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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거대한 붉은 바위산 깎아 만든 고대 도시

세계테마여행 / 요르단 페트라
거대한 붉은 바위산 깎아 만든 고대 도시
나바트인 1,500년 전 세운 대제국 흔적
세계 7대 불가사의 … 영화 인디아나 존스·드라마 '미생' 촬영지

내용
페트라 전경

페트라는 아라비아반도 서북쪽에 위치한 작은 나라인 요르단의 남서쪽 깊은 계곡 속에 있다. 페트라는 6세기 지진으로 인해 모래 속으로 사라졌고 이후 수많은 이야기와 전설을 간직한 채 이야기 속에 전해 내려오던 은둔의 땅이었다. 이 지역에 거주하던 베드윈(유목민)들 사이에 전해오던 전설 속 도시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낸 사람은 스위스 탐험가인 요한 부르크하르크(Johann Ludwig Burckhardt)였다. 베드윈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직접 발굴 작업에 나선 이 탐험가는 1812년 파라오의 무덤, 오벨리스크, 그리스, 로마와 페르시아의 건축 양식 등 고대 지중해와 중근동 문명의 모습을 한 몸에 안고 있는 이 고대 도시를 세상에 알렸다.

페트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붉은 색을 띤 바위로 된 거대한 고대 도시다. 페트라 전체는 거대한 사암과 석회암으로 구성된 도시이기에 대부분의 구조물은 건축된 것이 아니라 조각된 것이다(사진은 페트라 내부 모습).

이 고대 도시는 고고학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붉은색의 사암과 석회석으로 구성된 도시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당대의 영국 시인 존 버건(John William Burgon)은 페트라를 방문한 후 그 아름다움에 매혹돼 이 도시를 '붉은 장미의 도시'로 묘사하기도 했다.

1985년 세계 문화유산 지정 … 영화·드라마 배경

유네스코(UNESCO)는 페트라를 '인류의 가장 진귀한 문화 유산' 중의 한 곳으로 묘사하며 198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고, 문화와 유적 분야의 저명 잡지인 스미스소니언(Smithsonian)은 페트라를 '죽기 전에 가보아야 할 28곳' 중의 한 곳으로 지정했다. 2013년에는 세계의 불가사의로 지정됨으로써 더욱 세계인의 주목과 관심을 끌고 있는 지역이 페트라이기도 하다. 그 유명세 탓에 페트라는 전 세계에서 입장료가 가장 비싼 유적지(1일, 8만원~140만원)중의 한 곳이기도 하다.

페트라는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던 영화 '인디아나 존스', '트랜스 포머2'와 최근의 국내 드라마 '미생'에 등장함으로써 한국인에게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이집트에서 출발해 이스라엘에 이르는 기독교 성지 순례의 순방 코스로 더욱 친숙한 유적지다.

페트라 입구의 오벨리스크 형식 혈거 무덤.

페트라(라틴어의 petrae(바위)가 어원)는 그 지명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붉은 색을 띤 바위로 된 거대한 고대 도시다. 그러나 페트라 인근 지역은 겨울에는 비와 눈이 비교적 풍부하게 내려 농경이 가능한 경작지역이기도 하다. 때문에 아라비아 반도의 전통적인 생태 환경인 유목 환경과 함께 농경이 가능한 지역이다. 중동하면 떠오르는 메마르고 거친 사막 지역이라는 우리의 고정 관념을 바꾸어 주는 곳이 페트라이기도 하다. 페트라는 홍해의 아카바에서 시작해서 다마스쿠스로 이어지는 고대의 주요 무역로였던 '왕의 길(king's road)'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중계 무역에 적합한 입지를 갖고 있었다.

아랍계 유목민인 나바트인들은 기원전 6세기경부터 이 지역에 거주하며 중계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획득했고 이 부를 바탕으로 한때 북쪽으로 현재의 다마스쿠스와 동쪽의 사우디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할 만큼 북서 아라비아반도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특히, 향료와 유향의 제조 기술을 일찍부터 발견해 중근동 및 지중해지역과 교역함으로써 엄청난 부를 축척했고 이는 부유한 나바트 제국의 기틀이 되기도 했다.

