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부산 미래유산 7월 - 돼지국밥
부산과 돼지국밥
‘부산’ 하면 떠오르는 음식은?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 다양한 대답이 돌아온다. 거기서 빠지지 않는 음식이 바로 돼지국밥이다.
부산 사람에게 돼지국밥은 참으로 ‘편한’ 음식이다. 어느 동네를 가도 돼지국밥을 파는 가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 혹은 술을 간단히 하고 싶을 때 돼지국밥집에 들어가면 꽤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돼지국밥은 ‘혼밥’을 하러 가기에도 좋은 음식이다. 어슬렁어슬렁 걸어 단골 가게 문을 쓱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은 뒤 국밥 한 그릇을 주문하면, 곧 커다란 쇠쟁반 위에 온갖 반찬들과 함께 뜨거운 한 그릇의 식사가 나온다. 그렇게 편하고 가까운 음식이기 때문에, ‘부산 토박이는 자신만의 돼지국밥 맛집과 밀면 맛집이 있다’라는 말은 거짓말도 과장도 아니다.
(갓 나온 돼지국밥 한 그릇. 돼지국밥의 담음새는 가게마다 제각각 다르다. 눈썰미 좋은 이라면 어느 가게의 국밥인지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인 밀면은 ‘부산 경남 지역에서 먹는 밀가루로 뽑은 냉면과 비슷한 음식’이라는 인지도였다가 최근 전국으로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다. 돼지국밥의 저력은 밀면을 넘어선다. 부산 경남 지역을 넘어서 전국으로 널리 퍼져나간 것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세계의 눈길을 끄는 음식이 되었다. 외국 매체에서 부산에서 꼭 가 봐야 할 식당 중 돼지국밥 파는 곳을 선정할 만큼. 부산 사람들이 사랑하는 음식은 어느새 세계인들의 혀까지 사로잡으려 한다.
돼지국밥은 어떤 음식이기에 부산 사람들은 이 투박한 음식을 사랑하는 걸까? 한 그릇에 담긴 매력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돼지국밥의 역사
돼지국밥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한국에 돼지를 이용한 요리는 다양하지만, 푹 우려낸 돼지 뼈 육수에 밥을 말아 먹는 음식은 뜻밖에 찾아보기 힘들다. 다른 지역에서는 순대국밥이 비슷한 모습인 듯하지만, 순대국밥은 순대와 머릿고기, 내장 등을 넣는 것에 비해 돼지국밥은 돼지의 살코기를 넣어 먹는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돼지국밥은 가게마다 육수를 내는 방식이 달라서, 돼지 뼈 국물을 우리는 곳이 있는가 하면 고기만으로 국물을 우려내는 곳도 있다. 설렁탕과 곰탕처럼 그 스타일이 다른 셈이다. 돼지국밥이 만들어진 시기는 한국전쟁 때로 짐작된다. 전쟁 당시 피란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형식이라는 설과, 밀양 지역에서 장터 음식으로 판매된 것이 전쟁 때 부산과 경남 각지로 퍼져나갔다는 설 등이 있다.
(투박하게 고기를 썰어낸다. 다양한 부위의 고기가 숭덩숭덩 썰려서 국밥 그릇에 그득히 들어간다.)
돼지국밥은 든든한 음식이다. 돼지고기에는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고 다른 육류보다 비타민B1이 많으며, 돼지 뼈를 우려낸 사골 국물에는 칼슘, 칼륨, 마그네슘 등 다양한 미네랄이 풍부하며 단백질과 콜라겐도 함유되어 있다. 허기진 속에 영양가가 가득한 한 그릇의 진득한 국밥을 밀어 넣으면 하루를 버텨낼 수 있을 든든함이 채워진다.
그래서일까, 돼지국밥은 유독 노동자들에게 사랑받은 음식이었다. 현재 부산에서 유명한 노포 돼지국밥집들이 몰려 있는 장소는 과거 조선방직이 있었던 범일동 지역의 조방앞 일대, 남포동과 중앙동 일대 등이다. 이곳은 한때 노동자들이 가득한 지역이기도 했다.
고된 일과를 하는 도중에 잠깐 허기를 채우려 혹은 하루 일을 끝내고 피곤한 몸에 기운을 북돋우러 일꾼은 돼지국밥집에 들른다. 주문을 받은 국밥집 주인은 뚝배기에 밥을 담고 토렴한 뒤 무심한 듯 두툼하고 투박하게 썬 돼지고기를 올리고 그 위에 강렬한 색깔의 다대기를 얹는다. 국밥 한 상이 일꾼 앞에 나오면, 일꾼은 뚝배기에 숟가락을 푹 집어넣어 다대기를 풀고 정구지도 잔뜩 얹어 섞은 뒤 한 숟갈 푸짐하게 떠서 먹는다. 바삐 숟갈 놀리다가 마늘과 양파, 고추 등을 집어 입에 넣어 우물거린다. 진득하고 강렬하게 혀에 달라붙는 맛을 음미하다가 술 한 모금으로 씻어낸다.
그 어떤 음식보다 거세고 기 센 음식을 뱃속에 집어넣으며 부산의 일꾼들은 하루를 채워 나갔다. 부산 사람의 투박하고도 진득한 성격이 돼지국밥 국물을 닮은 건, 그들이 먹은 돼지국밥의 영향도 있지 않을까?
(토렴이라는 과정으로 밥알에 국물이 더욱 잘 스며들고 국밥의 맛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돼지국밥의 단짝, 정구지와 새우젓
돼지국밥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정구지’이다. ‘부추’라는 표준어가 있지만 부산 사람은 정구지라고 불러야 맛이 사는 느낌이 든다. ‘부추전’ 대신 ‘정구지지짐’이라는 말이 더욱 입맛을 감돌게 하듯이, 돼지국밥집에서도 “여기 부추 조금 더 주세요”보다는 “여 정구지 쪼매 더 주이소”라고 말해야 자연스러울 것 같다.
