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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오래된 골목은 아버지의 얼굴을 닮았다

골목길에서 어슬렁 거리기 ②

내용

거리에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간다. 한적한 거리에서 사랑하는 이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은행 잎을 밟아보고 싶진 않은가? 다시, 스무 몇 살 그 어디쯤으로 가서 순정(純情)의 단풍잎을 책갈 피에 고이 꽂아보고 싶지는 않은가.

이창동 감독은 영화 <시>에서 오래된 골목을 ‘아버지의 얼굴’ 같다고 했다. 왜 아버지의 얼굴을 골목에 비유했을까? 그것도 오래된 골목을.

골목이 아버지의 얼굴이라면 낙엽은 아마도 ‘나무가 내려놓는 마음’이지 않을까? 하늘 끝까지 푸 른 물빛을 올리며 열정을 자랑하던 나무들의 하심(下心)이 낙엽이지 않을까. 그래서 골목은 삶의 바닥끝까지 늘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닮아 있는 것일까.

 

만덕2동에서 아버지의 얼굴 같은 골목을 만난 것은 길을 잘못 찾아들어, 큰길에서 들어갔다 나오기를 세 번이나 한 다음이었다. 길이 있을 거 같아 들어갔지만 결국 막다른 골목. 그렇게 세 번을 헛걸음치고, 혹시나 싶어 들어간 골목에서 마주한 나트막한 돌담. 주위의 다세대주택과 양옥집 들을 빼버리면 영락없는 시골집 풍경이다. 담장 안을 들여다보니 안채엔 살림 흔적이 없다. 밖에 서 주인을 부르며 인기척을 내어본다. 부스럭 소리만 날 뿐, 아무런 대꾸가 없다. 대문인 양으로 막아놓은 판자를 넘어 마당으로 들어가 본다. 사람 사는 온기가 없이 온통 어지럽다.

“어이쿠~”

벼슬이 빠알간 암탉 한 마리가 빤히 올려다보고 있다.

“뭐하는교? 거기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겨우 쓸어 올리며 돌아보니, 할머니 한 분이 헛간 같은 곳에서 나오신다. 대낮에 이렇게 놀라기는 처음이라 등골이 서늘하다.

역시, 주인 없는 집이란다. 할머니 말씀으론 100년도 더 된 집이라는데,,, 확인할 바가 없다. 집 옆엔 그리 작지 않은 텃밭도 있다. 곧 이사 갈 계획이라 집안이 온통 복잡하고 어지럽단다. 애완용으로 기르는 닭과 토끼를 어떻게 처리할 지가 걱정이라신다.

정감어린 돌담과 오래된 기와집. 테마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돈과 시간을 들여 외지로 돌담, 기와집 구경을 가는 형편이고 보면 이 집과 골목을 잘만 보존해도 지하철 요금만으로도 좋은 구경거리가 될 거 같단 생각이다.

 

놀란 김에 한 번 더 놀라자. 북구 만덕2동엔 유럽식 주택촌이 있다? 없다?

지난주 구포 국수공장 글을 보신 분이라면 당연히 “있다”에 돈을 걸었을 거다. 멀리서 보면 흡사 ‘레고로 만든 집’ 같다며 우리 골목 좀 소개해 달라는 독자 제보가 있었다. 부르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것이 ‘쿨(Coooool) 부산의 정신’이다.

‘레고로 만든 집’의 압권은 마치 파스텔로 칠해놓은 듯한 지붕이다. 당연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지붕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순식간에 촬영 포인트를 정하고, 시민들께 좋은 그림 보여드리기 위해 과감히 ‘무단침입’ 감행한다. 이 글 읽고 직접 출사(出寫) 가실 분들이 계실 것 같아서 주민 민원이 예상되므로 촬영 지점은 밝히지 않는다.

보시라~ 우리 부산에도 이런 아름다운 집들이 있음을.

통일성은 기하되 획일적이지 않는 고운 자태. 이들 집들이 있는 골목 이름도 예쁘다. ‘은행나무로 23번 길’. 전체 54세대다. 86년에 지어진 국민주택이다. 당시 가격 4,400만원 고급 주택지다. 87년부터 입주해 지금까지 살고 계시다는 ‘입주 1세대’인 분과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당시엔 최고 자재로 워낙 튼튼하게 지은 집이라 지금까지 벽에 금간 곳이 한 군데도 없고 비 한 방울 안 새요. 그때 집을 보자마자 욕심이 나서 촌에 논 팔고 빚내서 덜컥 사버렸지요. 당시 주변 주택가격이 한 1,100만원 정도 할 때니까 얼마나 비싼 집이야. 중간에 집값 뛸 때 다들 집 팔고 이사 가버리고, 지금은 우리랑 같이 입주한 사람이 한 30%도 안 될걸요. 지금 와서 계산해보면 집값 올라서 이익 본 건 없지만 여기서 애들 키우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그걸로 된 거지 뭐. 딴 데는 못가요. 여기가 너무 좋아요.”

