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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기장사발 재현하는 ‘부산요’ 젊은 장인

부산시 지정 무형문화재… 전국 최연소 예·기능보유자
Busan People / Great! 부산 / 김영길 사기장

내용

모처럼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주말, 김영길 사기장을 찾아 기장으로 갔다. 온 산과 들이 봄기운으로 넘쳐났다. 길섶 벚꽃들이 벌써 꽃잎을 흩날리고 먼 산엔 아지랑이가 너울거린다. 일광면 원리, 울산 간 국도 좌천삼거리 못 미쳐 좌측 길섶에 있는 '부산요'(釜山窯·옛 상주요)의 주인 김영길은 증조부 김상희로부터 조부 김종규, 종조부 김종선, 부친 김윤태, 김영길 4대로 이어오는 문경산 도공 후예이다.

어려서부터 배운 전통 제작방법 고수

김영길이 성형실에서 사발(다완)을 빚기 시작한다. 흙 밟기와 숙성이 끝난 흙을 한 번 더 꼬박 밀기한 태토를 물레에 얹는다. 제 키높이의 배꼽선에 맞춤 제작한 전통 사발 발 물레에 엉덩이 걸친 자세로 양쪽 발로 물레를 돌린다. 김영길은 힘이 배로 드는 전통 공정을 애써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양손에 힘을 모아 흙을 감아 올려서 사발형태를 잡아간다. 시선을 오로지 태토에 붙박고 발 물레의 속도를 조절해 전(그릇의 가장자리)을 잡는다. 이윽고 완성된 사발을 태토에서 떼어 선반 위에 얹는다. 잠깐 순간에 사발 한 개가 성형된 것이다.  

조선시대 도공은 세습됐다. 특히 관요(官窯, 조선 때 관가에서 경영하던 사기점)의 사기장에 대한 '경국대전'의 기록에도 '사옹원(司饔院·조선조 왕실용 사기번조를 관장하던 곳) 사기장의 자손은 다른 일을 할 수 없고 오직 그 업을 전승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관습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유지돼 대체로 오늘날에도 그런 풍습이 남아 있는 것이다. 사실 어릴 적부터 도자 일을 습득한 사람이 훗날 다른 일에 종사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도공들은 한 곳에 뿌리를 틀고 사는 경우보다 땔나무와 질 좋은 흙을 따라 이동하면서 도자업을 하는 경우가 많아, 단지 그 일들을 얼마나 오래 계속하였는지에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김영길이 태토를 채취해 고무통에 흙을 가라 앉혀 물을 빼고 천을 깔아 햇볕에 자연 건조시키는 수비(水飛)과정을 거쳐 흙 밟기 작업하고 태토를 숙성시키는 까다롭고 어려운 과정을 애써 선택한 것도 어릴 때부터 부친을 도우면서 익혀왔던 전통 제작방법을 고수하기 위함이다.

"아이고 그래도 지금은 상주와 교리가마 시절보다는 낫지예."

김영길 사기장은 지난 3월 부산시 무형문화재 사기장 기능보유자로 지정 받았다. 예·기능보유자로서는 전국에서 최연소다(사진은 직접 만든 도예작품을 보여주고 있는 김영길 사기장).

어머니 위해 공무원 되려 했지만 다시 도예로

사기장 김영길은 1966년 증조부가 가마터로 자리 잡은 경북 문경 동로면 적성리 갈밭골에서 태어났다. 예부터 관요를 비롯한 도자기 역사가 깊은 도자기골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경영하는 단양 방곡요에서 자란다. 초등 1학년 때 다시 상주 함창으로 이사온다. 아버지는 이곳에 가마를 틀고 '상주요'라 명명했다. 전통적인 방법에 의해 태토를 얻고 흙을 빚으며 불을 때는 일들은 이때 벌써 익숙한 일이 돼 있었다. 다완(茶碗·사발)에 물꼭지 붙이고 다듬는 일은 다반사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기장으로 이사온다. 교리 279번지 지금의 기장체육관 앞에 '상주요'를 설치한 것이다. 이때부터 가마에 불 때는 일을 본격적으로 배운다. 장작도 패고 허드렛일 하면서 아버지를 도와 가마에 장작 넣고 부친은 불보는 일에만 전념했다.

