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부산미래유산 9월 - 부산진일신여학교 만세 운동
작성자 : 무경(작가)
좌천동에 남은 부산 첫 만세의 흔적
1919년의 3.1 운동은 경성에서 시작하여 조선 전역, 나아가 세계로 뻗어나갔다. 당연히 부산 또한 만세의 물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부산의 3.1 운동 가운데 동래와 구포 지역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부산에서 가장 먼저 만세를 외친 건 1919년 3월 11일, 부산진(좌천)에서였다. 부산진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외친 만세의 함성은 좌천동 일대를 독립의 열망으로 뒤덮었고, 부산 전역으로 번지게 만드는 최초의 불씨가 되었다. 부산진 일신여학교는 동래학원으로 이어져 현재 동래여중과 동래여고가 되었지만, 아직도 좌천동에는 일신여학교의 건물이 서 있다.
더위를 무릅쓰고 외출하여 좌천동에 도착했다. 좌천동굴 앞을 지나 골목을 걷다 보면, 일신여학교 건물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나온다.
(일신여학교를 가리키는 표지판. 인근에는 정발 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정공단도 있다.)
지시를 따라 다시 오르막을 오르면, 거기에 붉은 벽돌로 지은 옛 일신여학교 건물이 나타난다. 부산광역시 동구 정공단로 17번길에 남은 이 2층 건물은 한국기독교 사적 7호이자 2003년 부산시 기념물로 지정된 문화재이기도 하다.
(옛 일신여학교의 건물. 앞에 선 커다란 나무가 인상적이다.)
하지만 일신여학교 건물을 보러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다. 그 옆에 선 부산진교회 아래 담벼락에 가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부산진교회를 설립하고 이끈 외국인 선교사들의 이야기가, 그리고 일신여학교가 세워지고 만세운동의 불꽃을 건네받아 피워올린 역사가 간략히 남아 있다.
(부산진교회 아래 담에 설치된 부산진교회와 일신여학교의 간략한 기록.)
일신여학교, 학생들을 지키는 요람이 되다
일신여학교는 부산과 경남을 통틀어 최초로 설립된 근대 여성 교육기관이다. 부산에 파견된 호주 장로교 선교회가 일신여학교를 지었는데, 교회를 세우면 부설학교를 설립하던 사례를 따라 부산진교회를 세우며 그 옆에 학교 또한 지은 것이다. 당시 조선에 파견된 서양 선교사들은 문맹퇴치 운동, 계몽운동에 앞장섰고, 의료, 복지, 교육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근대화된 학교 설립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학문이 소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존엄성, 인간의 권리와 자유, 평등과 정의와 같은 근대적 가치도 뿌리내리게 되었다.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을 일깨워주는 역할수행을 한 것이다.
호주에서 온 ‘장로교여전도교회연합회’의 선교사 멘지스[Isabella Menzies, 조선 이름은 민지사(閔之使)]와 페리(Jean Perry)는 “고아들이 장차 선교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일찍부터 훈련할 목적으로” 고아 소녀 세 명을 데려와 미오라 고아원(The Myoora Orphanage)을 창립했으며, 1895년 10월 15일 좌천동에서 미오라 고아원 소녀들과 교인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학교인 일신여학교를 설립하였다. 학교 이름은 ‘날마다 새롭게(Daily New)’라는 뜻을 담아 일신(日新)이라고 지었고 초대 교장으로 멘지스가 취임하였다. 1905년 4월 학교 건물을 새로 지었고, 1909년 8월 사립학교 인가를 받고 고등과도 함께 세웠다.
(일신여학교 설립 당시의 사진.)
대한제국이 쇠망하며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된 때, 오히려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민족의식은 고취되었고 구국의 열망 또한 뜨거워져 갔다. 여기에는 멘지스에 이어 일신여학교의 교장이 된 선교사 엥겔[Rev. G. Engel, 조선 이름은 왕길지(王吉志)] 등 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도 컸는데, 그들은 학생들의 자주성을 고취시켰다. 한국인 교사의 교육 또한 학생들의 항일의식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교사 서매물은 1913년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송죽회의 조직원이었다. 일신여학교의 이러한 항일의 분위기와 민족교육은 1919년 3‧1운동을 부산 지역에 이어받아 퍼트리는 자양분이 되기에 충분했다.
(엥겔의 조선 이름을 딴 기념관이 남아있다.)
일신여학교, 부산의 첫 만세를 외치다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만든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탑골공원에서 선언식이 거행되며 3,1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경성의 만세운동 소식은 이틀만인 3월 3일에 부산에 전해졌다. 경성에서 가장 먼 곳임에도 불구하고 기차라는 근대적인 교통수단 덕에 소식의 전파는 오히려 빨랐다.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경성에서 전국 각지로 퍼져나간 학생대표단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고, 부산상업학교,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연락을 취했다. 3월 11일에 부산부와 동래 지역 학생들이 함께 거사를 진행하려던 계획은, 경성의 소식을 접하고 시위를 준비하는 움직임을 탐지한 경찰이 부산상업학교를 임시휴업시키면서 차질이 생겼다.
