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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하얀 가운에 반해… 60년 이발사 인생

부산 기네스를 찾아라! ⑫강봉원 이발사
열여덟살이던 1956년 입문… “부산 최고 이발사 자부심”

내용

“열여덟에 시작해 지금 일흔여섯이니 오십팔 년쨉니다.” 목소리에 힘이 넘친다. 한 마디 한 마디 자부심이 묻어난다. 자기 길을 당당하게 걷는 사람이 갖는 힘과 자부심이다. 십 년 이십 년도 아니고 무려 육십 년 외길을 걸은 사람. 그래서 그 분야 부산 최고라고 기네스에 등재된 사람. 부산진구 전포동 백수이발소 강봉원 대표는 칠십 중반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이고 여전히 미래지향적이다.

백수이발소 강봉원 대표는 60년의 이발 경력을 자랑한다. 강 대표는 몇 차례 이발소 운영을 거쳐 현재의 백수이발소를 1992년 개업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이발소 바닥청소부터 시작 … 실력 키워

강 대표가 이발업계에 처음 입문한 것은 1956년. 강 대표는 호적에는 1942년생으로 돼 있지만 실제론 1939년 기묘년 토끼띠다. 열다섯 살 무렵 경주에서 부산으로 와 안 해 본 일이 없을 만큼 고생을 많이 한다. 그러다 이발소 앞을 지나치다 하얀 가운 깨끗한 옷차림이며 환한 실내 분위기에 반했고 그게 입문 계기가 된다.

이발 인생을 시작한 곳은 우암동 적기 마산이발소. 물지게를 졌으며 바닥청소를 도맡는 등 허드렛일부터 배워 나간다. 이발 일을 즐겼고 적성에 맞았기에 실력은 금방금방 는다. 어떤 조수는 3년 내내 머리 감기기만 한 반면 이발과 면도 전 과정을 3년 만에 터득한다. 실력을 인정받은 강 선생은 사라호 태풍이 닥친 1959년 전포동 성북이용원으로 영전한다.

“신천이발솝니다. 문현동과 전포동 경계에 있었죠.” 1964년 가정을 꾸린 강 대표는 이듬해 직접 경영에 나서 신천이발소를 차린다. 매월 15일 하루 쉬며 직원 3명과 꾸려 나간다. 순풍에 돛 단 듯해서 개업 초창기 하루 수입은 1천 원 가량. 1천 원은 당시 어마어마하게 큰돈이란 표현을 강 선생은 여러 번 쓴다.

1965년 첫 이발소 개업

신천에 이어 차린 이발소는 청실이발소. 신천이발소를 건물 소유자인 지인에게 내어 주고 1970년 전포동에 차린 것이다. 선생 개인적으론 가장 애착이 가는 이발소다. 삼십대에 접어들면서 2남1녀 가정적으로도 황금기였고 수입이 쏠쏠해 경제적으로도 황금기였다. 동네 통장을 통해 ‘산만디’ 못 사는 이에게 무료 이발권을 매달 40장씩 6년 동안 나누어 준다. 남부산경찰서 근처 고아원에 종업원 네댓 명과 자주 방문해 봉사활동을 펼치기도 한다.

백수이발소 벽면에는 강 선생의 그러한 선행을 증명하는 액자가 둘 걸려 있다. 하나는 1970년 8월 내무부장관 박경원 명의 감사장이고 하나는 1971년 부산직할시장 최두열 명의 표창장이다.

“친군데 50년 단골입니다.” 1992년 개업한 백수이발소는 백수목욕탕 안에 있다. 오래된 동네 목욕탕이라서 찾는 사람은 대부분 단골이다. 이발소 역시 대개가 단골이다. 중 · 고생일 때 처음 왔다가 칠십 전후가 된 지금도 즐겨 찾는다. 단골들과 함께 나이 들며 강봉원 선생이 가진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사 기네스 기록은 오래오래 이어지지 싶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14년 6월호
작성일자
2014-06-11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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