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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에도 서늘했던, 좌천동 방공호

부서명
문화유산과
전화번호
051-888-5097
작성일
2026-10-29
조회수
6
내용



한여름에도 서늘했던, 좌천동 방공호


희석(작가)



택시 앱을 열어 ‘좌천동굴’을 입력하고 기다렸다. 멀리서 다가오는 택시. 문을 열며 인사하고 좌석에 앉자마자 기사님이 묻는다.


“좌천동굴 가는 거 맞지요?”

“네, 맞아요.”

“이야~ 여기가 아직도 있나보네.”


단순히 목적지만 확인하는 질문인 줄 알았는데, 순간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평소라면 적당히 대답하고 말았겠지만, 기왕 미래유산을 찾으러 가는 길인 만큼 이번엔 내가 질문을 던졌다.


“기사님, 여기 잘 아시나 보네요?”

“알다마다! 여기 아구찜 파는데 있었다 아입니까. 와이프랑 연애할 때 함 가봤는데 뭐 맛은 그럭저럭인데 억수로 신기하다케가 와이프 데리고 갔지예.”

“혹시 가게 이름이 동굴집 아니에요?”

“동굴집... 글쎄 가게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네예. 그것도 한 20년도 더 됐지 뭐.”





달력을 얼추 맞춰보니 기사님 증언이 정확했다. 지금 부산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좌천동굴은 과거 ‘동굴집’이라는 주점이었다. 굴 안에서 아귀찜과 파전에 막걸리를 팔았고, 30년 가까이 동네 명물로 통했다. 2009년에 문을 닫았으니 기사님은 그전에 그곳에 추억을 남기고 온 산증인이었다.


“기사님 그러면 거기 어땠어요? 아구찜 가게?”

“뭐 시원~했지요. 여름에 가도 서늘하다 카니까 갔지. 와 옛날에는 에어콘도 쉽게 몬 틀었으니까 와이프도 신기해했지.”


부산미래유산으로 가는 길 자체가 미래유산의 연장선 같았다. 기사님과의 대화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잘 구경하시라는 말과 함께 택시에서 내리자, 눈앞에 커다란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길가를 따라 돌 블록을 쌓은 축대가 낮게 이어지고, 그 위로 회색 비탈이 높이 솟아 있다. 비탈에는 흰 고리 모양 장식이 전선을 따라 줄지어 박혀 있고, 중턱에 두른 철망 울타리를 담쟁이가 타고 오른다. 비탈 꼭대기에는 집들이 얹혀 있다. 분홍 벽의 이층집, 노란 집, 붉은 벽돌집. 아래쪽 축대에는 색유리를 짜 맞춘 그림판들이 비스듬히 붙어 있다.






입구는 축대 한가운데 있다. 바위 모양을 본뜬 틀 위에 ‘좌천동굴’ 간판이 붙었고, 그 아래 아치형 나무 문 두 짝이 활짝 열려 있다. 문 앞에는 안내원이 앉는 노란 플라스틱 의자가 하나 놓였다. 열린 문 옆 바위 틀에는 손바닥만 한 파란 명판, 부산미래유산 좌천동 방공호가 자리하고 있다.


좌천동굴은 따지고 보면 이름이 두 개다. 동네가 부르는 이름은 좌천동굴이고, 부산시가 붙인 이름은 좌천동 방공호다. 하나는 이곳의 생김새를, 하나는 이곳의 역사를 증명한다.










방공호는 공습을 피하려고 땅속에 판 굴이다. 이 굴은 태평양전쟁(1941~1945) 때 미군의 공습과 상륙에 대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굴 안 안내판은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해 판 굴이라고 알리는 중이다. 하필 좌천동에 판 까닭은 가까운 부산진역에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일본군 물자가 실려 나가던 역이었고, 그만큼 공습 위험이 컸다.


