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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통통권 125호 부산이야기호 기획연재

4대째 전통춤 맥 이어가는 ‘부산대표 모녀 춤꾼’

김온경 … 70년 춤과 함께 한 인생, 동래고무 예능보유자 윤여숙 … 궁중무용부터 동래학춤까지 섭렵한 부산무용협회장

내용

부산은 문화도시인가? 문화적인 전통이 있는 도시인가? 선뜻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이다. 외지인도 그렇고 부산 토박이도 그렇다. 서울의 궁중 문화, 내륙의 양반문화가 워낙에 도도한 까닭이다. 그러나 부산은 분명히 문화도시이고 문화적인 전통이 있는 도시이다. 오히려 부산의 문화는 조선왕조 500 도읍지 서울의 문화보다 앞선다. 대표적인 국보급 고려가요인정과정곡이다. 고려가요 가운데 유일하게 지은이가 알려진 정과정곡의 산실이 부산이다.
 

부산문화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있다. 춤이다. ‘경상도는 , 전라도는 소리 정설이듯 부산 춤의 뿌리는 굵고 길다. 지역에 하나 전승되기도 힘든 야류가 둘이나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동래야류와 수영야류다. 뿐인가. 동래 한량춤, 동래학춤, 동래고무(鼓舞) 등은 부산의 춤이 얼마나 화사하고 역동적인지 보여준다. 부산의 춤은 부산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며 부산문화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아이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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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고무 예능보유자 김온경 선생은 70년을 춤과 함께한 부산의 원로 춤꾼이다(김온경 선생의 동래입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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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온경 선생의 강태홍류산조춤.


어머니와 함께한국 총론출간 

한국 춤의 모든 것을 모은 책입니다.” 

한국 무용학계 금자탑이 역저가 작년 연말 나왔다. ‘한국 총론이다. 우리 춤의 역사와 갈래를 집약한 460 방대한 전문서적이다. 춤을 분야별로 소개한 책은 많아도 저자가 언급하듯 모든 갈래를 모은 책은 드물었다는 점에서 반향이 컸다. 더구나 저자가 부산 춤꾼이라서 부산 춤의 저력을 다시금 각인할 있었다. 저자는 2, 공저다. 사람 모두 자타가 공인하는 춤꾼. 무엇보다어머니와 이다

김온경(80) 윤여숙(54). 우리 나이로 여든인 어머니와 중반인 딸은 부산 춤의 과거이면서 현재이고 미래다. 그들이 있었기에 묻힐 뻔한 부산 춤이 드러났고, 멈출 뻔한 부산 춤이 이어진다. 찾아오지 말라며 손사래 치던 동래권번(1910 동래부 관기 출신의 기생들이 조직한 단체) 마지막 기녀 김해월, 석국향을 문턱 반질반질하도록 찾아다녀 마침내 전수하고 복원한 동래 기녀의 , ‘동래고무였다. 신분 노출을 꺼리던 그들에게우리 것을 남겨야 한다 설득해 성사시켰다. 동래고무 이전에 문장원 선생에게서 사사한 동래야류의 문둥탈춤과 동래학춤도 어머니와 딸을 통해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다. 평생 대학 강단에서 그리고 현장에서 부산 , 한국 춤의 지평을 넓혀 어머니와 딸이었다

 

김온경 선생, 아버지 영향 70 인생 시작

아버지 영향이 컸어요.” 

