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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

영주동 산복도로를 비추는 낮고 겸허한 달빛

산복도로 첫 문화공간 …삶과 함께하는 인문학 긴 호흡으로 보여줄 터

내용

중구 영주동 산복도로를 오르며 겸손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영어로 겸손(humility)이라는 단어는 그 어원이 흙(humus)이라고 한다. 겸손이라는 말이 흙에서 왔다는 것은, 겸손의 태도 혹은 경지가 흙과 같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흙은 가장 바닥에 있다. 모든 것을 받아준다. 심지어 썩은 것도 받아내 정화시키는 힘이 있다.
 산복도로에서 겸손의 의미를 떠올린 건 비탈길에 빼곡한 `사람의 집' 때문이다. 산비탈에 `사람의 집'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개항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두에 일자리를 찾아 들어온 외지인들이 산비탈을 따라 올라가며 판자촌을 짓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동래에 별장을 짓고 온천을 개발하는 등 식민자본에 의한 땅 투기 바람이 불었고, 거기에서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은 이곳 산비탈에 깃들었다. 6·25전쟁 때는 피란민들이, 전쟁이 끝난 뒤 산업화 시대에는 가난한 이농민들이 산동네를 찾아들었다. 부산항을 내려다보고 있는 천마산, 아미산, 보수산 등 일명 금정산맥을 따라 산비탈에 `사람의 집'들이 생겨났고, 실핏줄같이 이어진 길이, 그 길들을 연결하는 도로가 생겨났다. 그 길이 산복도로이다. 산비탈은 삶에 떠밀려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기꺼이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모든 것을 받아내는 `겸손'의 힘으로 산비탈을 찾아든 사람들을 살려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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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당 달리와 달리미술관은 영주동 산복도로에 처음 생긴 인문학 공간이자 문화공간이다.



산복도로는 한때 가난의 상징이었다. 비탈에 위태롭게 서 있는 집만큼 사람들의 삶도 위태로웠다. 하지만 지금의 산복도로는 가장 부산다운 부산, 진정한 부산의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상징된다. 개항기에는 거친 외세에 바람막이가 되어주었고, 전쟁 때에는 이방인들도 너끈히 품어 안은 도시라는 것을 산복도로는 보여준다. 최근 산복도로라는 공간을 새롭게 보고 지키고자 하는 바람이 불고 있다.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과 원도심 재생사업으로 불리는 것들이 그것이다. 과거의 누추한 기억을 버리지 않고, 그것의 현재적 가치를 되살리고 재해석하는 작업인데, 거기에는 각종 문화와 인문학 공간이 한몫을 한다.



원도심 인문학 플랫폼으로 부상

 영주동 산복도로에 `인문학당 달리'(중구 영주로 68)가 자리 잡은 것은 어쩌면 필연이다.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이행봉 교수, 동아대 국제학부 원동욱 교수, 소장 영문학자 박선정 씨 등 인문학자들이 모여 `인문학당 달리'를 만들었다. 그들이 가진 인문학적 자산을 나누기 위해서였다.부산의 동쪽인 신도심 지역에는 경제적 풍요로움과 함께 인문학을 즐기는 계층이 많다. 상대적으로 원도심은 소외되고 침체되어 있었다. `달리'는 원도심 인문학 플랫폼을 꿈꾼다. 지역주민은 물론 인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인문학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포부다. 인문학이라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가치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탐구하는, 보통 사람들의 보편적인 학문이라는 것을 알리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삶의 빛이 된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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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당 달리 강독모임은 매주 한 차례씩 모여 소리 내어 책을 읽고 토론한다.


 `인문학당 달리'는 중구 영주동 산복도로에 있는 50년 된 낡은 주택을 단장해 2018년 연말께 문을 열었다. 약 일 년 후에는 달리미술관도 잇달아 개관했다. 신선대·감만·자성대부두 등이 훤히 보이는 영주동 언덕배기 낡은 건물에 자리 잡은 `인문학당 달리'와 `달리미술 관'은 마을이 생긴 후 처음 들어선 인문학 공간이자 문화공간이다.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 공간에서 많은 일이 이뤄졌다. 시인·소설가 북 콘서트와 저명인사 강연, 사진가와 화가의 특강이 있었고, 음악가의 연주회도 열렸다. 정기 모임으로 주부, 직장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강독회를 연다. 철학, 고전 등 인문학 서적을 읽는데,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면서 소리 내어 읽는다. 소리 내어 읽음으로써 공부뿐만 아니라 치유의 효과까지 얻는다고 한다.



