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천사들을 품는 곳, 한형석 자유아동극장
희석(작가)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 아이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부모를 잃은 아이, 학교를 잃은 아이, 거리에서 신문을 팔고 구두를 닦으며 하루를 버티던 아이들을 역사는 좀처럼 조명하지 않는다. 하루하루의 생존이 전부인 환경에서 아이들은, 그리고 돌봄이 필요한 존재들은 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기 때문이다. 1953년의 부산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달랐다. 그는 폐허가 된 거리, 부민동 언덕에 극장을 세웠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들을 위한 극장이었다.
“암담한 거리에서 방황하는 천사에게 활기 있는 광명의 앞길을 선도하여 이 민족의 병든 새싹에게 ‘비타민’이 되기를.”
극장 설립 취지문에 적힌 문장이다.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을 그는 천사라 불렀다. 낮에는 영화와 인형극을 보여주고, 밤이 되면 같은 자리에서 글을 가르쳤다. 입장료도 수업료도 없었다. 그의 이름은 한형석. 총 대신 노래로 싸운 독립운동가로 불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 전용 극장을 만든 사람이다. 그 흔적을 직접 느끼려 ‘한형석 자유아동극장(이하 자유아동극장)’을 찾았다.

자유아동극장은 언덕 위 변전소 옆에 있다. ‘먼구름 한형석 길’이라는 표지판을 따라가면 붉은 벽돌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엔 극장을 방문한다고 해서 휘황찬란한 모습을 상상했는데, 실제로 마주한 자유아동극장은 반대였다. 낮고 넓은 곳, 조용히 동네에 머무는 곳이라는 게 외관에서도 느껴졌다.


높은 언덕을 올라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자유아동극장을 보고 있으니 꼭 지붕이 하늘에 닿은 것만 같았다. 이 날씨에 저 높이까지 어찌 오르나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엘리베이터가 눈앞에 있었다. 버튼을 누르고 타려다가 잠깐 멈칫했다. 지난 역사를 품은 곳을 찾았는데, 오르는 방식도 과거와 비슷해야 정확한 감상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엘리베이터를 포기하고 계단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돌린 시선에 나타난 건 이곳이 엄연히 극장이라는 걸 알리는 상영표였다.

# 한유한이라는 이름으로
한형석에게는 한유한(韓悠韓)이라는 이름이 하나 더 있었다.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하며 쓴 이름으로, 그가 지은 군가도 광복군가집도 모두 이 이름으로 나왔다. 1910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난 그는 여섯 살에 중국으로 건너가 의료 활동을 하던 아버지 한흥교와 살았다. 1927년 아버지가 홀로 귀국하자 그는 타국에 남겨졌다. 외로울 때면 아버지가 두고 간 고향의 흙 한 줌과 태극기를 꺼내 보았다고 한다.

“음악을 통한 예술구국을 하라.”
스승의 한마디가 그의 삶을 결정했다. 음악을 배운 그는 광복군 제2지대 예술조장이 되어 군가로 광복군의 사기를 드높였다. 아이들을 처음 품은 곳도 부산이 아니었다. 1940년 시안의 한 보육원에서 전쟁고아들을 위해 동화가극을 지었다. 거리의 아이를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은 그곳에서부터 자란 것이다. 33년 만에 귀국한 그는 문화극장을 되살렸으나 한국전쟁으로 모두 잃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1953년 8월 15일, 부민동 판잣집 뒤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 전용 극장 자유아동극장이 태어났다.


