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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성실한 연극인생, 번득이는 인생연극

예술부산 ‘예인탐방’ ⑤ 연극인 김문홍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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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부산|예인탐방
내용

오늘의 연극을 역사화하는 성실한 연극인생
역사를 오늘 연극화하는 번득이는 인생연극

흔히들 답이 없다고 하는, 혹은 말로 답할 수 없다고 하는 인생에 대해 말을 대신하는 것으로 마흔을 넘긴 얼굴을 꼽는다. 녹록하지 않은 인생의 환갑을 넘기고 그 중반에 서 계시는 김문홍 선생의 얼굴에는 세파를 관통해 온 직렬성과 관조적인 편안함이 공존하는 듯하다. 시대를 뚫고 나오는 예술혼과 이를 어우를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인생을 말해주는 얼굴이 마치 관극행위로 대상화된 이미지라면, 실체인 몸으로 써온 삶으로 그 답을 살아온 인간 안에 이미 연극이 내재되어 있는 때문이다.

연극인 김문홍 선생과의 만남은 이렇듯 삶과 예술의 교묘한 조우를 맛보는 시간이었다. 1945년생으로 한국근대화의 격변기를 디디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선생의 삶은 문자 그대로 부산 연극의 산 증인이 되어, 시대와 역사 앞의 인생에 대한 질문을 문학으로 연극으로 던지며 그 답을 말로 다할 수 없는 삶으로 살아오신 셈이다. 그만큼 오늘날 극작가, 연극평론가, 소설가, 동화작가, 문학박사, 연극 및 희곡 관련 외래교수 등의 다양한 호칭과 이력은 그만큼 선생이 삶을 경주하며 벌여온 문인으로서의 다양한 지적 도정과 왕성한 창작 열정을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선생을 굳이 연극인으로 모시고자 하는 것은 회갑을 맞고 오히려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아 다시금 예술적인 청춘을 구가하는 인생에서 활주하는 분야가 바로 연극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올해 제27회 부산연극제의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극단 시나위의 <대숲에는 말言이 산다>의 작가이다. 이 작품은 작년도 제1회 부산시 지원창작희곡공모전에서 은상을 수상한 작품이며, 올해의 전국연극제에서 작품상 은상과 개인부문 희곡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제 다양한 장르 넘나들기의 궤적을 지나 연극에 올인하고자 또한 그 신념을 밝히신다. 선생의 다양한 재능은 때론 장르 중심으로 모이길 즐겨하는 예술 창작영역에 있어 주위의 적잖은 비판과 질시도 있으리라 여겨진다. 첫 번째 선생의 희곡집인 『안개주의보』(1987)에서의 저자 후기에 실린 선생의 변을 들어보자.
 

“연극에 발을 들여놓은 지 15년 만에 첫 희곡집을 내놓는다. 그동안 어설픈 연기하랴, 어줍잖은 연출하랴, 돼먹지 않은 희곡쓰랴 정신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동안 나는 잡놈이란 소리를 많이 들어왔다. 어제는 소설 쓰는 작가들 판에서 오늘은 동화 쓰는 아동문학 판에서, 또 내일은 연극하는 굿판에서 홍길동처럼 번쩍번쩍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나에게 다 때려치우고 소설만 써라, 아동문학은 페업하려 하느냐, 네가 머물 곳은 연극계인데 왜 한눈을 파느냐며 선의에 넘친 충고와 질책을 해주었다.”

선생의 인생무대는 나름의 독특함이 그 색을 발하고 있는 다면경의 세상이었고, 이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다양한 의상과 연출이 필요했을 것이다. 선생은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는 인생 배우의 삶을 살아오신 것이다. 선생의 초년은 시대적으로는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개인사적으로는 공간적 이주자로서의 불연속과 단절이라는 아픔을 거쳐내야 했다. 전남 완도에서 큰어머니의 젖을 먹고 어머니로 부르던 여덟 살박이 초등 1학년의 소년이 아버지가 일본 유학에서 돌아오시자 낳아준 어머니와 함께 부산에 터를 잡고 가족의 품에 돌아오게 되었지만 정작 그 낯설음은 오래고 깊었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어머니라 제대로 부르지 못했고, 31세에 결혼을 하기 전까지 애써하지 않고서야 ‘어머니’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을 정도라니 말이다. 그런 어린 시절의 정서적인 상흔은 적응의 기간을 오래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부산에 전학해서 초등 1학년을 한 번 더 다니고, 또 6학년 겨울방학 무렵 부친이 사업 실패로 쪼들리자 다시 고향 큰집에서 6학년을 한 번 더 다니게 되는 등 삶의 정형을 가볍게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고 부산에서 초중고를 나오자 이미 고등학교 졸업 무렵엔 군대 징집, 이어 이삼 년의 사회생활을 거쳐 부산교대에 늦깍이로 입학, 75년 초등교사로 발령 후에 삼십 년간 재직, 2004년 62세에 퇴임을 맞았다.

