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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이황과 저의 관직을 바꿔 주십시오

길에서 청렴을 만나다 ⑥ 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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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
내용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겸손함

박순이 대제학으로 재직할 당시, 퇴계 이황이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박순은 임금에게 간곡하게 청했다.

“대제학과 제학이 비록 같은 비슷한 일을 하나 제학의 임무가 대제학보다 훨씬 가볍습니다. 나이 많고 학식 높은 선비는 아래의 임무에 있고 도리어 후진 초학이 중한 지위에 있으니, 저와 이황의 관직을 바꿔 주시옵소서.”

임금은 대신을 불러 모아 의논했고, 박순과 이황의 관직을 서로 바꾸게 했다. 결과적으로는 이황이 늙고 병들어서 그 직을 감당할 수 없다며 사퇴했으나 이 일화는 박순의 어진 성품을 잘 보여준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다른 이의 능력이 자신보다 낫다고 인정해 그 자리를 바꿔달라고 청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능력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겸손한 태도로 어려운 결단을 내린 박순의 행동이 오늘까지도 높게 평가받는 이유일 것이다.

국민권익위원회 청렴교육 자료.
박순은 간사한 벼슬아치를 물리치고 어진 신하를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일에 힘을 쏟았다.

목숨 걸고 외척간신을 탄핵하는 용기

박순이 홍문관에 있을 때의 일이다. 윤원형과 모의해 을사사화를 일으킨 주역인 임백령의 시호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시호란 왕이나 사대부들이 죽은 뒤에 그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하는 호(號)이다.

모두들 이 일을 지연시키려고 했다. 임백령을 찬양하자니 수치스러운 일이요 깎아내리자니 화를 부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또한 임금의 외숙이자 간신인 윤원형의 위세를 겁냈다.

아니나 다를까. 화가 난 윤원형이 박순의 죄를 다스리자고 임금께 아뢰었다. 다른 신하들이 간청해 박순은 벼슬만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화가 일어났다는 말을 들은 박순은 의금부에 가서 처분을 기다리려고 옷을 갈아입고 태연한 기색으로 나왔다. 가족들은 그에게 변고가 생겼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린 딸이 달려 나와 맞는 것을 보고 그가 손을 잡고 웃으면서, “하마터면 다시 너를 못 볼 뻔했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박순이 대사간일 때 일이다. 박순은 윤원형과 이량 등의 만행에 분개해 마음이 북받쳤다. 박순은 곧바로 대사헌 이탁을 찾아가 말했다.

“내가 윤원형의 죄를 논하려고 하는데 그대가 찬성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이탁은 몸을 움츠리면서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대가 내 일족을 멸문시킬 작정인가.”

하지만 박순은 끈질기게 이탁을 설득했고, 결국 둘은 함께 윤원형을 탄핵해 쫓아냈다. 이에 사림의 공론이 비로소 펼쳐지게 되어 조정이 맑고 깨끗해졌다. 이 일 이후 박순은 용기 있고 올바른 사람의 으뜸이 되었다.

박순은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시에 특히 능했다.

가난한 이에게 기부하며 청렴 실천

박순은 중종 18년(1523)에 태어나 18세에 진사가 되었고, 31세가 되던 해인 명종 8년(1553)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대사헌, 대제학,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선조 5년(1572)에는 영의정에 올라 약 15년간 재직했다.

그는 일찍이 서경덕에게 학문을 배워서 성리학에 두루 통달했다. 특히 ‘주역’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시에 특히 능했다.

중년의 나이에 이황을 스승으로 모셨다. 만년에는 이이, 성혼과 깊은 교분을 맺어 주변 사람들이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다”라고 할 정도였다.

박순은 40년 가까운 벼슬살이에 15년간 정승 생활을 했다. 그러나 모든 녹봉은 가난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기부해 가진 것 하나 없이 청렴결백했다고 한다. 자신은 숨기고 조금이라도 잘하는 선비나 학자는 추천해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를 두고 당대 사람들은 “그보다 더 선비를 좋아하고 재주를 아끼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는 간사한 벼슬아치를 물리치고 어진 신하를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일에 힘썼다. 국가의 안위를 염려해 바른 말과 곧은 마음으로 임금을 섬겼기에 그만큼 명쾌한 정승이 없었다고 사람들은 전한다.

선조 때 박순이 지은 시 ‘제이양정벽’과 선조가 8자로 써서 하교한 글을 새긴 바위가 있다.

 

작성자
김정희
작성일자
2012-07-03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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