돼지국밥집에 가면 반찬으로는 거의 반드시 정구지무침을 내놓는다. 정구지무침은 국밥을 먹다가 입가심 반찬으로 집어 먹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정구지무침을 한가득 국밥 위에 얹어 슬슬 섞어 먹는다. 정구지무침은 돼지국밥집의 필수 반찬이지만 만듦새는 가게마다 다르다. 고춧가루 섞인 양념에 무친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양념을 옅고 가볍게 무쳐내어 부추의 향과 질감을 살려서 내는 곳이 있고, 젓갈을 섞어 진하게 무쳐 내놓는 곳도 있다.
돼지국밥과 정구지무침은 무척 훌륭한 조합이다. 돼지고기와 부추가 식재료끼리 궁합이 좋다고 한다. 한의학적으로는 차가운 성질인 돼지고기와 따뜻한 성질인 부추의 조합이 좋다고 하며, 영양학적으로도 부추에 포함된 알리신 성분이 돼지고기에 함유된 비타민B1 성분과 어우러져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한다고 한다.
한편 돼지국밥에는 새우젓이 반드시 곁들여진다. 새우젓은 국밥 국물의 간을 맞추는 용도이기도 하고, 혹은 고기 한 점을 집어 찍어 먹을 때도 쓰인다. 국물의 간을 맞추는 데 소금을 쓰면 부산 사람이 아니라는 농담이 있을 만큼 돼지국밥에 새우젓을 넣는 건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돼지고기와 새우젓 또한 궁합이 좋다. 돼지고기엔 기름기가 많아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는데, 발효된 새우젓에서 만들어진 리파아제라는 지방분해효소가 소화에 도움을 준다.
돼지국밥에 언제부터 부추와 새우젓이 곁들여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부산 인근의 김해 대동과 같은 부추 산지가 근방에 여럿 있었기 때문에 돼지고기 요리와 자연스레 함께 했을 걸로 추측할 수는 있다.
(돼지국밥집의 기본 반찬들.)
(정구지무침. 가게마다 만드는 방식이 다르지만 돼지국밥의 맛을 더욱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돼지국밥을 사랑하는 사람들
돼지국밥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대중문화의 영향이 컸다. 허영만의 만화 <식객>에서는 돼지국밥집을 꾸려나가는 모자의 이야기가 한 에피소를 차지했다. 영화 <변호인>에서도 돼지국밥이 인상적으로 다루어진다. 주인공 송우석이 돼지국밥집 사장과 맺은 긴 인연이 사건의 중심 이야기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돼지극밥은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관객의 몰입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로 활용되었다.
부산 경남 지역 사람들만이 아는 특이한 로컬푸드였던 돼지국밥은 그렇게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돼지국밥은 이제 부산의 명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이제는 부산을 찾아오는 여행객이 반드시 가봐야 할 돼지국밥 맛집의 명단이 다양하게 공유되고 있다. 또한 돼지국밥은 라면으로까지 개발되어 부산 곳곳의 관광명소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념품으로 판매되고 있다.
돼지국밥은 부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서울에서도 이제는 돼지국밥을 다루는 가게를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부산의 돼지국밥 체인이 서울에도 여러 지점을 연 사례도 볼 수 있다.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으면서 돼지국밥은 점점 깔끔해졌다. 투박하게 뭉텅뭉텅 썰어내는 고기와 뿌연 국물에 감도는 누린내 대신, 정갈하게 썬 고기와 진하면서도 잡내 없는 국물을 국밥에 담는 집이 생겨났다. 누린내는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리는 요소이기에 이런 변화는 자연스러운 흐름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유명한 노포에서 물씬 풍기는 짙은 돼지 누린내는 어떤 이들에게는 절로 식욕을 자극하는 정겨운 냄새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돼지국밥은 국내를 넘어 해외에까지 인정받고 있다. 미슐랭 빕구르망에 선정된 부산의 음식점 중 돼지국밥집이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돼지고기 육수를 우려 국물을 뿝는 형식은 여러 단계의 변화를 거쳐 지금은 ‘돼지곰탕’이라는 형식으로 새롭게 창조된 것으로 보인다. 맑게 끓여낸 돼지고기 육수에 얇게 썬 돼지고기와 토렴한 밥을 곁들여 놋그릇에 정갈하게 담아 내놓는 돼지곰탕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독특한 맛과 보편적인 맛을 모두 충족시키는 인기 메뉴가 되었다. 외국의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돼지곰탕이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당당히 제공되는 것을 보면 새삼 돼지국밥의 저력이 놀랍기만 하다.
돼지국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돼지국밥 한 상의 모습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커다란 철 쟁반 위에 놓인 그릇들. 정구지무침이 쌓인 접시, 김치와 깍두기가 담긴 접시, 양파와 마늘과 고추가 담긴 접시, 새우젓과 쌈장이 담긴 작은 종지, 새카만 뚝배기 안에 팔팔 끓는 희뿌연 국물과 듬성듬성 썰린 돼지고기와 새빨간 다대기.
하지만 이 상차림을 떠올리면서 맛있겠다는 생각 이외의 감정이, 국밥 한 그릇에 얽힌 여러 추억이 함께 떠오른다면, 당신은 부산 사람일 것이다. 부산 사람의 삶에 돼지국밥은 그만큼 가깝고 진득하게 함께 했기 때문에.
(돼지국밥 한상차림. 커다란 철 쟁반이 앞에 놓이면 볼 수 있는 정겨운 모습이다.)
(갓 나온 국밥의 첫 한 숟가락을 뜨는 이 순간만큼 가슴 두근거리는 때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