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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부산이야기 12월호 통권 146호호 기획연재

과거에 멈춰버린 도심 속 섬 일제강점, 끝나지 않은 아픈 역사가 …

내용

범일동 매축지마을 

 

 

 

도시철도 1호선 좌천역에서 마을 입구 굴다리를 지나 철길육교를 건넌다. 굴다리는 마을 사람들이 도심을 통과하는 출퇴근길이자 학생들의 등·하굣길이기도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삶의 관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마을로 들어서자 도심 속 마을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가 감돈다. 빈 바람이 마을을 하릴없이 쓸고 지나가고, 옷깃을 꼭꼭 여민 거리의 사람들은 걸음을 재촉한다. 매축지마을 동쪽의 주택들은 재개발 결정으로 사람들이 이미 떠나고 빈집들만 남아 허허롭다. 곳곳에 빈 주택에서 나온 못 쓰는 가재도구들이 쌓여있고, 담벼락에는 재개발 과정에서 마을사람들간 의견충돌의 대자보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그런 와중에도 연탄은행 자원봉사들이 연탄을 집집마다 돌리고 난 후 밝은 얼굴로 헤어지는 참이다. 이곳은 아직도 연탄으로 겨울을 나는 집들이 대부분이다. 양지 녘에는 할머니들 몇몇이 옹기종기 모여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재개발로 뒤숭숭한 마을 분위기도 아랑곳없이 소소하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제2기 부산진매축 때 조성된 매축지마을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다(사진은 현재 매축지마을 전경).

▶ 제2기 부산진매축 때 조성된 매축지마을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다(사진은 현재 매축지마을 전경).




부산 매축사와 일제침략 산증인 

매축지마을. 말 그대로 바다를 매축해 뭍을 만들고, 그곳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도심 속 섬이랄까? 

모든 것이 1970년대에 멈춰버린 듯 도심과 동떨어진 지역이기도 하다.

매축지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부산 연안을 매축하면서 만들어진 지역 중 한 곳이다. 1902년부터 1945년 광복까지 부산 연안은 일제의 다양한 목적과 필요에 의해 곳곳에서 매축이 진행됐다.

일제는 1888년 부산해관 부지 매축을 시작으로 중앙동 지역 13만2천㎡를 1·2차에 걸쳐 매축한 북항매축공사(1902~19 08), 중앙동과 초량 사이의 영선산(일명 쌍산)을 헐어 정발장군 동상 앞까지 14만5천200㎡를 조성한 부산착평공사(1909~1912), 영도 대풍포 매축공사(1916~1926), 초량~범일동 99만㎡를 1·2기로 나누어 매축한 부산진매축공사(1913~1932) 등 부산의 해안을 광범위하게 매축했다.

매축지마을과 미군55보급창 일대는 1927~1932년 제2기 부산진매축 때 조성됐다. 자성대 인근 앞바다 52만8천㎡를 매축한 것. 1913년부터 부산진매축공사를 진행하면서 일제는 동구 초량동·수정동·범일동 일대와 남구의 우암동 적기 일부에 이르는 해안을 매축했다. 이 중 초량천 하구에 형성된 마을이 매축지마을이다. 일제강점기 중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일본군 병참기지가 있던 곳으로, 군수물자와 함께 말을 수용하던 마구간과 훈련장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부산항 북항 축항공사도 1936년부터 시작돼 매축지와 연계한 부산항 제3·4부두가 각각 1941년·1943년 완공됐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1936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부산항 제3기 축항 공사를 통해서다. 

부산항 제3·4부두가 완공되자 일제는 부전역을 거쳐 현재 부산시민공원(옛 하야리아부대) 자리에 소재했던 일본군 제72병참경비대까지, 우암선 철로를 통해 전쟁 물자를 실어 나르며 제국주의 침략의 본색을 가감 없이 드러냈던 것이다.