한강 이남에서 무용학과가 가장 먼저 생긴 신라대에서 춤을 가르쳤던 김온경 선생의 인연은 70. 어릴 때부터 춤과 살았다. 아버지가 워낙에 춤을 사랑했다. 집안이 부유해 내로라하는 명창과 명무를 집에 초청, 한마당을 펼쳤다.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집에 드나들던 가야금산조 명인 강태홍에게서 춤과 가야금, 장구를 배우기도 했다. 만석꾼 출신 법학도인 아버지는 그러면서 예인이 됐다. 바로 추강 김동민 선생. 일반인은 몰라도 부산 춤판 앞자리를 차지하는 분이다. 부산 민속무용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동래야류와 수영야류, 통영오광대가 그를 거치면서 체계화됐다

민속무용연구소 추강 선생이 1950 서구 토성동에 세운 부산 최초의 국악 교육장이다. 토성중학교 뒤에 있었다. 한국 최초로민속무용이라는 용어를 분이 아버지라고 김온경 선생은 자부한다.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경무대가 옮겨올 만큼 당시 토성동 일대는 한국의 중심지였다. 한국의 중심지에서 강태홍과 함께 국악을 전승했고 여기서 배운 제자들은 한국 무용계를 떠받치는 대들보가 됐다. 지금은 원로 무용가가 김매자, 이영희, 심지영, 양정화 선생 등이 그들이다. 열한 살부터 춤을 익힌 김온경도 여기서 춤을 배워 강태홍과 아버지를 스승으로 받든다.   

 

강요 싫어 결혼결국 다시 춤판으로 

김온경 선생의 인생에는 굴곡도 있었다. 사춘기가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춤을 강요하는 아버지마저 싫어졌다. 진저리가 났다. 아버지는 열정이 지나쳤던 나머지 2 3 자녀에게 춤과 국악 배우기를 강요하다시피 했다. 훗날 검찰총장이 장남은 한사코 거부했고 장녀 김온경이 고스란히 떠안았으니 짐이 얼마나 버거웠을 것인가.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부산 남성여고 졸업 대학은 서울로 갔고 전공도 국문학을 택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했고 1 2 키우는 전념하며 10년을 보냈다

그런데 몸이 아팠다. 폐결핵을 앓았다. 뒤에 병명이 판명 났지만 위암도 걸렸고 의욕을 잃었다. 부산에 내려왔다. 희한하게도 춤을 추자 병이 나았고 마음이 나았다. 본격적으로 춤을 췄다. 아버지는 흔쾌히 지원했다. 뒤늦게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무용학을 전공했으며 1979년부터 신라대에서 춤을 가르쳤다

1985 동래고무에 입문해 1994 동래고무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동래고무는 부산시 무형문화재 10호다. 사단법인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 이사장, 부산무형문화재연합회 초대 이사장, 부산무용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박순희, 전정숙, 장인숙, 윤여숙, 문임선, 강성희, 김순애, 김정애, 박선홍, 김무희 등이 제자다. 우울증 걸려 타계한 김정숙은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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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김온경의 뒤를 이어 춤꾼이 윤여숙은 지난 2 부산무용협회장에 당선됐다(사진은 윤여숙의 강태홍류산조춤).


 

윤여숙, 어머니 이어 전통춤 두루 섭렵

김온경 선생이 스승이에요.” 

어머니가 춤에서 멀어졌다가 돌아왔다면 윤여숙은 처음부터 춤이 좋았다. 무렵 어머니가 토성동에 차린 홍익민속예술학원에 스스로 들어가 인생을 시작했다. 대학 전공도 스스로 택했다. 어머니나 할아버지가 권하지 않았는데도 무용학과로 진학했다. 잘할 있는 무용뿐이라서 그랬다

어머니가 스승이라서 사석이 아니면어머니대신김온경 선생으로 부른다. 공과 사를 구분하는 그런 엄격함이 춤에도 배어 윤여숙의 춤은 부드러우면서도 절제미가 뛰어나다는 평가다. 춤은 삶의 긍정이라고 했다. 삶을 긍정하고 절망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힘이 춤이다. 윤여숙의 춤은 절제하고 절제하면서 삶의 진수에 다가간다.  