그때 일신여학교는 교사 주경애, 박시연이 중심이 되어 학생을 규합하였다. 이들은 10일 밤 기숙사에 모여 밤새도록 태극기를 만들었다. 당시 만세에 참가한 학생이었던 김반수(고등과 7회 졸업생)의 증언이 남아 있는데, 이에 따르면 3월 10일 밤 10시경 학생들은 교사 주경애의 방에 모여 전기를 끄고 벽장 속에 들어가 이불로 창을 가리고 촛불을 밝힌 후 한 사람씩 교대로 망을 보면서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튿날인 3월 11일 밤, 학생들은 다시 주경애의 방에 모였다. 그리고 21시경 모인 이들이 모두 기숙사를 빠져나와 좌천동 거리로 나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부산의 첫 3·1 만세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좌천동 주민들도 합세하여 23시까지 만세 소리를 드높인 이날의 움직임은 군경이 출동하여 자연 해산되었다.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은 다음날인 12일 체포되어 부산구치소에 입감되었다. 이들은 모두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으며 교사 주경애와 박시연은 징역 1년 6개월, 학생들은 징역 5개월의 형량이 선고되었다.
외국인 선교사들 또한 경찰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일신여학교의 교장이었던 마가렛 샌드먼 데이비스(Margaret,S.D, 1887~1963), 데이지 호킹(Daisy Hocking) 또한 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되었고, 학생감독이던 이사벨라 멘지스와 또 한 명의 선교사는 자택에서 시위에 쓰려고 만들어 둔 태극기를 소각한 일로 검거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외국인에게까지 보안법 위반을 적용시킬 수 없었기에 데이비스와 호킹은 불기소처분이 내려졌으며 멘지스는 노령, 또 다른 선교사는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외국인 선교사가 일본 경찰에 검거된 사실만으로도 국제적인 논란을 일으킬 큰 사건이 된 셈이었다. 데이비스, 호킹, 멘지스는 2022년 호주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만세 운동 직후 경찰은 휴교 조치를 내렸다. 닫힌 교문은 4월 1일에야 열렸는데, 등교한 학생들은 체포된 교사와 학생들이 수형생활에서 어떤 혹독한 일을 겪고 있는지를 전해 듣고 분노했다. 그래서 4월 8일 저녁 8시 30분경 50여 명의 학생들은 주민들과 함께 또다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비단 이때뿐만이 아니라 3월과 4월에 좌천동 일대에서는 학생 주도의 시위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일신여학교를 비롯하여 부산진공립보통학교, 부산상업학교 등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일신여학교의 역사를 알려주는 안내판.)
만세의 흔적이 일신여학교의 흔적으로 남다
일신여학교의 옛 건물은 회색 돌과 빨간 벽돌이 섞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학교를 운영하던 도중 2층으로 증축했기에 1층은 회색 돌로, 2층은 빨간 벽돌로 지어진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학교의 탄생부터 연혁, 건물 구조, 졸업생 현황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일신여학교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을 당시의 여러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일신여학교의 옆모습.)
(건물은 돌과 벽돌을 함께 써서 지은 형태이다. 건물을 증축한 흔적이 남은 것이다.)
(전시관의 내부. 일신여학교의 연혁과 학교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 등이 있다.)
(당시 학생들이 사용하던 교재와 도구들.)
(졸업생 김반수 씨가 증언한, 만세 운동을 위해 여학생들이 태극기를 만든 일화가 태극기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당시 여학생들이 입은 교복이었던 하얀 한복 저고리.)
건물의 맞은편 오르막 한편에 높이 올라선 벽에는 부산광역시 동구청이 조성한 ‘독립선언문 가벽’이 설치되어 있고 ‘동구의 독립운동을 기억하다’라는 제목 옆으로 동구의 독립운동에 관한 설명이 펼쳐져 있다.
(독립선언문과 동구의 독립운동 역사가 기록된 벽.)
또한 그 아래 부산진교회 마당에는 호주 선교사들을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근방에는 한국전쟁 시기 호주 선교사들이 설립한 부산 최초의 여성·영유아 전문 병원 일신기독병원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일신여학교의 후신인 동래여자고등학교는 현재 부산광역시 금정구에 있는데, 교정에는 만세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부산진교회 안의 외국인 선교사들을 추모하는 공간.)
일신여학교에 남은 만세 운동의 흔적을 돌아보면서 묘한 생각을 떠올렸다. 3.1 만세운동을 부산에서 처음으로 퍼트린 이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오히려 학교에 가려 오르막길을 오르는, 친구들과 평범하게 재잘대며 일상을 걸어가는 당시 여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그런 얼굴들이, 저 붉은 학교 건물에서 뛰쳐나가며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는 모습을 이어 떠올렸다. 과연 이 모습은 사명감으로 특별히 충만했어야만 가능한 행동이었을까?
부산진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움직임은 부산 최초의 만세운동, 혹은 여학생들의 만세 운동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특별한 사명감과 의지가 있어서 그런 큰일을 해낸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저 조국을 되찾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을 품은, 지금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단지 독립의 열망을 가장 먼저 전해 받고 가장 먼저 외친 것이 그들이었을 뿐이다. 지금 부산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들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부산 최초의 만세 운동이라는 특별한 기록의 흔적을 찾으면서, 오히려 평범함에서 위대함이 피어날 수 있음을 새삼 돌이켜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