페트라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시크(Siq, 바람골짜기, 협곡)는 길이 1.2km, 높이 80∼100m, 폭이 3∼5m에 이르는 긴 협곡이다.

페트라 정착 나바트인 기술·문화 발전… 막강한 영향력

이러한 지리적, 생태적 환경에 힘입어 토착민이라 할 수 있는 나바트인들은 정착 생활을 위한 기술과 문화를 발달시켰다. 물을 운반하고 저장할 수 있는 수로와 댐 등의 관개 시설을 개발했고, 이 흔적은 지금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사용되던 나바트 문자가 아랍어 문자의 기원이 되었음은 학계에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구약성경의 출애굽기에도 페트라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하나님의 명에 따라 가나안 땅을 찾아 출애굽한 모세가 홍해를 건너 황야를 헤매다 페트라를 지나게 됐다. 이때 목이 말라 쓰러져 가는 유대 백성들을 위해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하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한 지역을 가리키며 지팡이로 땅을 내려 치라고 했다. 모세가 지팡이로 땅을 내려치자 그 곳에서 물이 나와 그 물로 유대 백성들의 기갈을 해소했다는 전설을 담고 있는 모세의 우물이 지금도 페트라 입구에 남아 있다. 또한 모세를 도와 출애굽을 이끌었던 모세의 형이자 대제사장인 아론(Aron)이 생을 마친 곳이 페트라이며 그의 무덤이 이곳 하룬(Harun)산 정상에 안치돼 있다.

페트라의 이러한 생태적 환경은 중근동과 지중해 지역 패권 국가들의 관심을 끌게 됐다. 수차례에 걸친 로마의 침략을 나바트인들은 페트라 특유의 지형을 이용해 물리쳤지만 결국 로마에 점령당했고 이후 페르시아와 비잔틴과 아랍인이 지역을 지배했다. 이러한 지중해와 중근동의 여러 제국이 페트라를 지배한 흔적과 그들의 문화는 페트라의 각종 건축물과 유적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페트라에서 볼 수 있는 붉은 바위산. 원숭이 얼굴을 닮아 ‘원숭이 바위’라고 한다.

협곡 사이 위치 … 자급자족 기능 갖춘 천연 요새

페트라의 출입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마치 1천500여년 전으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을 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출입문을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자갈길과 주변의 풍광은 5세기 경 페트라의 민낯인 것 같다. 뙤약볕 아래를 얼마 걷지 않아 이집트에서 볼 수 있는 오벨리스크 형상의 구조물과 방치된 혈거식 구조물들이 숱하게 발견된다. 이 동굴들은 기본적으로 나바트의 왕들을 포함한 귀족과 평민들의 무덤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 거주하기도 한다. 산자와 죽은 자를 격리시키는 동양적 관점과 달리, 산자와 죽은 자가 함께 생활하는 중근동식 삶의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페트라는 그 자체가 경제적 자급자족 기능을 갖추고 있었고, 군사적으로 천연 요새 기능을 갖춘 완전한 도시였다. 현재 페트라의 입구에 해당하는 시크(sikh)에는 페트라의 내부로 연결돼 있는 수로가 있다. 이 수로는 우기에 해당하는 겨울에 내린 비를 페트라 내부로 연결하는 일종의 송수관 역할을 했고, 수로를 통해 공급된 물을 비축할 수 있는 댐도 페트라 내부에 있다.

페트라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시크(Siq, 바람골짜기, 협곡)는 길이 1.2km, 높이 80∼100m, 폭이 3∼5m에 이르는 긴 협곡이다. 이 협곡은 그 자체가 군사적으로 천연의 방어 기지여서, 나바트인들이 그 당시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였던 로마의 군대를 수차례나 물리 칠 수 있었던 가장 큰 방어막이 되기도 했다. 현지의 베드윈의 이야기에 의하면 수차례의 실패 끝에 마침내 페트라를 점령한 로마 군대가 분풀이를 하기 위해 100m에 달하는 시크위에서 나바트인들을 떨어트려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나바트에서 로마까지 다양한 건축양식 조화이룬 예술작품

페트라 전체는 거대한 사암과 석회암으로 구성된 도시이기에 대부분의 구조물은 건축된 것이 아니라 조각된 것이다. 특히, 페트라의 대표적 조각물인 '카즈나(al-Khajnah·창고)'는 높이가 43m, 너비가 30m에 달하는 거대한 구조물이지만, 건축물이 아닌 조각물이다. 카즈나는 단순하고 투박한 나바트인 고유의 건축양식으로 시작해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건축양식을 거쳐 후기의 세련되고 건축미가 넘치는 그리스, 로마식 건축에 이르기까지 주변 국가들의 문화적·예술적 성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중해의 혼종 예술 작품이다.