1976년부터의 기장 교리 시절은 아버지를 도와 가내수공업으로 도자기를 굽어내던 때였다. 기장중·고를 졸업하고 일본 동부지방의 센다이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했다. 어릴 때부터 일속에 파묻혀 살아온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공의 딸로 태어나서 또 도공에게 시집와 흙먼지 마시며 막일꾼같이 고생고생하면서 자식들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 싶었다. 이 일더미 속을 벗어나 양복입고 넥타이 맨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공무원 시험의 좋은 조건으로는 컴퓨터 전공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컴퓨터 전공은 낯설고 생리에 맞지 않았다. 도예공부를 해야 했다. 1년 6개월 후 사가현 아이타(有田)요업대학에 재입학했다. 도자기 만드는 공정 공부를 하면서 흙 성분을 분석하는 공부와 흙 만들고 유약 만드는 재료학 공부를 했다. 아버지와 함께 산에서 애써 찾아온 흙이 분석이 되지 않아 애를 태웠던 일들이 떠오르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도 재료학 공부가 절실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모든 측정을 바가지(아버지 혼자만 사용하는)로만 하는 비과학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싫었다. 일부러 고기 잡으러 간다면서 바가지 가지고 나가서 버리고 오거나 깨뜨리기도 했었다. 나중에야 아버지가 유용하게 쓰던 그 바가지야말로 가장 적절한 측정기기였음을 깨닫게 됐지만.

졸업 후 대학의 요업기술센터에서 연구를 계속하면서 '상주요'에서 사용하는 흙을 가져가 분석을 했다. 일본 땅은 도자기 만들 흙으로는 부적격이어서 주로 하동흙과 산청흙을 전량 수입해 정제해 썼다. 도자기 제작용은 물론이고 요업재료로, 화장품재료로, 종이재료로 쓰고 반도체(전자제품, 우주선)에도 넓게 쓰였다. 복사가 잘 되는 종이를 태우면 남는 것은 흙이다. 종이에 양질의 흰색 흙을 재료로 쓰므로 복사는 물론 코팅도 잘 됐다. 1996년 귀국해 아버지를 도우면서 일본에서 배운 전공을 살려 생활자기를 만들었다. 27살 때였다. 손쉽게 구입해 쓸 수 있으면서 전통공예를 살린 생활자기는 날개 돋치듯 팔려나갔다. "일본에서 공부한다더니만 일본 그릇 만들고 있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라도 좋았다. 무릇 그릇이란 음식을 담았을 때 그 가치를 가름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선반 위에 모셔놓은 그릇은 더 이상 그릇이 아닌, 그릇으로서의 가치를 잃고 있다는 말이다.

유약을 사용하지 않고 짚을 도자기에 올려 문양을 낸 뱀가마 무유도자기.

아버지 말씀에 기장흙 연구 … 기장 사발 재현

김영길은 아버지(김윤태)의 요강 그림을 잊지 못한다. 아버지의 붓 쥔 손이 지나가면 난이 되고 목단이 되고 나비가 됐다. 특히 목단을 잘 그렸다. 겨울이 춥던 때 집집마다 요강을 몇 개씩 준비하던 시절, 요강에 그려진 그림(문경요강)은 단연 인기 최고였다. 지금이야 요강 살 일이 없어졌지만 하찮은 요강에 그림 그려 넣는 아버지의 손길에서 장인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남들이 하찮다고 생각하는 작은 일에서부터 출발하리라. 도예공의 아들로서 부끄러움이 없게 하리라" 다짐했다.

마침 기장군으로부터 옛 가마터(기장군에는 600년 되는 가마터가 상당수 발굴됐다)에 기장군 도예촌을 조성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그 타당성 연구를 위촉받기에 이른다. 출강하는 동부산대학에 도예연구소를 두고 남창에다 작업실을 마련했다. 4년 동안 엎드려 기장가마터에서 채취해온 태토를 분석하고 연구했다.