부산 원도심에는 이런 굴이 곳곳에 뚫렸다. 보수동, 동광동, 초량동, 범일동. 부산에 살던 일본인 관료와 학생, 군인들이 피할 자리였다. 굴은 주로 일본인 학생이 많이 다니던 학교 근처에 팠다. 산을 깎아 굴을 낸 뒤 흙을 덮고 나무를 심어 하늘에서 보이지 않게 가렸다고 한다. 모두 몇 개를 팠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남은 기록이 거의 없고, 많은 굴이 도시가 커지는 동안 묻히거나 막혔다. 이 굴도 원래 입구가 다섯 개였다. 봉생병원 쪽에 있던 셋은 아파트를 지으면서 막혔다. 남은 둘이 지금 골목에 나란히 선 두 입구다.









굴 안쪽으로 한 걸음 들이자 공기가 달라졌다. 바깥은 10월 한낮인데 안은 서늘하고 축축했다. 입구 쪽 통로는 벽의 결을 매끈하게 다듬어 놓았다. 바닥에는 넓적한 돌판이 깔렸고, 벽과 바닥이 만나는 가장자리를 따라 물기가 가늘게 번져 있다. 벽에 매단 조명 아래로 통로가 곧게 뻗고, 그 끝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온다.









통로 중간에 안내판이 서 있다. 왼쪽에는 ‘좌천동굴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방공호로 추정된다’, 오른쪽에는 ‘좌천동굴은 6·25전쟁 시기의 피난민 임시거주지였다’라고 크게 적혔다.


해방되고 5년 뒤 전쟁이 났다. 안내판에 따르면 전쟁 직전 40만 명 남짓이던 부산 인구는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으로 100만 명 가까이로 불었다. 영주동, 동광동, 대청동, 보수동, 청학동 산비탈마다 판잣집이 들어섰고, 용두산은 판잣집으로 숲을 이뤘다. 마실 물이 없어 잠긴 수도꼭지 앞에 양동이를 세워 두고 하염없이 기다렸고, 하루에도 몇 건씩 난 불이 가진 것을 송두리째 태웠다.









그래도 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이런 굴로 모여들었다. 바위로 된 굴은 불에 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3년 부산역 앞에 큰불이 났을 때 판자촌의 피란민들은 동광동의 방공호로 피해 목숨을 건졌다. 굴 안에 칸막이를 치고 여러 가구가 함께 살았다고 주민들은 기억한다. 일본인을 지키려고 한국인을 시켜 판 굴에,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살림을 들였다.










더 들어가면 붉게 칠한 철제 아치가 일정한 간격으로 천장을 받친다. 아치 위로는 철망을 덮었고, 첫 아치에 ‘머리조심’ 경고판이 붙어 있다. 철망 너머로는 깨 낸 바위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결이 날카롭고, 군데군데 누런 물때가 앉았다. 아치 하나에는 ‘내부가 어둡고 미끄럽습니다’라는 종이 안내문이 케이블타이로 묶여 있다.









‘추억의 주막, 좌천동 동굴집’이라는 안내판에 사진이 두 장 붙어 있다. 한 장은 골목에서 찍은 가게 앞모습이다. 건물 1층에 ‘구.동굴집’이라는 간판이 걸렸고, 건물 뒤로 바위 비탈이 보인다. 다른 한 장은 굴 안이다. 울퉁불퉁한 바위 천장 아래 비닐을 둘러치고 탁자와 의자를 놓았다.


2007년 한 신문 기사를 보면 그 무렵 이 골목에는 동굴집이 두 곳이었다. ‘원조 동굴집’과 ‘구.동굴집’. 간판 두 개가 서로 원조라고 맞섰다. 원조 동굴집 주인은 할머니였고, 막걸리를 잔으로는 팔지 않고 주전자째 냈다고 한다. 안내판 사진 속 간판이 그중 한 집이다.