페트라의 대표적 조각물인 ‘카즈나(al-Khajnah·창고)’는 높이가 43m, 너비가 30m에 달하는 거대한 구조물이다. 카즈나는 단순하고 투박한 나바트인 고유의 건축양식으로 시작해서 세련되고 건축미가 넘치는 그리스, 로마식 건축에 이르기까지 주변 국가들의 문화적·예술적 성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중해의 혼종 예술 작품이다.

오스만 투르크가 이 지역을 차지했을 때 화려하게 조각된 카즈나의 외양을 보고 보물 창고로 오해해 문을 열기 위해 입구에 총을 발사했다. 그 결과 지금도 카즈나의 전면에 당시의 총알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이 지역의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다.

모래가 뭉쳐 만들어진 사암이 만들어내는 무늬.

카즈나를 왼쪽에 두고 계속 걸어가면 큰 광장에 마주치게 되는데 광장에는 로마 점령의 표식인 원형 극장과 열주 거리가 있다. 원형 극장의 규모가 2천500~3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라 하니 페트라가 나바트인들의 수도였을 당시 이 도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열주 거리와 나바트 박물관을 지나면 다시 등산길이 시작되고 그 끝에 카즈나와 비슷한 형식의 구조물인 데이르(al-Dayr, 수도원)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구조물 역시 나바트왕의 무덤으로 만들어 졌지만, 그 모양이 지극히 아름다워 나중에는 비잔틴의 교회로 사용되기도 했다.

페트라의 광장에는 로마 점령의 표식인 원형 극장과 열주 거리가 있다. 원형 극장은 2천500~3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하룬산 정상에서 바라본 페트라 전경 환상적

시크에서 시작해 데이르에 이르는 이 길이 관광객이 찾는 일반적인 페트라 탐방 코스다. 이 일정은 페트라의 대표적 구조물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분명히 있지만, 페트라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서는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 페트라의 진면목을 보고 싶다면 다른 코스를 추천한다.

카즈나를 지나 100m 정도가면 차를 마실 수 있는 휴게소가 있고, 이 휴게소 뒤편에 좁은 등산로가 있다.이 길은 모세의 형인 아롬의 무덤이 있는 하룬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다소간 험난한 길이지만, 하룬산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페트라의 전경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하룬산 정산에서 연결된 능선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페트라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영국 시인 존 버건이 왜 페트라를 '붉은 장미의 도시'로 묘사했는지 이곳에서 비로소 알 수 있다.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창조적 예술품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산을 오르는 노고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될 것이다. 해질 무렵에 멀리서 감상하는 페트라의 모습은 페트라가 방문자에게 선물하는 또 하나의 배려인 것 같다.

페트라의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베드윈들의 삶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도무지 바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관광객을 호객하거나 그늘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는 그들의 행색은 남루하지만, 표정은 남루하지 않다. 나바트 유물이라며 오래된 동전을 사라고 호객하는 어린 소녀의 표정은 수줍고 눈망울은 맑기만 하다.

페트라 곳곳에서 이 지역에 거주하는 베드윈들을 만날 수 있다(사진은 기념품을 파는 소녀).

지구에서 가장 빠른 발걸음을 자랑(?)하고 늘 '바쁘다'를 외치고 다니는 우리의 사는 모습이 '과연 저들보다 행복할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든다. 질문의 답에는 자신이 없다. 어쩌면 우리는 작은 물질적 부에 도취돼 삶의 진정한 행복과 의미를 상실하고 있지는 않나? 어쩌면 이런 메마른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페트라의 출입문을 지나 21세기로 돌아와 있다.

작성자
글·사진 윤용수 부산외국어대 지중해지역원장
작성일자
2015-03-05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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