한적한 골목인데도 대문 열어놓고 사는 집이 제법 보인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낮은 울타리 너머로 정원이 참 예쁘다. 마당에 개를 풀어놓고 키우는 집들도 많다. 집집마다 감나무며 귤나무며 참다래 같은 나무들이 골목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부산에도 도시 디자인 개념이 확산되고 있으며, 도시색채 경관 계획도 하고 있다.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 낙후지역 주택환경 개선사업 같은 데에 이런 예쁜 지붕들이 좋은 참고가 되지 않을까?

골목 이름이 ‘은행나무길’이라면 근처에 은행나무가 많을 것은 당연지사.

북구 디지털도서관 앞을 지나는 도로 양 옆을 따라 은행나무가 터널을 이뤘다. 순간, 센티멘털해지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며 막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은행나무들을 따라 길을 내려가 본다. 길 사이사이에 낯선 현수막과 벽보가 붙었다. ‘제5회 만덕사람들의 가을 은행잎 축제(2010.11.13.토. 10:00~20:00)’

오호, 만덕사람들은 은행잎이 물들 때 마을 잔치를 하는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이 은행나무 길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골목에서 어슬렁거리며 오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주민자치센터에 가서 물어보란다.

만덕시장 근처에서 몇 가지 찬거리를 놓고 좌판을 하시는 할머니에게 주민자치센터가 어딨는지를 여쭙는다.

“총각! 신호등 건서서 저쪽 길로 가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되요.”

므흣^^ 총각이라는 소리에 입과 지갑이 동시에 열린다. 실로 얼마 만에 들어보는 찬사인가. 아, 나에게도 아직 총각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 아닌가. 내일 아침엔 토란국을 맛볼 수 있겠군.^^

“은행나무들은 1986년에 만덕 택지개발하면서 조경수로 심은 것들입니다. 그땐 나무 직경이 10센찌 정도밖에 안됐을 겁니다. 지금은 저렇게 터널을 이뤘지예. 우리 동네 명물 아입니까. 그래서 몇몇 뜻있는 분들이 주민화합을 위해서 은행나무를 가지고 축제를 하자고 하셨고, 지금까지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필요 경비를 내서 은행잎 축제를 해오고 있습니다. 자발적인 마을 축제지예.

여기 소망 은행잎이 한 장에 만원인데, 소망 은행잎에다가 소망과 이름을 적어서 주민자치센터 입구에 있는 나무에 매답니다. 주민들 호응이 참 좋습니다.”

주민자치센터 직원의 설명이 시원시원하고 친절하다. 은행잎 축제를 자원봉사하시는 부녀회원께서 사탕을 한 움큼 손에 쥐어준다. 마을의 인정과 인심이 살아있다.

20년 전에 심은 여린 나무들이 지금은 아름다운 은행나무 길을 이뤘다. 그 덕에 만덕 주민들은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때를 맞춰 마을 축제를 연다. 나무와 사람, 사람과 사람이 함께 어우러지는 화합의 한마당이다.

부산시는 작년에 ‘그린 부산’ 운동을 선포했다. 도시 곳곳에 나무를 심고, 걷고 싶은 길을 조성한다는 거다. 이처럼 마을에 은행나무 길 하나를 조성하는 것으로도 온 마을 주민들의 자랑이 되고 기쁨이 되는데, 20년 뒤에 ‘그린 부산’ 운동의 성과는 어떨까? 상상해보라.

올해도 어김없이 은행잎은 물들고, 만덕 주민들은 ‘제5회 만덕사람들의 가을 은행잎 축제’(2010. 11. 13. 토. 10:00~20:00)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 토요일 북구 디지털도서관 위에 있는 백양근린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노오란 은행잎으로 무척이나 흥겹겠다. 지하철을 타고 한번쯤 만덕사람이 되어보는 것도 좋은 가을이다.

이사 간 순이에게 은행잎 편지 한 통 띄워 보내자.

작성자
원성만
작성일자
2010-11-09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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