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영은 ‘동래관찰부 부사’가 정답
‘동래부사’ 아닌 10개 고을 다스리는 ‘동래관찰부 부사’ 재임
이야기 한마당 - 동래관찰부와 지석영
- 내용
부산의 역사는 동래의 역사를 이어받았다. 그 동래사에 비록 짧은 시일이기는 하나 동래에 '동래관찰부(東萊觀察府)'가 있었다. 그 동래관찰부는 객관적 견지에서 보면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의미가 역사의 뒤안길로 돌아들고 있다.
동래관찰부 얘기로 그 날의 동래와 오늘의 부산을 견주어 본다.
동래관찰부 등장
1894년(고종 31) 개화당이 집권하자 종전의 문물제도를 근대적 국가형태로 고쳐갔다. 이를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 한다. 갑오경장으로 종전의 반상계급이 타파되면서 문벌을 초월한 인재가 등용되고 인신매매가 금지되고 의복제도가 간소화되는 등의 변혁이 일어났다.
이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내정간섭과도 영향이 있었지만 조선말의 시대 추이로 보아서는 봉건성에서 탈피한 새로운 개혁이 요구됐고 그 개혁은 국내의 신진 정치인들이 추진해 갔다.
그 개혁 가운데 행정제도의 혁신은 획기적이었다. 그 행정제도는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지방관제공포(地方官制公布)에서 비롯됐다. 그에 의하면 종전의 조선 8도(道)를 없애고 전국을 23개 관찰부로 나누고 그 아래에 331개 군(郡)을 두었다.
이 23개 관찰부 가운데 경상도에는 대구관찰부·안동관찰부·진주관찰부·동래관찰부의 4개 관찰부를 두었다. 이 가운데 동래관찰부가 관장하는 군은 동래군·양산군·기장군·울산군·언양군·거제군·경주군·영일군·장기군·흥해군의 10개 군이었다. 말하자면 종전의 부(府)·목(牧)·군(郡)·현(縣)으로 나누어져 있던 행정기초 단위를 군(郡)으로 통일시킨 것이다. 부산의 입장에서 보면 동래도호부는 동래군으로 격하(格下)되고 기장현은 기장군으로 격상됐다. 이와 함께 동래군은 동래관찰부 소재지로서 10개군을 다스리는 중심군이 됐다.
이 개혁은 공고와 동시에 시행됐는데 동래관찰부 부사는 지석영(池錫永)이었다. 지석영은 1879년 부산에 있는 일본인 병원인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종두법(種痘法)을 배워 그 때 어릴 때면 누구없이 걸려서 생명의 위험을 입어야 했던 전염병 천연두(곰보병)를 근절케 하는 큰 일을 한 분이다.
관찰부제도의 실패
지석영이 동래도호부 부사가 되어 동래에 온 것은 1895년 4월이었다. 그렇게 온 지석영은 한달 후인 5월에는 동래관찰부 부사가 됐다. 말하자면 1개 고을인 동래부를 다스리던 동래부사가 10개 고을을 다스리는 관찰부 부사가 된 것이다. 이 동래관찰부 구성의 기초작업은 1896년 8월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갑자기 전국의 행정조직을 개혁하려 하니 어려움이 많았다. 거기에 일본의 내정간섭에 의한 타율적 개혁이란 항일세력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정부는 그 같은 국내 여론과 실행상의 어려움에 부딪치자 23개 관찰부로 개혁하려던 시책을 중도에서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단으로 등장한 것이 1896년 8월 4일 칙령 36호로 공포된 제2차 지방관제 개혁이었다.
제2차 개혁으로 전국지방행정제도는 13개도(道)로 나누어지고 경상도는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로 나누어지면서 경상도에 두었던 대구·안동·진주·동래의 관찰부는 폐지됐다. 이 때 지방에 7부(府)를 두었는데 그 7부는 광주·개성·강화·인천·동래·덕흥·경흥이었다. 동래는 7부 가운데 하나가 됐지만 경상남도 관할 아래 들었다.