지금의 모습은 그때와 많이 다르지만, 설립 취지문의 뜻만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취지문은 제네바 선언, 미국의 아동헌장, 일본의 아동헌장을 차례로 짚는다. 세계가 합의한 아동 권리의 기준을 이미 의식하고 있던 한형석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마냥 기다릴 수 없어 뜻 맞는 몇몇의 힘만으로 첫발을 뗀다고 밝혔다. 마땅히 나라가 했어야 할 일을 한 개인이 떠안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 시절이 아이들을 어떻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낮의 극장은 성황이었다. 명작동화를 각색한 영화와 아동극, 인형극이 하루 세 차례 올랐다. 미공보원에서 받은 영화들과 〈유관순전〉, 〈안창남 비행사〉같은 한국 영화가 상영되고, 인형극 〈박첨지의 행복〉이며 그림극 〈흥부와 놀부〉가 아이들의 눈과 귀를 붙들었다. 2년간 연 146일, 수백 회의 공연에 12만여 명의 아이들이 다녀갔다. 입장료는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다.

복원된 자유아동극장의 핵심은 2층의 ‘아동극장’이다.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둥글게 두른 160석 객석이 무대를 감싼다. 70여 년 전 긴 나무 의자에 아이들이 빼곡히 들어차 영화를 보던 그 자리가, 지금은 어엿한 공연장이 되어 같은 일을 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예상보다 큰 규모의 원형 극장이 펼쳐졌다. 객석이 별도로 촘촘히 세워진 게 아니라, 성인 기준 정강이 높이의 단차가 계단처럼 차곡차곡 오르는 형태다. 자유 분방한 어린이들이 앉고 싶은 대로 앉을 수 있도록 배려한 디자인이 돋보였다. 푹신한 쿠션에 앉아 연극, 영화, 그밖의 여러 공연을 볼 수 있는 형태다.
극장 안을 크게 한 바퀴 빙 둘러서 걸어봤다.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있어도 무대의 사각지대가 별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게 신기했다.
아마 성인에 맞춰 소극장 형태로 리모델링했다면 분명히 이 극장의 주 관람층인 어린이들이 불편했을 것이다. 긴 나무 의자에 앉았던 과거의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세심하게 설계했다는 게 금방 느껴졌다.


공연장 바깥에는 ‘모래로 만드는 세계’라는 샌드 아트 체험 공간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형태의 샌드 아트와는 달리, 모래 위를 직접 비추는 영상이 실시간으로 상영된다. 그 아래 쌓인 모래를 쌓거나 흩트리며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방 안에는 두 곳의 체험 공간이 있고, 각 체험 공간에는 도마뱀, 그리고 산과 들의 모습이 상영된다.
실제로 방문한 날에 한 어린이와 보호자가 즐겁게 체험하고 있었다. 한창 집중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방해할 수 없어 얼른 관찰만 하고 빠르게 나왔다. 신발까지 벗어 던지고 열심히 모래를 쌓고 무너뜨리던 어린이의 웃음 소리가 2층 공간을 한참이나 채우고 있었다. 아마도 한형석이 바라던 웃음 소리가 아니었을까.
# 밤이 되면 학교로 변하는 극장
자유아동극장이 처음 문을 열던 시절, 해가 지면 극장은 다른 얼굴이 되었다. 1954년 4월 8일, 같은 공간에 색동야학원이 문을 연다. 전쟁고아와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일반 학교와 같은 기본 교육을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아홉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백 명 가까운 아이들이 밤마다 모였다. 산수와 음악을 가르친 건 낮에 인형극을 만들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고, 부산대학교 학생들도 자원해 아이들 곁에 앉았다.
낮에 영화를 보며 꿈을 키운 아이들이 돌아간 자리에, 밤이면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글자를 익혔다. 한 지붕 아래 예술과 교육과 돌봄이 나란히 자랐다. 한형석은 백 권의 책보다 한 편의 영화가, 한 곡의 노래가 아이들을 더 빨리 일으켜 세운다고 믿었다.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깨닫게 하는 교육. 그 믿음이 부민동 언덕 위에서 현실이 되었다.


