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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1928년 문 연 부산최초 공설운동장

부산 기네스를 찾아라! ⑥구덕운동장
부산 체육 산실… 항일학생운동 노다이 사건 현장

내용

부산 서구 부민동 동아대 교정에는 눈길을 끄는 유물이 전시돼 있다. 전차다. 전차는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도심을 운행하던 대중교통. 전차 자체도 눈길을 끌지만 전차 외벽에 부착된 노선표가 더 눈길을 끈다. 한자로 쓰인 노선표에는 전차 종점이 '운동장'으로 나온다. 여기서 가리킨 운동장이 바로 서구 대신동 '구덕운동장'이다.

구덕운동장은 1928년 개장한 부산 첫 공설운동장이다. 육상경기장과 야구장, 수영장을 갖춘 종합운동장이다.

운동경기 비롯해 각종 행사·집회 열려

구덕운동장은 1928년 개장한 부산 첫 공설운동장이다. 육상경기장과 야구장, 정구장, 경마장, 수영장, 씨름장을 갖춘 종합운동장이었다. 이전에는 종합운동장이 따로 없어 경기 종목마다 운동장이 달랐다. 부산중학교와 부산진·부민보통학교 운동장이나 초량 철도운동장 등을 주로 썼다. 현재 서구청 자리에 있던 대정공원 운동장도 자주 쓰였다.

구덕운동장의 개장 당시 명칭은 '부산공설운동장.' 원래는 마을 운동장으로 사용하던 빈터였다. 운동 경기가 주 용도였지만 공설운동장답게 경축행사나 궐기대회 같은 공공집회가 자주 열렸다. 그런 만큼 역사의 현장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1940년 11월23일 노다이 사건으로 불리는 부산항일학생의거 발화점도 여기다.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 심판을 맡은 일본군 소좌 노다이(乃大)의 부정심판에 대한 항의가 항일 학생운동으로 이어진 '부산정신'의 한 현장이 구덕운동장이다.

구덕운동장은 부산직할시 승격의 감격적 현장이기도 하다. 부산이 직할시로 출범한 해는 1963년. 한 달 전인 1962년 12월1일 대대적인 축하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군복차림으로 참석해 축사를 했다.

1982년 구덕운동장으로 이름 바꿔

1963년 5월에는 육상경기장과 야구장 스탠드를 설치했다. 구덕야구장 출신 최고의 스타는 고 최동원감독. 고교생 최동원의 폭발적인 투구 폼 일거수일투족을 기억하는 야구 애호가들이 부산에는 수두룩하다. 야구 애호가들에게 최동원과 구덕운동장은 동의어이다.

구덕운동장에서 치러진 경기는 숱하다. 1973년 전국체전, 1975년 전국청소년체전, 1987년 전국소년체전, 1988년 서울올림픽 축구대회, 1997년 부산동아시아대회 주경기장 등 각종 국내외 대회를 치렀다. 대회 때면 학생들이 응원단으로, 때로는 카드섹션 일원으로, 때로는 고적대로, 때로는 선수로 구덕운동장을 뜨겁게 달궜다.

1970~80년대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부산사람들이 구덕운동장에 대한 추억을 저마다 한두 가지쯤 지니고 사는 이유다.

부산공설운동장은 1982년부터 구덕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동래에 사직운동장이 생기면서다. 구덕운동장은 현재 생활체육의 산실로 각광받고 있다. 체육관과 헬스장, 에어로빅장, 조깅트랙 등 시민 눈높이에 맞춘 '부산광역시국민체육센터.'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부산시민을 보듬는 곳, 거기가 구덕운동장이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14년 3월호
작성일자
2014-03-07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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