할아버지 김동민 선생도 윤여숙의 스승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지만 가끔은 할아버지로부터 춤사위를 배웠다. 할아버지는 시작하면 시간이고 시간이고 같은 동작을 반복해서 시켰다. 어린 마음에 너무너무 힘들었지만 춤꾼으로 성장하는 데는 힘이 됐다. 어머니가 서울에 공부하러 오가던 무렵은 이매방 선생 부인 김명자 선생에게 사사했다. 그래서 윤여숙 춤은 품이 너르다. 동래고무, 동래학춤, 동래입춤, 문둥탈춤, 살풀이춤, 산조춤, 승무, 태평무, 태극무 등등 전통춤을 두루두루 섭렵했다

같으면서 다릅니다.” 어머니와 , 스승과 제자 사이라서 윤여숙 춤은 여러모로 김온경 춤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면서 다르게 나아간다. 우리 춤의 전통적인 부분과 정신, 모양에서 같다면 윤여숙은 거기에 현대적이고 창조적인 면을 덧붙인다. 어머니 춤에 변화를 가미해 발전을 도모하는 바람이다. 어머니가 일가를 이룬 각종 전통춤, 예컨대 동래고무나 강태홍류 산조춤, 문둥탈춤, 동래권번에서 추던 입춤 등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해 세상에 내놓고 싶다. 입춤은 춤의 기본이 되는 춤이다

 

윤여숙, 봉생문화상 수상부산무용협회장

윤여숙 선생은 올해 일복이 터졌다. 지난 2 부산무용협회 회장에 당선됐다. 임기는 4. 부산 무용계를 바라보는 기대가 크다. 절제미의 춤꾼답게 야무진 4년을 기대한다. 작년에는 공연예술부문 봉생문화상을 받았다. 전국국악대전에서 무용부문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부산예술대 교수와 학과장을 지냈다.    

강하만고류(江河萬古流). 강은 천년만년 흐른다. 김온경 선생 집안의 맥도 강하만고류다. 할아버지에서 시작한 춤은 딸을 거쳐 손녀를 거쳐 증손녀까지 4대째 이어진다. 윤여숙 선생의 곽미소 또한 한국춤을 전공한다. 초등학교 들어가더니 스스로 무용부에 들어갔다. ·고교 시절 상도 제법 받았다. 부산예고를 나와 올해 부산대 무용학과에 진학했다. 중학교 들어가서부터 디딤 같은 무용 기초를 어머니에게 배웠으니 윤여숙의 제자이기도 하다.     

4대전.’ 가업을 3 잇기도 쉽지 않은데 4대째 이어가는 명가. 모두 열린 4대전 자체가 경이였다. 처음은 1994 부산문화회관에서 열렸고 다음은 2011 국립부산국악원에서 열렸다. 김동민 선생 살아생전 춤추는 장면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열린 4대전은 할아버지와 , 손녀, 조카 김율희가 무대에 올랐다. 김동민 선생 타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번째 4대전은 할아버지 영상, , 손녀, 증손녀가 무대에 올랐다. 혈육의 핏줄이 면면히 이어졌고 춤의 핏줄이 면면히 이어졌다. 가히 강하만고류다

김온경 선생과 윤여숙 선생 공저는 있다. 2010 펴낸부산 100년사. 춤도 같이 추고 책도 같이 내었기에 물었다. 춤이 어려운지 글이 어려운지. 딸이 대답했다. 춤이 어렵다고. 글은 고칠 수가 있지만 춤은 추고 나면 고칠 수가 없다. 그래서 동작 동작 완벽해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 물었다. 춤에 완성이 있느냐고. 어머니가 대답했다. 없다고. 어떤 지극한 경지에 이르러야 완성이라고 있을 텐데 어느 경지에 있는지조차 모르니 완성은 요원하다는 자탄이었다. 팔십 평생 외길을 걸어온우리 시대 춤꾼자탄에 고개 숙였다. 완성을 이룬 명인과 명인을 닮아 가는 딸이 앞에 있었다

작성자
동길산
작성일자
2017-02-27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통통권 125호 부산이야기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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