강독·기행·전시 등 다양한 활동

 공부는 학당 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소요유'라는 이름의 기행도 진행한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서 이름을 가져온 인문기행이다, 그 뜻처럼 얽매임 없이 자유롭고 느긋하게 여행을 한다. 역사와 이야기가 있는 곳에서 보고, 듣고, 배운다.
 첫 기행은 2019년 1월 시작했다. 이행봉 교수, 박선정 소장, 원동욱 교수가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갈 기회가 생겼다. 이들은 미국행을 소요유로 바꿨다. 일과 놀이의 융합이자 삶 속에서 소요유를 실현하는 실험과 도전을 감행했다고 할까.

 세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인문학당 달리'의 새로운 미래를 발견한다.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 MOMA)이 그것이다. 1800년대부터 닭 도살장으로 사용되던 곳이 지역을 대표하는 예술공간으로 재탄생한 사례를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죽음의 공간이 문화예술을 통해 삶의 공간으로, 전복과 새로운 재생의 공간으로 거듭난 생생한 사례를 본 이들은 달리에도 문화공간을 만들자고 결의했다. 비어있던 지하(실제로는 1층이지만 산복도로의 가파른 경사는 지하층으로 보이게 한다) 공간을 단장해서 달리미술관으로 변모시켰다.
 달리미술관은 여느 갤러리와도 확연하게 공간 구성이 다르다. 기존의 벽체를 헐어내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디자인하여 공간을 구획했는데,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과 같다. 상업성을 배제하고 신인 작가를 발굴한다든가, 공유할 수 있는 가치가 있는지에 중점을 둔 큐레이션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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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된 낡은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달리미술관.


 갤러리가 문을 열자 동네 이웃들이 찾아들었다. 평생 한 번도 갤러리에 가보지 못한 할머니가 전시를 보고는 `이런 미술 전시장은 부자 동네나 시내 중심에만 있는 줄 알았다'며 즐거워했고, 갤러리에 가고 싶어도 쉽사리 엄두를 못내던 주부, 전시회에 관심이 없었던 중년 남성들도 갤러리를 찾고는 행복해했다.
 갤러리를 시작으로 `달리'는 이웃 주민들과의 소통을 적극 시도한다. 학부모 대상 인문학 강좌는 물론 청소년들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을 가지고 있는 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청소년문화해설사' 과정이 그것인데, 산복도로를 중심으로 지역 역사와 문화를 영어로 해설할 수 있는 과정을 개설할 예정이다. 그것을 통해 청소년들이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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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미술관 가파른 계단. 산복도로에 흔한 계단은 산 아래 동네와 산복도로를 연결하고 소통시킨다.

계단을 따라 새로운 세상이 만나고 섞이는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인문학당 달리와 달리미술관이 그 중심에 있다.



공부하고, 나누고, 실천한다

 달리를 찾은 날, 마침 강독회가 있었다. 문을 열자 향긋한 나무 향기 속에 글 읽는 소리가 낭랑했다. 문자향 서권기(文字香書卷氣)의 현대적 느낌이다. 신영복 선생의 `담론' 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귀를 열고 듣던 중 공평하고 차별 없이 사랑하라는 묵자의 `겸애설'이 귀에 들어온다. 그것이 산복도로의 역사에서 보듯, 땅처럼 낮아져 모든 것을 받아주는 겸손의 경지가 아닐까.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리라.
 달리. `달을 담은 물항아리'의 약자이면서, `달리' 보고 생각하자는 의미이기도 하고, 이로써 `이치에 도달하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산 지역의 인문학 연구자들이 함께 논의하고 연구하는 공간으로서의 `달리'뿐만 아니라, 앎을 행하고, 나누는 공간으로서의 `달리'에서 산복도로의 미래를 본다. 진리의 달빛을 담은 물항아리가 넘쳐흘러 촉촉이 적시는 날을. 인문학당 달리 (051-467-2004)


                                                                                                                                                      글 김진·사진 권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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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

 동화작가. 글과 책에 매혹되어 기자,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했다. 200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우리 동네 마루'로 등단, 제3회 열린아동문학상을 받았다. 펴낸 책으로 `럭키 파트라슈', `노래하는 여전사 윤희순', `외뿔 고래의 슬픈 노래' 외 여러 권이 있다. 현재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부산에서 삶의 터전을 새롭게 일구고 있다. 부산의 매력에 빠져 언젠가 부산과 부산 사람을 소재로 한 글을 쓸 생각이다.




                                                                                                                        기획 · 진행 ·  편집  김영주_ funhermes@korea.kr


 

김영주 기사 입력 2020-02-04 다이내믹부산 제202002호
자료출처 : 다이내믹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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