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 부평 깡통시장
깡통시장으로 가는 길
임시수도기념관과 동아대학교 캠퍼스가 있는 쪽에서 대청로를 따라 쭉 걷다 보면 국제시장과 깡통시장이 맞붙은 긴 블록을 지난다. 커다란 규모의 두 시장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참 이채롭다. 국제시장은 동명의 영화로 널리 알려졌지만 부산 사람들에게는 그 옆의 깡통시장도 국제시장 못지않게 익숙하고 정겨운 곳이다.
(길 하나를 두고 국제시장과 깡통시장이 나란히 서 있다.)
‘깡통시장’이라는 이름은 귀에 설고 특이하다. 깡통시장? 깡통을 파는 곳인가? 무언가 하찮고 우스운 상상이 절로 떠오른다. 하지만 이런 별명으로 불리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 뜻밖에 부산의 역사와 맞닿은 깊은 애환을 발견하게 된다.
깡통시장은 최근 새로운 변화의 흐름을 맞이했다. 한때는 미군부대나 일본에서 밀수한 물건이 암암리에 유통되던 이 시장이, 지금은 방방곡곡에서 몰려오는 관광객을 맞이하는 소위 ‘힙한’ 곳으로 알려졌다. 이제는 부산을 관광하러 왔을 때 반드시 들러야 할 곳으로 지목되어 많은 이들의 발길이 오가는 곳으로 바뀐 것이다.
깡통시장의 간략한 역사
1890년대 지금의 중구 부평동 보수사거리 일대에 광활히 펼쳐진 공터에 시장이 들어섰다. 사거리에 들어섰기에 '사거리 시장'이라고 불린 이곳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소매시장으로 정식 개설되었다. 부평정2정목이라는 당시 주소였던 이곳은 일본인과 한국인이 모여서 장사했다고 하여 ‘일한시장’이라고 불렸으며, 1915년 9월 전국 최초 공설시장으로 지정되었다. 공설시장이 되면서 1년 365일 내내 영업하는 시장으로 변한 이후, 1922년 대대적인 확장이 이루어져 시장 건물 안에만 125개의 점포, 건물 밖에는 137개의 점포가 있었으며 수많은 노점상 또한 있었다고 한다. 부산부 최대 규모의 공설시장이었기에 시장 앞에는 전차가 서는 정류장 또한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에 ‘깡통시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이다. 임시수도가 된 부산으로 내려온 피란민들이 부산역과 부산항, 원도심 일대에 모였는데, 그들이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다양한 통조림 캔 등의 제품들을 가져와 판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통조림이 거래되는 시장이라서 이곳이 '깡통시장'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곳의 명성은 이어져 왔다. 일대에서는 일본에서 가져온 여러 물건이 판매되었는데, 신기한 물건들이 많다는 이유로 '도깨비시장'이라는 별칭도 붙었다. 실제로 1970~80년대에는 국내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워크맨, 밥솥 등 일본 제품들이 거래되기도 했었고, 그 물량을 확보하러 전국 각지에서 많은 유통업자들이 몰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일본과 가까운 부산의 입지와 부산항과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깡통시장의 위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대중문화가 개방되기 전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일본 잡지 따위를 흔히 볼 수 있었는데, 맞은편 깡통시장에도 일본 상품들이 다양하게 쌓여 있었고 오가는 사람들이 그 물건을 흥정하는 모습도 더러 볼 수 있었다. 부산의 옛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이 또한 아련한 추억이다.
아직도 깡통시장 여기저기에는 외국의 잡화를 판매하는 가게가 더러 눈에 띈다. 일본에서 가져온 과자나 음료, 술과 조미료 따위도 있고 공산품도 더러 눈에 띈다. 아직도 남아있는 깡통시장의 옛 모습 가운데 하나이다.



(시장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는 수입 잡화들.)
부산어묵과 깡통시장
부산을 찾는 이들이 반드시 맛보는, 그리고 귀로에 오를 때 선물 꾸러미에 꼭 넣는 게 부산어묵이다. 그런데 부산어묵의 전국적인 명성에는 부평 깡통시장이 기여한 바도 컸다.
부산어묵은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대거 자리 잡으며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일본인들이 만들던 어묵은 해방 이후 그 설비를 인수하고 일본인들의 제조 기술을 배운 한국인들의 손으로 계속 만들어졌다. 1945년 깡통시장에 연 ‘동광식품’이 한국인이 설립한 최초의 어묵 공장이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피란민들이 모였을 때 어묵은 값싸고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사랑받았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부산어묵의 맛이 그때 선보인 셈이다. 전쟁이 끝난 뒤 수작업이었던 제조 과정이 공장의 기계 작업으로 바뀌었고, 깡통시장에 있던 어묵 공장들 또한 기계를 설치할 부지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환공어묵, 미도어묵 등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가게는 이제 그 제조 공장을 장림이나 영도, 김해 등으로 옮겼다. 하지만 어묵을 파는 가게는 아직도 깡통시장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깡통시장의 골목 하나에 쭉 들어선 어묵 가게들 앞을 지나치면 절로 침이 넘어간다. 오랜 전통을 가진 어묵 가게들은 이제는 저마다의 특색을 내세우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과 코와 입을 사로잡는 것이다.
(다양한 어묵은 그 모양과 색감 못지않게 좋은 냄새로 사람을 끌어모은다.)

