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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의 청춘에게, 박재혁의사 유적

부서명
문화유산과
전화번호
051-888-5091
작성일
2026-09-28
조회수
28
내용



스물일곱의 청춘에게, 박재혁 의사 생가터



희석(작가)






솔직한 고백 먼저 하고 가자면, 박재혁이라는 이름은 생소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조차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의 생가터를 방문하기 위해 부산미래유산 소개글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됐다. 모르면 안 되는, 우리 역사에 정말 중요했던 사람인데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 의문을 안고 좌천동으로 향했다.





지하철 좌천역 7번 출구로 나오면 가구 전문 매장이 줄을 잇는다. 큰길 건너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좌천동 가구거리가 펼쳐져 있다. 소파와 침대와 장롱을 파는 가게들을 지나 사이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면 ‘가구거리 공영주차장’이 나온다.







나무색 판자로 외벽을 두른 2층짜리 주차장이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램프가 비스듬히 걸려 있고, 입구 위에 OUT과 IN이 크게 붙어 있다. 주차장 너머 언덕 위에선 동구도서관의 둥근 건물이 내려다보고 있다. 놀랍게도 이곳이 박재혁 의사 생가터다.







180cm가량의 알림판은 말하고 있다. 이곳이 박재혁 의사의 생가터였다고. 생가가 보존돼 있는 것도 아니고, 터가 보존돼 있는 것도 아니다. 상업용 주차장이 그 위에 아무렇지 않은 듯 운영되고 있었다.


박재혁 의사는 1895년 5월 17일, 박희선과 이치수의 1남 1녀 중 3대 독자로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 상업학교를 다니면서 좌천동과 범일동 친구들과 조선 역사책 동국역사를 등사해 나눠 주고 비밀결사 구세단을 만들었다가 붙잡혀 고문을 당했다.


그 후 1920년 상해에서 의열단에 들어갔고, 일본이 만든 식민지 도시 부산의 심장부와도 같은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일본인들을 경악시켰다. 의열단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던 박재혁 의사지만, 그를 향한 역사적 평가는 박했다. 이 생가터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알림판의 문구를 읽는 동안 주차장에서 차가 들어가고 나갔다. 차를 대러 온 사람과 찾으러 온 사람도 수시로 지나갔다. 그 누구도 박재혁의 업적을 읽지 않았다. 그럴 만했다. 나도 그를 이제야 알았으니 말이다.


박재혁 의사 생가터는 여전히 민간 소유다. 복원 논의는 있었으나 계속 난항을 겪었다고 한다. 주차장 앞 알림판은 2020년, 투탄 100주년에 유가족의 요청을 동구청이 받아들여 세운 것이다. 부산에서 같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중 안희제는 1995년에 기념관이, 박차정은 2005년에 복원된 생가가 생긴 것과 비교하면 초라하다.








살펴볼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서, 차라리 박재혁 의사의 거사 당일 행적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러 가던 날, 박재혁 의사는 위 사진 속 거리를 걸어 정공단까지 향했다.








정공단은 임진왜란 첫 전투에서 순절한 부산진 첨사 정발을 모신 제단이다. 긴 돌계단 끝에 단청을 올린 문이 서 있고, 문짝에는 태극 문양이 크게 그려져 있다. 문이 열려 있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1920년 9월 14일 아침, 박재혁 의사는 동지 오재영과 함께 이 작은 문을 통과했을 것이다. 재단으로 향하는 이 문을 지나면 아래와 같은 장면을 볼 수 있다.








박재혁 의사는 이미 오재영 동지에게 부산경찰서 투탄 계획을 밝혀놓았다. 그 후 오재영에게 가족을 부탁하고 친지에게 피해 가지 않도록 단독 책임을 약속했다. 두 사람은 정공단 재단에 서서 참배했고, 곧바로 헤어졌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박재혁 의사와 친구들은 정공단 일대에서 자랐다. 부산진교회, 일신여학교가 이웃해 있었는데, 이 일대는 이른바 서양 문물과 근대 교육과 항일이 한 동네에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원래 정공단 내에 박재혁 의사의 비석도 세워졌으나, 1981년 부산진초등학교로 옮겨 갔다.

다만, 그의 비석이 옮겨졌다는 사실을 적어 둔 표지는 없다. 안내판은 정발과 임진왜란만 말한다.








재단 앞에서 잠깐 고개를 숙이며 그를 추모했다. 그 사이 계단 아래에서 발소리가 나더니 아이 하나가 보호자 손을 잡고 올라왔다. 아이는 잔디밭과 비석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1분도 안 돼 엄마를 재촉했다.