평소 산청·문경·하동 흙들을 가져와서 작업을 많이 해 본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너는 이곳 기장의 흙으로 도자기를 빚어야 한다"는 참 뜻을 이제야 깨닫게 됐다. 애써 기장의 옛 가마터 주위에 가마를 설치한 것도 기장흙이 태토로서 유약으로서 가장 좋은 것임을 안 때문임도 알았다. 아버지의 이 한 마디가 연구주제가 된 것이다. 그 실험단계를 아들인 김영길이 연구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가슴 뿌듯해졌다.

올해 3월 부산시 무형문화재 사기장 기능보유자 지정

1996년부터 12년 간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비탈가마(등요) 소성실험 시편을 만들었다. '부산요'에서 유약실험한 시편도 만들었다. 분석을 마친 기장흙이 180개의 병에 담겨 성형실 선반 위에 나란히 얹혀 있다. 이러한 옛 기법들은 부친 김윤태의 지도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대학에서 현대적인 방법으로 연구 분석할 수 있었지만 부친의 옛 작업을 통해서 얻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연구하였기에 다른 무엇보다 값진 연구 성과였다. 연구한 자료들은 기장도자기촌의 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할 것이며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기장도자기를 재현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2005년 기장 교리의 '상주요'는 일광 원리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부산요'시대를 연다. 1997년 귀국한 이듬해에 타고난 도공의 아내였던 어머니도 운명을 달리했으며, 2012년에는 스승이며 멘토였던 아버지(김윤태)도 별세했다. 그간 흙과 유약을 찾는 방법과 도자기 흙을 만드는 방법, 물레 돌리는 방법 등 전통적인 옛 방법을 아버지로부터 계승했다. 특히 가마(비탈) 만들고 불 때는 방법은 옛날 관요에서 불 지피던 장인이 집안으로 흘러와 계승돼 온 방법이기에 김영길만의 지니고 있는 장기이며 '부산요'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부산요'는 4대에 이르면서 백자를 재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요임을 자부한다. 지난해 3월부터 올해 3월까지 꼬박 1년 동안 부산시 문화재위원으로부터 '사기장' 실사를 받은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였다. 드디어 지난 3월 25일 부산시 무형문화재 사기장 기능보유자로 지정 받았다. 예·기능보유자로서는 전국에서 최연소란다.

자신만의 도예의 길 개척

사기장 김영길은 성형한 사발굽을 깎고 850℃로 초벌구이해 재벌구이할 때도, 초벌과정에서 유약 시유해 가마에 바로 굽는 '막구이(1250℃)작업'을 선호한다. 옛 도자파편을 연구해 흙과 요를 찾고 옛날에 어떤 방법으로 만들었는지를 그대로 재현하면서 터득한 기법이다. 물레를 어떤 방향으로 돌렸는지 유약은 어떤 손으로 처리했는지도 연구해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생전 부친이 간곡하게 당부하던 것이기도 했기에 유지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도예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흙먼지 뒤집어쓰고 도자 일에 파묻혀 주변 애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자라다가, 잠깐 딴 눈을 팔지만 핏속을 흐르고 있는 도예공의 피를 어쩌지 못해 다시 들어선 도예가의 길. 새삼스레 아버지의 길을 가면서 다시 발견되는 아버지 김윤태의 자취에 감흥된다. 기장사발을 재현해 기장브랜드로 만드는 일이야말로 '부산요'의 꿈이 아니던가. 수천 년 전 이어왔던 '뱀가마'의 유약원류도 찾아야 했다. 토기에서 도기로 넘어오는 과정에서의 번들거리던 유약 말이다.

6월 중순이면 그간 성형한 사발(茶碗) 800개에 불을 지필 것이다. 그리고 '부산요'의 특징이 묻어나는 도자기의 출현을 기다려볼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도예가의 길이지만 인내와 노력으로 끈기 있게 사기장 김영길만의 도예길을 개척할 것이다.

작성자
주경업 부산민학회장
작성일자
2015-05-12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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