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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쿨부산 스토리텔링 공모전 가작] 짧은 인연 긴 여운

내용

오랜만에 타 본 새마을호 열차는 생각보다 아늑했다. 눈대중으로는 비좁은 듯 보이지만 앉아 보면 딱히 불평거리를 찾기 힘든 ktx의 우중충한 좌석 공간에 비하면 분명 그랬다. ktx는 시간을 앞당기려 허겁지겁 달리기만 할 뿐 막상 추억이 들어설 자리는 비좁은데, 새마을호는 시간이 늘어지고 공간이 넉넉해서 창밖 풍경뿐만 아니라 머릿속에 웅크린 생각까지도 추억으로 변환된다. 어쩌면 멋진 추억이 만들어질지도 모를 이 여행에 안성맞춤일 것 같은 새마을호 열차를 타고 나는 부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동대구역에서 탄 열차는 얼마지 않아 청도 인근의 구릉지역으로 접어들었다. 얕은 능선 비탈을 따라 줄지어 서 있던 복숭아나무가 동녘의 따가운 햇살을 받아내기에 급급한 차창을 스치며 지나간다. 마치 전화선을 통해 울리던 그 부산 남자의 거침없는 말투처럼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모레 아침에 부산역에서 보입시다. 시간 안 되면 연락 주이소.”

생면부지의 사람과는 '시간이 되면 만나자'가 상식이고 '시간이 안 되면 연락 달라'는 비상식이다. 그런데도 비상식을 마치 상식처럼 태연하게 말하던 그 남자의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떠올라 자꾸만 헛웃음이 나왔다.

그가 방송국을 통해서 처음 나에게 연락해 온 것은 지난 7월 초순이었다. 사업체를 중국인들에게 빼앗기고 한순간에 알거지가 되어 버린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처절하게 아픈 삶을 살았다. 그런 나의 과거와 함께 재기 의지를 다지고 있던 내 모습이 sbs 스페셜 <사장님의 눈물> 편을 통해 방영되었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보고 수소문 끝에 나에게 연락해 온 것이다. 그때 나는 섬진강댐에서 난생 처음으로 막노동을 하며 고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있지예, 장사하는 걸로 치면 오백만 명 중에 일등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라예!”

묻지도 않은 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거기에다 '내 말을 절대로 의심하지 말라'는 쇄기까지 스스로 박고 있는 그가 밉살스럽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말하는 오백만 명의 근거가 궁금해서 넌지시 물었더니,

 “우리나라에서 장사하는 사람이 그 정도는 된다 아입니까!”

그러면 본인이 이건희 회장보다 돈을 더 잘 번다는 말이냐고 마음속의 앙금을 드러내며 재차 물었다. 약간의 공격성을 띤 질문에도 그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내 말 잘 들으이소. 그 사람들은 '사업'을 하는 거고 나는 분명히 '장사'라 캤십니다. 그랬지예? 그라고 내가 언제 돈을 억수로 마이 번다 캤십니까? 내 말은 장사하는 아이디어가 그만침 많다는 뜻이라예, 오해하지 마이소. 알았지예?”

물론 '사업'과 '장사'에 대한 정확한 사전적 의미 구분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은 별로 없을 터이지만, 이 남자는 확실하게 구획정리가 되어 있는 듯했다. 그는 자신이 구사하고 있는 말의 의미에 대한 경계가 분명했고 나름대로 통계적 근거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했던 말을 재차 확인시키는 화법으로 말의 신빙성을 배가하려는 치밀함까지 엿보이는 사내였다.

그가 전화를 건 요지는, 본인이 현재 사업을 구상하고 있는 중인데 자신은 몸이 좋지 않아 누군가에게 경영을 맡길 생각이라며, 그 일로 한번 만나 이야기해 보자는 것이었다. 방송에 나온 사람들 중에서 내가 재기할 가능성이 제일 높을 것 같아 연락했다는 그 사람이, 애초부터 나는 무척 궁금했다.