이곳으로 올 때 대화를 나눴던 택시 기사님 말처럼 에어컨이 없어도 여름에는 굴 안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나왔고, 겨울에는 난로를 피우지 않아도 춥지 않았다고 한다. 동굴집은 2009년에 문을 닫았다. 앞길을 넓히는 공사가 시작되면서 굴 앞의 가게 건물이 헐렸고, 맨살이 드러난 비탈에 축대벽이 섰다. 벽은 굴 입구까지 통째로 덮어서 여기에 동굴이 있었다는 것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좌천동굴을 다시 연 것은 주민들이었다. 좌천동 주민협의회가 2014년 정부의 역사마을 만들기 공모에 동굴 복원을 제안했고, 사업에 뽑혔다. 결국 2017년, 닫힌 지 8년 만에 다시 열렸다. 입구 옆 안내판은 이 굴을 ‘동굴집’의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주민협의회 등 공동체의 노력으로 새롭게 조성했다고 적었다.









가장 깊은 곳까지 허리를 숙여 걸어가면 ‘막걸리, 알고 마시면 더 맛있다’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막 걸러 마신다고 해서 막걸리라는 것, 탁주나 농주로도 불렸다는 것, 물을 빼면 영양이 풍부하다는 것. 옆에는 막걸리 빚는 과정을 그린 그림과 전국 막걸리 지도가 붙어 있다.









안내판 옆은 나무 문 두 짝으로 닫혀 있다. 아까 안내판에서 봤던 ‘동굴의 또 다른 입구’로 추정된다. 안에서 열 수 없으니 조금 더 구경하다가 바깥에 나가서 확인하기로 했다.







좌천동굴 내부에는 푸른 조명 구간도 있다. 바닥 가장자리를 따라 흰 전구 줄이 이어지고, 천장에는 야광 별이 붙어 있다. 벽에는 여러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푸른빛을 받아 그림만 희미하게 떠오른다.










들어간 문으로 되돌아 나왔다. 입구 쪽으로 걸어가자 열린 문 너머 햇빛 속에 안내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들어간 지 10분. 굴을 다 도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외부로 나오면 아까 막걸리 안내판 옆에서 닫혀 있던 그 입구를 볼 수 있다.










오래전부터 장사를 이어오던 동굴집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굴 속 식당이 이 동네에서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좌천동굴에서 1km쯤 떨어진 범일동 골목에 용꿈이라는 해물찜 집이 있다. 대표 메뉴가 아귀찜이고, 가게 안쪽이 동굴이다. 내친김에 걸어가 보았다.






들어간 문으로 되돌아 나왔다. 입구 쪽으로 걸어가자 열린 문 너머 햇빛 속에 안내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들어간 지 10분. 굴을 다 도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외부로 나오면 아까 막걸리 골목을 몇 번 꺾고 보니 정공단 바로 옆이었다. 회색 벽돌 담에 금빛 판이 걸려 있고, 그 위에 붓글씨로 ‘용꿈’이라고 썼다. 나무 대문 두 짝에는 빗장이 걸려 있었다. 문 옆에 ‘OPEN’ 팻말이 걸려 있었지만,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오후 4시부터 10시까지라고 적혀 있었다. 아직 문을 열기 전이어서 발걸음을 돌렸다.

안내판 옆에서 닫혀 있던 그 입구를 볼 수 있다.








좌천동굴은 누군가를 지키려고 판 굴이다. 처음에는 공습을 피할 일본인을 위해 팠고, 전쟁 때는 피란민의 집이 되었다. 동굴집 시절에는 연애하던 택시 기사님 같은 동네 사람들의 여름을 식혀 주었다. 지금은 여름이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들어온다. 지키는 대상은 시대마다 바뀌었다.


좌천동굴은 2023년 ‘좌천동 방공호’라는 이름으로 부산미래유산이 되었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10시에서 오후 4시까지 누구나 들어가 볼 수 있다. 입장료는 없고, 한 바퀴 도는 데 10분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