“에이 아무것도 없잖아! 나갈래!”


정공단의 목적이 박재혁 의사를 추모하는 데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항일 운동의 시초격인 그가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는 사실을 알렸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없다’며 불평하던 어린이에게 만약 박재혁의 존재를 알렸더라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을 잠시 접고, 이제 지하철로 이동해야 했다. 그날 정공단을 나선 박재혁 의사는 최천택을 만나 전차를 탔다고 한다. 둘은 부산경찰서가 있던 용두산으로 향했다. 나도 지하철을 이용해 그곳으로 떠났다.








약 20분 만에 도착한 옛 부산경찰서 터는 용두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에 있다. 사진으로 볼 수 있듯이 현재 이 자리에는 상가 건물이 서 있다. 1층은 식당, 2층은 노래방과 유흥주점, 3층은 라이브 바, 4층은 또 노래방. 간판이 건물 절반을 덮었다. 한낮의 골목은 조용했다. 마치 이곳에서 역사적 사건이라고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거사 당일 박재혁 의사는 최천택과 함께 용두산 공원에 올라가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아마도 박재혁 의사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 것이다. 당시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가 고서적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박재혁 의사는 중국 고서 상인으로 위장해 경찰서로 진입했다. 손바닥만 한 폭탄을 고서 사이에 숨겨서 말이다.








최천택은 진입하는 박재혁 의사와 경찰서 동태를 용두산 공원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100년도 넘게 지난 지금은 나무가 울창해 시야각이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추정컨대 위 사진 속 어딘가였을 것이다.


박재혁 의사는 서장실에서 보자기를 풀어 책을 설명하다가 폭탄을 꺼내 들었고, 자신이 의열단임을 밝히고 일제의 조선 침탈을 꾸짖은 뒤 던졌다. 경찰서 일부가 부서지고 서장은 중상을 입었다. 의열단이 처음으로 성공한 의거였다. 일본 신문은 동경 한복판에 폭탄이 떨어진 것과 같다고 썼다.


부산경찰서 터 계단 앞 안내판이 당시를 기록하고 있다. 이 경찰서는 의열단이 정한 다섯 파괴 대상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박재혁 의사는 다리를 다친 채 그 자리에서 붙잡혔다. 그가 경찰서에서 나오지 않자 최천택은 좌천동으로 달려갔다가 40분 뒤에 붙잡혔다. 오재영은 토론회 자리에서 체포되고, 박재혁의 어머니와 누이도 그날 붙잡혔다. 그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혼자 한 일이라고 진술했고, 친구들은 모두 풀려났다.








이듬해 3월 31일 사형이 확정됐으나, 그는 왜적의 손에 죽기 싫어서 단식으로 목숨을 끊었다. 결국 같은 해 5월 11일, 박재혁 의사는 대구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고작 스물일곱이었다.


좌천동 공동묘지에서 치른 장례에는 가족 다섯 명만 허락됐다. 동아일보는 그의 죽음을 ‘대구에 수감 중인 박재혁은 병사’라는 제목으로 전했다. 그의 시신은 최천택이 박재혁의 노모와 함께 대구형무소로 가서 인수해 부산 고관정거장으로 도착했다. 해방 이듬해 2월, 김원봉이 부산에 와서 제를 올렸고,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박재혁 의사의 무덤은 1966년 서울 국립현충원으로 옮겨졌다.









다시 그의 생가터를 바라본다. 과연 이것이 스물일곱에 자신의 몸을 던져 항일 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에게 걸맞은 추모인가. 박재혁 의사가 알림판 하나로 끝내도 ‘괜찮은 정도’의 인물인가.


많은 사료에서는 박재혁 의사의 의거 성공을 도화선으로 부른다. 당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의열 활동을 통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가 기억하는 경찰서 폭파는 조선총독부 폭파, 종로경찰서 폭파 등 이른바 서울에서 이뤄진 거사들이 대부분이다.


박재혁 의사의 투탄이 없었다면 조선총독부 폭파도, 종로경찰서 폭파도 없었을지 모른다고 나는 감히 말해본다. 그런 그가 태어난 자리는 상업용 주차장이 되었고, 폭탄을 던진 자리는 유흥지가 되었다.


스물일곱의 청년이 죽음을 향해 자진해서 나아갔으나, 역사가 보답한 결과는 지금과 같다. 늦었지만, 스물일곱의 청춘에게 미안함과 존경심을 담아 추모를 보낸다. 오늘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게 해준 열사에게 우리의 처우는 과연 온당한가, 자꾸만 묻게 되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