사실 나는 방송 출연 이후 많은 곳에서 연락이 왔지만 여러 제안에 대해 일절 응하지 않고 있었다. 스스로 방송의 위력에 도취되어 아무런 준비 없이 뜬구름 잡는 기분으로 다시 세상에 나가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를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방송이라는 외부 요인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자각 때문이기도 했다. 이는 삶의 나락까지 떨어져 본 사람들만이 체득할 수 있는 깊은 성찰의 결과였다. 그랬던 내가 유독 이 거침없는 부산 남자의 매력에 이끌려 이윽고 부산역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겉보기에는 전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약간 어색한 걸음걸이만 빼고 나면 건강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를 광복동으로 안내한 그는 무척 친절하고 사교적인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가끔씩 느껴지는 안경 너머의 날카로운 눈매는 어딘가 모르게 만만치 않은 내공이 쌓여 있는 남자임을 말없이 설명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인근 카페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헤어질 때까지 10시간 가까이 꼬박 그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 열대야에 허우적거리는 광복동의 도심 한복판에서 두 남자는 지독한 탐색전을 벌였던 셈이다. 만남의 성격상 서로에 대한 탐색은 불가피했고, 그에 따른 감정의 손상은 마땅히 감수해야 할 몫이었지만 그런 불쾌함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현재 적지 않은 규모의 오토바이 매장을 가지고 있어 그리 궁색하게 살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처지에 대한 원망으로 잔뜩 꼬여 있는 내 심사로는 자칫 그 말이 건방지게 들리기 쉬웠다. 그러나 잔잔한 미소 너머에 깔린 그의 온화한 표정은 겸손을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만의 특별한 조리법을 바탕으로 한 요식 사업을 구상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넉넉한 분 같은데 왜 굳이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돈을 더 벌려고 하십니까?”

의례적인 물음이었지만 사실은 앞으로 내가 의탁하게 될지도 모를 그의 '구인 동기'가 얼마나 합리성을 띠고 있는지, 또한 그것을 통해 그가 얼마나 상식적인 사람인지를 가늠해 보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 자신의 다리를 걷어 올리려고 앞으로 몸을 숙였다. 허리가 꺾어지자 그의 머리가 내 눈앞으로 밀려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듬성듬성한 그의 머리숱은 40대 후반이라는 그의 나이보다 훨씬 더 많이 패여 있었다.

 “나는 앞으로 마이 살아봐야 겨우 60 정돕니다. 다른 사람한테 좋은 일 좀 하고 죽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묵고 살라고 악착 같이 살았지만 막상 뒤돌아보이 허전해 죽겠십디다.”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돈을 더 벌고 싶다는 그의 말이, 그 '좋은 일'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법한 지금 내 처지로는 온전하게 다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이유로 대놓고 대거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현실을 가늠하고 있었지만 그는 삶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자신의 몸이 성치 않다는 사실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온몸의 피부는 두터운 각질로 뒤덮여 있어 보기에 흉했고 하루에도 수차례 씩 투석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신장이 좋지 않다고 했다. 당뇨가 심한데다 심장마저 좋지 않아 한 시간도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주기적으로 전신 마시지를 받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불행했던 결혼생활과 스쳐지나가 버린 가슴 아픈 인연 등 하나 같이 가슴 저미는 사연들을 처연하게 쏟아냈다. 가슴속의 눈시울을 닦아내고 찬찬히 그를 쳐다봤다. 그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많이 아픈 사람이란 것을 그제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인생의 소중함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충만한 남자라는 사실도 나는 서서히 깨달았다. 비로소 좋은 일을 하고 싶어 돈을 더 벌고 싶다는 그의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 가졌던 궁금증은 그다지 속 시원하게 풀리지는 않았다. 과연 이 사람이 돈 버는데 얼마나 탁월한 재주가 있을까, 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궁금증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은 궁금증이었다.

제안에 대해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겠다는 말을 하고 일어서려는데 그가 불쑥 현금을 내민다.

 “내가 올라가야 되는데 부산으로 오시라 캐서 미안합니다. 여비에 보태이소.”
 15만원이었다.

이튿날 아침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신은 장사꾼인데 대화를 해 보니 나는 사업가에 가깝다고 하였다. 그는 완곡하게 나를 거부하고 있었고 현실적인 사람답게 자신이 먼저 싹을 자르고 있었다. 내가 감사의 인사를 함으로써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사라진 그와의 짧은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고 핑계일 수도 있지만 애써 그 이유를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고통 속에서도 인생의 의미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이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나는 그것으로 족했다.

작성자
서동진(경북 성주군)
작성일자
2012-10-31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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