북항 제3부두는 일제의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1936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부산항 제3기 축항 공사를 통해 1941년에 완공됐다.

▶ 북항 제3부두는 일제의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1936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부산항 제3기 축항 공사를 통해 1941     년에 완공됐다. 




귀환동포와 피란민들의 거처

일제의 병참기지와 군수물품 야적장으로 활용되던 매축지는 일제가 패망하기 전 징용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임시막사로 건설됐다.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나 군수공장으로 끌고 가기 전 이곳에서 임시로 수용한 후 부산항 4부두를 통해 일본으로 보내려 했던 것.

임시막사가 채 건설되기도 전에 일본은 패망하는데, 이 자리에 외국에서 돌아온 귀환동포들이 얼기설기 임시거처를 만들어 살게 된다. 어떤 이들은 일본군 마구간을 나누고 개조해 살고, 뒤에 온 이들은 공터에 천막을 가설해 살면서 자연스럽게 매축지마을을 형성했다.

이들은 시대별로 조선방직·석탄부두 하역·국제고무 신발공장 등에서 생계를 유지하거나 마을에서 음식점·날품팔이 등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특히 조선방직과 신발공장에 다니는 여공들이 대거 이곳에 살면서 큰 마을을 이뤘을 때도 있었다. 매축지마을 남쪽지역(성남이로길)에는 아직도 당시 막사 형태를 유지한 건물이 줄을 이어 자리하고 있다. 두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힘들 정도의 골목을 사이에 두고, 16.5㎡ 정도의 집들이 마주 보고 있는 형태다.

집에 주방이 따로 없어 문 앞에 부엌을 만들어 세탁기·물통·빨래 등을 놓고 생활한다. 공용화장실도 많이 보이는데, 한때 마을 공중화장실이 90여 개나 되던 시절도 있었단다. 때문에 매축지마을에는 ‘2개(부엌·화장실)는 없고 3개(빈집·공중화장실·노인)는 많다’는 자조 섞인 말이 나돌기도 했다고.

지금은 대부분의 주민들이 나이 많은 어르신들로, 거의가 50~60년 이상 이 마을의 터줏대감으로 살아가고 있다. 큰 화재와 태풍 등으로 마을이 사라질 위기에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다시 일어났던 그들이다.

몇 년 전부터 영화 촬영지로, 아름다운 벽화마을로 널리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도심마을 재생단체가 마을과 주민을 위해 마을 환경개선과 주민 생활문화 향유 등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재개발 계획에 의해 마을 동쪽지역이 철거될 예정이고, 그 과정에서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마을 분위기가 어수선하기도 하다.





55보급창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군수물자를 보관했다. 1913년부터 부산진 매축공사를 진행하면서 일제는 동구 초량동·수정동·범일동 일대와 남구 우암동 적기 일부에 이르는 해안을 매축했다.

▶ 55보급창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군수물자를 보관했다. 1913년부터 부산진 매축공사를 진행하면서 일제는 동구 초     량동·수정동·범일동 일대와 남구 우암동 적기 일부에 이르는 해안을 매축했다. 




55보급창과 매축지마을의 화재

55보급창은 매축지마을 동편 범일5동 252번지에 위치한 미군 군수보급 창고다. 일제강점기 말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군수물자를 보관하기 위해 조성됐는데, 부산항 3·4부두에서 부전역과 하야리아부대를 잇는 일본군 군수품을 운반하던 우암선의 기종점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대부분이 임시 창고로 노천에 천막을 쳐 놓고 군수물자를 야적, 보관했다고 한다.

광복 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감만동 인근 강변의 일본군 군수품 보관창고를 터는 이들이 많았다. 미군 감시를 피해 철조망을 넘어 창고나 화차에 실려 있던 군수품을 훔쳐냈던 것. 이들을 ‘얌생이꾼’이라 했으며, 물품을 훔치는 일을 ‘얌생이 몰러 간다’고 했다. 얌생이꾼들의 주요 대상 물품은 일본군 군화였다고 한다.