인생 자체의 특성이기도 하려니와 여덟 살의 김문홍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소위 ‘팔자대로’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어렸을 적 당시 부모의 애를 아주 먹인 것으로 고백하는데 그것은 7세까지 키워주신 고향 같은 큰어머니에게로 향한 애정이 원인이기도 했으며, 또 새로운 도시생활에 정을 못 붙인 어린 인생의 고초이기도 했다. 이때 맘 붙일 곳으로 찾은 곳이 영화관이었다고 한다. 5~6명의 형제 중 전쟁과 병고로 죽고 남동생과 자신만 남은 속의 외로움도 한몫했으리라 여겨진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보기 시작해서 학교도 안가고 볼 정도로, 영화를 밥 먹다시피 한 시절에 대해 “나를 키운 건 8할이 영화였다.”고 회상하신다. 오늘의 영상세대와 호흡하는 가운데, 선생의 인생에 있어 영화란 여전히 작가적인 감수성과 고갈되지 않는 상상력을 길러준 미래적인 설치 무대가 되어주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는 다양한 장르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런 것이었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문예반 시절엔 시적인 기량을 발휘해서 중고생들의 문학잡지인 『학원』 문학상을 받기도 했으며, 교육대학 시절엔 소설 창작에 힘을 쏟은 결과 76년 『한국문학』지에 소설 「갯바람 쓰러지다」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또 초등교육 현장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자연스레 삶의 토양을 반영하듯 동화작가로, 한편 부산교대 교사극단 한새벌의 배우이자 극작가, 연출가로서 연극계에도 꾸준히 몸담아왔다. 76년은 개인사적으로 최고의 해로 꼽는데, 그해에는 소설 데뷔뿐 아니라, 중앙일보사에서 나오던 『소년중앙』 문학상에 동화로 데뷔하고, 한국문인협회기관지인 『월간문학』신인상에 동시가 당선되기도 하는 등의 영예를 누렸다. 그때 겨우 전세를 마련하고, 또 그것을 종잣돈 삼아서 82년 계몽사에서 주최한 아동문학상 장편 당선을 통해 그야말로 ‘글로 집을 짓는’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이로써 생활인으로서의 현직 교사와, 꿈으로 현실을 하나하나 낚아 올리는 예술가로의 운명 같은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셈이다.
 

82년부터 희곡을 쓰기 시작해서 90년 무렵부터는 소설보다 연극 쪽으로 관심을 집중시켜 왔지만, 97년까지는 동아대학교에서 함세덕의 희곡연구-「함세덕 희곡의 극적 전략과 의미구조 연구」-로 박사학위를 하느라 창작의 공백기를 지나게 된다. 그럼에도 부산에서 공연하는 일 년에 50~60편의 연극을 거의 다 보고, 학문적 연구에 가담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를 공연사적인 기록으로 남기는 것에 대한 의식과 소명을 갖고 평론을 쓰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 선생의 극작가와 연극평론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배경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공연을 기록으로 남기고 역사화시키는 작업이 그만큼 소중한 이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연극을 하는데 급급하고 미래에 대한 재투자로서의 관계개발이나 기록으로 남기는 데 소홀한 현실을 절감한 것이다. 그럴수록 현재의 거름이 되고 있는 과거를 되짚고 미래의 초석이 될 현재의 발판을 마련하는 일은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될 과제이다. 그래서 2008년 한국연극협회에서 한국연극 100주년을 기념한 기념비적인 저술을 발간하는데 해방(1945)이후부터 현재(2008)에 이르기까지 60여 년간의 부산을 중심으로 한 연극사의 흐름을 정리한 『부산연극사-한국연극 100년 부산연극 100년』을 발행하는데 허은 선생과 공동 집필을 맡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단연 상당한 발 품앗이의 수고와 사료화하는 꼼꼼함이 돋보이는 선생의 업적은 1973년에서 2008년의 부산연극사를 연극적 역량의 축적기(1973~1979), 부산연극의 중흥기(1980~1989), 부산연극의 르네상스(1990~1999), 통속성과 예술성의 딜레마(2000~2008)의 시기별로 양식화해서 정리한 것이다.    

한편 전방위예술가인 이윤택 선생은 김문홍 선생의 세 번째 희곡집인 『세한도에 봄이 드니』(2006)의 후표지에서 다음과 같이 선생의 예술과 인생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다.

“김문홍 형은 부산문화의 큰 선생이시다. 큰 선생이라는 의미는 평생을 부산이란 지역문화를 지켜온 ‘지킴이’라는 의미이며, 초지일관 자신의 예술적 작업을 실천해 온 작업자란 의미이다. 한 예술가가 이렇게 ‘지역에 뿌리를 내린 삶과 예술의 길’을 실천해 오기란 쉽지 않다...” 첫 창작희곡집인 『안개주의보』(1987), 『산천에 봄은 다시 오고』(1996)에 이어 십 년 터울로 한 권씩 내고 있는 희곡집 3권에 수록된 작품들은 한 해 평균 한 편 꼴로 발표해서 공연을 거의 거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앞으로 향후 십 년간의 선생의 구체적인 행보에 대해 다소 주위를 기울이게 된다.  