(어묵 가게 인근의 분식집. 부산 떡볶이의 맛은 어묵에서 우러난 맛이기도 하다.)
깡통시장의 위기와 변화
한때는 부산을 대표하는 시장이었던 부평 깡통시장은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쇠락해 갔다. 대형마트의 출현과 온라인 유통의 대중화는 전통시장이라는 공간의 존재 의의를 지워 나갔다. 시장은 이제 옛 시절의 유물로만 남은 낡고 지저분한 공간으로만 남아버릴 터였다.
그때 깡통시장은 과감한 변화를 모색했다. 아케이드를 재정비하고 포석을 새로 까는 등 미관을 청결하게 하는 노력도 기울이는 것은 다른 시장에서 하는 노력과 같았다. 하지만 깡통시장에서는 시장에 새로운 성격을 부여려는 시도를 했는데, 바로 야시장을 만들려는 움직임이었다. 대만의 스린 야시장을 벤치마킹의 모델로 삼았는데, 외국의 유명 야시장이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발길을 모은다는 점을 주목한 것이다.


(정비된 아케이드. 높고 투명한 천장과 매끈하게 깔린 바닥이 청결함을 보인다.)
깡통시장을 새롭게 디자인하자는 이 전략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지역 사람들이나 아는 시장, 국제시장과 묶여서 하나인 것처럼 취급되던 깡통시장은, 전국의 관광객이 해 저물면 찾아가는 ‘핫플레이스’로 변모한 것이다.
깡통시장 야시장의 분위기는 참으로 독특하다. 밤늦은 시각 취객들로 웅성거리는 소란스럽고 번잡한 번화가와는 다른, 뜨겁고 신선한 활기가 느껴진다. 분주히 오가며 노점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손님들과 그런 이들에게 저마다의 메뉴를 선보이며 호객하는 상인들은 건강한 역동성을 보인다. 맥박이 살아서 뛰는 모습이 시장의 골목골목에 흘러 다닌다.



(다종다양한 노점의 음식들이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이곳에서 철저히 지켜지는 규칙이 있다. 바로 야시장 상인들 간에 같은 메뉴를 중복하여 파는 것은 금지한다는 규칙이다. 잘 나가는 메뉴가 있으면 곧바로 근처에 그걸 흉내 내는 유사 매장이 우후죽순 늘어나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러한 규칙은 분쟁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꽤 합리적인 방안으로 보인다. 중복된 메뉴를 금지하는 규칙 덕분에 깡통시장 야시장은 전국의 여러 야시장 중에서도 다양한 길거리음식들이 팔리는 곳이 되었다. 실제로도 야시장이 열리는 노점에서 판매하는 음식이 무척 다양하여 놀라울 정도였다. ‘여기서 이런 음식도 판다고?’라는 즐거운 놀라움이다.
야시장에 열리는 노점은 기존에 입점한 가게와도 공존을 꾀하고 있다. 손님들에게 질서를 지키고 항상 청결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은 상생과 화합을 위한 움직임이다. 더불어 즐겁게 깡통시장을 지켜 나가자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야시장에 붙은 안내 문구. 야시장을 오래도록 활기차게 유지하려는 고민이 담긴 규칙이다.)




(야시장 인근 가게에도 다종다양한 음식들을 판다.)
부산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담은 깡통시장
깡통시장은 오랜 시간 시장으로서 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곳을 거치는 사람들은 일본인, 피란민, 수입 상인 등 다양했다. 이곳이 시장으로서 오랜 명맥을 유지한 곳임은 분명하지만 시장이 가진 성격도, 시장에 대한 인식도 계속 변해 나갔다.
어쩌면 이러한 변모는 부산이 품은 역동성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산은 언제나 비슷한 몇몇 상징만을 지닌,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부산은 시대의 흐름에 발을 맞추어 계속해서 변화하며 새로운 모습을 선보였다. 한때는 왜관이 있던 일본과의 통로로, 한때는 피란 온 사람들을 품어주는 임시수도로, 한때는 전 세계와 교역하는 관문 항구로, 지금은 다양한 이들이 즐겨 찾는 매력적인 관광지로 변모한 것이다.
깡통시장이 전 세계 사람들을 끌어모으듯 부산 또한 세계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그들을 모으는 도시로 변모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렇기에 깡통시장이야말로 부산이 앞으로 나아갈 모습을 미리 선보이는 장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깡통시장 야시장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안내문.)

(깡통시장은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