1950년 8월 이후부터는 부산항으로 반입되는 미군 군수품을 일시 보관했다가 전국 미군부대로 보급하는 보급창 역할을 수행했다. 면적은 총 23만1천400㎡에 이르고, 기름 탱크·무기고·각종 장비 보관소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1954년에는 하천을 따라 55보급창 기름 탱크와 연결된 송유관에서 하천으로 새나간 기름에 담뱃불이 붙어 온 마을을 다 태웠던 적이 있었다. 당시 180여 명의 사상자를 낸 큰 화재로 마을 사람들은 또 한 번 절망의 나락을 곱씹어야 했다. 현재는 비어있는 이 55보급창에 대한 반환운동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이곳을 시민공원으로 조성하자는 여론이 번지고 있어 그 결과가 주목된다.



 


일제는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나 군수공장으로 끌고 가기 전 매축지마을에 임시로 수용한 뒤 부산항 4부두를 통해 일본으로 보내려 했다(사진은 매축지 가옥의 낡은 지붕).

▶ 일제는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나 군수공장으로 끌고 가기 전 매축지마을에 임시로 수용한 뒤 부산항 4부두를 통해 일    본으로 보내려 했다(사진은 매축지 가옥의 낡은 지붕). 




새로 써야 할 부산의 매축사 

부산진역 인근의 동부경찰서 마당에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부산진 매축비’가 있다. 이 비는 부산진 매축에 관여한 일본 나고야 지역의 자본가들이 부산진 매축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다. 빗돌은 나고야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주선기업주식회사가 1913~1937년에 걸쳐 총 132만㎡의 부산진 일대를 매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부산진에서는 1913~1932년 1·2기에 걸쳐 모두 99만㎡가 매축됐다. 나고야 자본가들은 1913~1917년 진행된 제1기 매축 때 이중 42만9천㎡를 주도적으로 매축했다. 이후 조선방직이 들어서자 제2기 공사에 속하던 영가대 앞 노른자위의 땅 3만3천㎡를 추가로 매축했다. 이처럼 일제는 일제강점기를 통해 조선인의 노동력을 헐값으로 이용, 이익을 챙겼다. 이도 모자라 잘못된 사실을 영구적으로 빗돌에 새겨 그들만의 역사로 남겨놓은 것이다. 강제징용 역사에 대한 일본의 태도가 논란인 요즘, 부쩍 이 빗돌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슴 아픈 역사 반복 없어야

기록에 의하면 매축공사에 동원된 인력은 조선인과 중국인·일본인들로 그중 조선인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품삯은 일본인의 절반, 중국인의 3분의 2 수준으로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목숨을 걸고 매축공사에 참여했던 것이다. 부산의 매축지는 일제 자본에 의해 강제된, 부산 수탈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공간이다. 이곳의 모든 개발에 동원된 인력은 대부분 조선인이라는 점, 조선인이 불합리하고 위험한 노동환경에서 착취당했으며 이로 인해 많은 희생을 했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최근 일제강제징용피해에 대한 법원 판결에 이목이 집중된다. 사안의 최대 쟁점은 청구권협정에 따라 강제징용 피해자(원고)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됐는지 여부다. 분노를 사는 것은 일본의 이중성. 일본은 중국에게는 합의금을 지급하라고 한 반면, 국내 기업에게는 화해에 응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사과나 반성은커녕 피해자를 차별하는 파렴치한 반응이다. 인류적 양심에 반하는 태도다.

강제징용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분명한 역사왜곡이다. 일본 기업뿐만 아니라 일본정부 차원에서도 이제는 과거 범죄에 대한 사과를 해야 한다. 법적 배상은 물론이다.

매축지 마을을 나서며 무거운 마음으로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을 떠올려 본다.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작성자
최원준
작성일자
2018-12-12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부산이야기 12월호 통권 146호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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