하우스 등이 들어서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흰여울마을은 도시재생을 통해 젊은 문화예술인들이 빈집을 이용해 다양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카페와 문화주점, 게스트하우스 등이 들어서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전차종점비와 영도대교 건설 희생자 기리는 용신단


영도 남항시장 아래쪽 도로 부근에는 1991년 영도구에서 부산 전차 영도선 종점 터를 알리고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영도 전차 종점 기념비’가 있다. 1910년부터 1968년까지 부산 도심 전역을 달렸던 전차 노선 중 ‘영도선’은, 1935년 2월 ‘목도선(木島線)’으로 개통해 1968년 5월 20일까지 운행됐다. 당시 목도선은 부산부청(현재는 롯데백화점 광복점) 앞에서 영도대교를 지나 지금의 남항동 시장까지 운행됐다.

 

전차 종점에서 남항동 옛 수산진흥원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 부근에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용신당이 있다. 용신당은 영도대교 건설 당시 삶을 다한 이들의 원혼들을 달래고자 지었다. 영도대교가 개통된 후 영도대교 밑에서 밤마다 귀신 울음소리가 들려오기에, 마을 주민들이 용신당을 짓고 원혼들을 위해 고사를 크게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해안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영선동 방파제등대. 곧이어 남항대교 교각 밑을 지나니 절영산책로 입구에 닿는다. 절영산책로는 2001년 부산 영도의 영선동에서 동삼동까지의 해안길을 따라 조성된 3.2㎞ 구간의 아름다운 산책길. 해안의 기암괴석과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철썩이는 파도소리와 바닷바람을 맞으며 걸을 수 있는 수려한 길이기도 하다. 해안가로 제주도 출신 해녀들이 물질을 해 관광객들에게 제공하는 싱싱한 해산물을 직접 맛볼 수 있어 쉬엄쉬엄 여유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해안 언덕길에 자리한 ‘흰여울마을’ … 새 관광명소 인기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며 절영해안산책로를 걷다보면 멀리 언덕배기에 ‘흰여울마을’이 보인다. 가파른 언덕 골목길, 그 골목길로 고만고만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산비탈 아래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부산의 산토리니’라는 별칭도 붙었다.

 

흰여울마을은 6·25전쟁 당시 피란민촌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6·25전쟁 시절부터 바람과 싸우며 집을 짓고 살았던 마을사람들의 투쟁 같은 삶들이 벼랑의 길처럼 읽히는 곳. 원래는 송도해수욕장을 바라보고 있는 마을이라 ‘이송도’라고 했으나, 도심재생사업을 시행하면서 마을이름을 바꿨다.

 

‘흰여울’은 영도 봉래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마을 끝 절벽 아래로 떨어지며 해안가 파도와 함께 흰 포말을 낸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요즘은 도시재생사업으로 젊은 문화예술인들이 빈집을 이용해 다양한 창작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다양한 카페와 문화주점, 게스트하우스 등이 들어서 있기도 하다.

 

이곳은 송강호·김영애 주연의 ‘변호인’의 촬영장소로도 유명하다. 마을 골목길에는 극중 국밥집 주인 순애(김영애)의 집도 있고, 골목길의 흰 벽에는 “니 변호사 맞재? 변호사님아 니 내 쫌 도와도”, “이런 게 어딨어요? 이라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할께요! 변호인 하겠습니다”란 영화 속 명대사를 옮겨놓았다.

최원준 기사 입력 2018-04-30 부산이야기 5월호 통권 139호
자료출처 : 다이내믹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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