1895년 제1차 개혁으로 현이 군으로 격상된 기장군은 1896년 제2차 개혁 때는 경상남도 아래의 기장군으로 존속하다가 1914년 동래군에 합병됐다.
1년 3개월 동안 동래관찰부 부사로 있던 지석영은 동래관찰부가 폐지됨으로써 1896년 8월 중앙정부로 불려들어 10월에는 중추원이등의관(中樞院二等議官)이 됐다. 그런데 이 같은 행정제도의 변경에 따라 동래사(지금의 부산사) 주변의 착오와 오류가 적지 않다.
지석영에 대한 착오
현재의 여러 글에는 지석영을 '동래부사'라고 쓴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동래관찰부 부사'를 줄여 '동래부사'로 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동래부사라고 쓸 경우는 동래의 한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守令)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전국의 행정부가 23개 관찰부로 조직됐을 때의 관찰부 아래 행정기관은 모두가 군(郡)이었다. 동래도 동래군으로서 군수가 있어서 동래군을 다스렸다.
그런데 동래군에는 동래관찰부가 별도로 있어서 관찰부 부사 지석영이 동래군·양산군·기장군·울산군·언양군·경주군·영일군·장기군·흥해군·거제군의 10개군을 다스렸다. 그러니 지석영은 지난날의 동래부사보다 상위 관청의 상위 위계인 관찰사였다.
그렇게 관찰부 부사를 관찰사라고도 하고 보니 이 관찰사란 말에서 지석영을 동래부사를 거쳐 경상도관찰사가 됐다고 한 기록도 있다. 이도 잘못이다. 지석영이 경상도관찰사를 한 적은 없다.
이렇게 지석영에 대한 착각적 오류는 이 뿐이 아니다. 지금의 기장군에 '觀察使池公錫永善政不忘碑'(관찰사지공석영선정불망비)가 있고 '表率十郡(표솔10군)'이란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10군을 이끌었다"는 말인데도 "온 군현을 이끌어 주었다"고 풀이하고 있다. 이도 동래관찰부가 10개군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서 오는 해석의 오류라 할 수 있다.
이 비석은 지석영이 이곳을 떠난 한 달 후인 1896년 9월 세웠다. 기장은 동래관찰부가 형성될 때 군으로 승격했고, 지석영이 기장군의 상위 관청인 동래관찰부 부사로 있었던 연고로 송덕비가 세워졌을 것이다.
동래관찰부의 의미
오늘날 행정기구를 3단계에서 2단계로 줄일 행정개혁이 얘기되고 지방균형발전과 지역의 특수성을 감안한 분권이 얘기되고 있다. 그러한 얘기와 함께 1895년의 동래관찰부 지역 구성을 되짚어 본다.
그 때의 동래관찰부는 남해안의 거제군에서 동해안의 영일군으로 이어진 해안내륙의 10개군이었다. 동래관찰부의 청사도 바닷가인 부산의 부산진에 두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그 때 이미 지역의 특수성을 감안한 해양중심의 행정조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륙과 해양에 따라 생산과 생활구조는 물론 의식구조도 다르다. 그 구조를 이용, 개발할 수 있게 행정구조가 조직되어야 효율적인 국토이용을 이룰 수 있다. 옛날의 동래인 지금의 부산에서는 해양수도, 해양특구, 해양중심도시, 동북아 물류중심항 등 해양발전에 그 의욕을 드높이고 있다.
이에 즈음해서는 그날의 동래관찰부의 조직체계가 바다고을을 한데 묶어 행정력을 집결하려는 구상이었다면 그 때에서 111년을 지낸 오늘날에서는 더욱더 그 필요성이 절실하다. 지자체 간 해안경계에 갈등을 빚고 있는 이 마당이다. 생각을 되짚어 해안도시의 일원화를 꾀할 시점에 놓였다.
- 작성자
- 부산이야기 2006년 11·12월호
- 작성일자
- 2013-08-27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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