선생과의 편안한 인터뷰 속에서 마지막으로 드린 질문은 다소 도전적이게도 인간인 동시에 작가 김문홍으로서의 자기 평가와 만족도에 대해서였다. 그 답으로, 후회는 없지만 다시 삶을 되돌린다면 연극 영화 쪽으로 집중되고 보다 자유로운 아티스트로서 매진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를 쓰더라도 제대로 각인되는 어느 정도의 성과와 가치 평가를 낳을 수 있는 작가이고 싶다는 아쉬움을 갖는다고. 반면 작가로서의 30~40년이 천성적인 끼와 재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는 해도 창작의 고통은 피를 말리는 것이기에 한편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말도 하신다. 인생의 동반자로서 문인인 자신과는 달리 오히려 자신이 손대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 이상화시켜 늘 묵묵히 바라다 봐 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헌신에 대한 미안함을 표하는 부분이다. 이렇게 선생은 분명 양 극단의 말을 하고 계시지만, 우리는 극과 극이 통한다는 것을 잘 안다.    

이제 선생의 좌표는 곧 극작가로서 연극을 쓰고, 연극평론가이자 연극사가로서 연극평론을 쓰는 일이다. 그럼에도 선생의 희곡창작과 이론의 양 날개를 겸비한 연극계의 확실한 기량으로 말미암아, 자연히 후학들에게 이름과 상관없이 희곡문학의 특성에 대한 안내자라는 교육적 역할과 그 충실한 사명을 수행하면서 우리 지역 연극의 미래에 대해 꿈을 심고 계신다.

이렇듯 우리 부산의 연극판을 견고하게 해온 선생의 작업은 <대숲에는 말言이 없다>를 계기로 해서 이제 시대와 역사라는 거대 지류를 현실로 맞닥뜨리고자 하는 명제가 주어졌다. 가령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삼국유사 설화인 경문왕 전에는 임금님의 이발사가 이발하러 갔는데 거기에는 실제 귀가 큰 임금님이 계셨고, 인간의 숨기지 못하는 표현 욕구로 인해 대숲에서 실컷 목놓아 소리 지른 것이 나중에는 심지어 대숲을 베고 거기에 산수유를 심어도 여전히 바람 부는 날이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메아리가 들린다는 내용이었다. 반면 선생의 작품에는 역발상으로서의 참신성과 더불어 시대적인 교훈과 정치적인 풍자도 곁들어 있다. 전제는 임금님의 귀는 크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화랑 세력을 등에 업은 개혁 군주인 경문왕 쪽에서 오히려 왕의 권위를 상징하면서 백성의 소리를 잘 듣는다는 의미에서 일부러 귀가 크다고 소문을 내지 않았을까 하는‘가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통치자는 백성의 아픈 소리와 쓴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소통의 문제를 은유적으로 건드리고 있는 작품이다.

역사를 다루는 선생 특유의 낯익음과 낯설음의 공존을 통해서 우리는 연극의 작가적인 일침을 본다. 오늘날에도 연극이 필요하고 또 과연 그 순수성의 고지를 점해야 하는 것으로 우리는 연극적인 본령으로 회귀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이를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힘이며 과제라고 볼 때, 선생은 매 작품마다 주제가 강한 색채를 띠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선생의 희곡론 강의에서도 강조되는 바, 현실에 대한 발언을 강조하는 연극의 문학성에 힘입은 결과일 것이다.  

원소스 멀티유즈의 시대에 대한 선생의 비전은 ‘과거의 역사가 이 시대의 관객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라는 시대적인 당위성에 질문을 계속 던지며, 역사라는 사실을 다루되 현재를 반영하는 것이다. <대숲에는 말言이 없다>라는 작품도 실은 지난해 계간지 『조은 소설』 봄호에 「귀」라는 제명으로 잉태되었던 것이다. 또 한편 복두장이의 손녀를 설정하여 아동소설로 써보려는 구상도 갖고 있다. 그리고 현재 초고를 쓴 상태로 내년을 준비하는 것은, 조선 정조 때 문체반정에서 이옥이라는 인물을 통해 어떤 권력이나 시대의 통제에도 굽히지 않는 지식인의 참모습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 외에도 모성 결핍에서 오는 허균의 인간적인 면모를 다루고자 하는 등 역사적 인물에 대한 새롭고도 입체적인  조명이 기대된다.   
 

서울의 연극 중심가 대학로에 밤이 내리면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하는 것’(로베르 필리우)이라는 문자 디자인의 시각적 설치물이 핑크와 블루의 네온싸인으로 밝혀진다. 예나 지금이나 연극은 사람[人間]사이의 가장 직접적인 통로이다. 해바라기처럼 올곧게 서서 척박한 텃밭을 일구며 지키는 연극인으로서의 김문홍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 앞으로 우리 부산의 연극 중심가에 밤으로 피어날 문구가 무엇인지 상상해보는 기쁨을 누리자.

글·사진 홍성희

작성자
예술부산 2009년 7/8월호
작성일자
2012-05-01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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