지금 이 공간은 ‘색동야학원 도서관’으로 바뀌었다. 색동야학원 도서관은 옛 야학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어린이 도서관이다. 책장마다 그림책과 동화책이 빼곡해, 어떤 어린이든 들어와 마음껏 읽다 갈 수 있다. 글을 가르치던 자리가 이제는 책을 내어준다. 한형석이 지키려 한 신념이 오늘까지 흐른다.
처음엔 ‘도서관이라 하기엔 좀 작지 않을까’ 했지만, 이건 순전히 어른의 시선으로 내려다본 착각이었다. 어린이의 앉은 키에 맞춘 내부와 책장 높이, 그리고 어린이가 하루에 읽을 수 있는 최대치의 독서량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이 도서관의 주인인 어린이 입장에서 다시 보면 충분히 큰 공간이었다.
70년이라고 하면 아주 긴 역사 같지만, 사실 세대로 따져보면 지금의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그러니 색동야학원의 당대 숨결은 지금 이 도서관 자리에도 충분히 남아있는 셈이다.


도서관 아래 1층으로 가보면 이번엔 또 다른 예술을 느낄 수 있다. 명화 퍼즐 미디어아트 존은 디지털 벽면의 퍼즐 조각을 손으로 짚어가며 커다란 명화를 완성하는 공간이다. 고흐, 고갱 등의 유명 작품을 내 손으로 직접 완성함으로써 그림의 전체 구도와 조형을 어린이들이 배울 수 있다.

바깥에는 발로 건반을 밟아 소리를 내는 피아노도 놓여 있다. 정확히는 ‘노래로 펼치는 독립역사’라는 이름의 공간인데, 이는 한형석의 설립 취지를 매우 잘 녹여낸 지점이다. 총 대신 악보를 썼던 음악가, 그 음악으로 독립을 염원한 한유한과 한형석이 현대 기술과 만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니 어딘지 모르게 울컥했다.
발로 밟을 때마다 경쾌한 피아노 소리가 나지만, 한형석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피아노 음이 마냥 경쾌하게 들리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그리고 그의 공간에 아이들이 뛰놀며 음악을 연주하는 걸 봤다면 어땠을지 자꾸만 아쉬웠다.
# 2년, 그리고 71년
다시 자유아동극장의 처음으로 시간을 돌려보면, 빛나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재정의 벽을 넘지 못한 자유아동극장과 색동야학원은 1955년 끝내 문을 닫는다. 단 2년 만의 일이었다.
이후 한형석은 부산대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며 탈극이라는 새 장르를 개척하고, 동래 들놀음의 전승에 힘을 보탰다. 서예와 그림에도 일가를 이루었고, 작곡가 윤이상과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부산 문화 곳곳에 씨를 뿌리다 1996년 부민동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극장을 세웠던 바로 그 언덕에서였다.
극장의 불은 꺼졌지만 불씨는 옮겨붙었다. 자유아동극장의 무대는 이후 부산에서 번성한 아동극의 효시가 되었고, 부산 연극사의 출발점이 된 청문극회로 이어졌다. 문을 닫았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자유아동극장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폐관 후 71년이 걸렸다. 2024년 9월 27일, 극장은 새 얼굴로 우리를 찾아왔다. 부산 서구가 한형석의 옛집과 극장을 함께 복원해 ‘한형석 자유아동극장’으로 되살린 것이다.
한형석이 취지문에 적은 ‘다음 세대 주인공’이라는 말을 다시 떠올린다. 폐허의 거리에서 그가 손을 내밀었던 아이들은 이제 노인이 되었거나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만든 공간은 이름과 모습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70여 년 전 한 사람이 다음 세대를 위해 지은 극장이, 이제는 ‘미래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그가 내다본 미래의 한가운데에 지금 우리가 서 있다.
총을 들 수도 있었던 손으로 그는 악보를 썼다. 그리고 누구나 외면하던 거리의 아이들에게 극장을 지어주었다. 부민동 언덕의 이 작은 건물은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던진 질문 하나를 품고 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 질문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있다.

극장을 나와 토성역 방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한 층 한 층 내려가자 부민동 주택가가 천천히 펼쳐졌다. 언덕 위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던 극장은, 오늘도 같은 자리에서 누군가의 계단이 되어주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