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부산 미래유산 6월 - 동항성당
글쓴이: 무경 (작가)
동항성당으로 가는 길
동항성당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다. 버스를 타고 달리다 보면 오래된 건물이 한쪽에 늘어서 있고 컨테이너며 크레인이 늘어선 바다를 다른 쪽으로 끼며 달려 나간다. 버스는 곧 부두 근처에 다다른다. 낡은 철로가 깔린 길 한편에 내리면, 부산 사람으로서도 꽤 낯설어 보이는 낡은 풍경이 주위에 펼쳐진다. 버스 정류장 너머로 아주 작게, 팔 벌린 예수상이 아련하게 보인다.
(저 멀리 작게 보이는 예수상이 동항성당을 가리키는 지표이다.)
도로를 건넌 뒤, 우암동에 난 오래된 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좁다란 오르막길이 나온다. 부산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오르막이지만, 부산이 낯선 이들에게는 험하고 가파른 길일지도 모른다. 경사를 한 발 한 발 밟아 올라가다 보면 조그맣게 보이던 예수상이 점점 커지고, 마침내 목적지인 동항성당이 나온다.
(‘동항성당’이라는 소박한 글씨가 새겨진 반듯하지 않은 나무판이 이곳의 역사를 온몸으로 알려주는 것만 같다.)
우암동과 소막마을
‘동항(東港)’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곳은 부산항의 동쪽 항구 지역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성당 아래로 보이는 아름다운 경관 중 일부는 부산항 제7부두이다. 성당에서 부두를 내려다보면 수많은 컨테이너와 그 옆에 우뚝 선 드높은 크레인들, 멀찍이 보이는 영도와 봉래산, 그 사이 해협에 늘어선 배들이 보인다. 그런 경치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이곳 동항성당의 역사에도 배와 항구가 밀접하게 맞닿아 있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동항성당에서 내려다보이는 모습. 영도와 부산항대교, 컨테이너 박스가 한 곳에 담긴다.)
우암동이라는 마을 이름은 이곳의 역사와 연관 있다.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9년, 조선의 소를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이출우검역소(移出牛檢疫所)를 설치하면서 이곳에 여러 건물이 세워졌다. 검역소 외에도 소막사, 소각장, 창고, 사택 등의 건물 40여 동도 함께 지어졌다. 하지만 해방 이후 검역소 업무가 중지되자 소막사는 텅 비었다.
이곳에 마을이 생긴 건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이다. 전쟁 때문에 피란민들이 부산에 몰려들 때, 그들 중 다수가 우암동으로 모였다. 우암동 앞의 우암 포구로 전쟁 구호 물자가 들어오고 배급사무소 등이 설치되면서 이곳에 거주하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암동에 살게 된 이들 중 일부는 남아 있던 소막사를 개조하여 거주지로 만들었다. 이때 사람들이 거주한 곳이 현재 소막마을의 기원이 되었다.
소막마을에는 아직도 소막사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그중 일부에 당시 거주지 모습을 재현하여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한국전쟁과 동항성당의 시작
동항성당은 1951년 소막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공소가 세워지며 시작되었다. 공소라고는 해도 당시에는 천막으로 지어진 게 고작이었지만, 아마도 볼품없었을 이 천막 성당에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고향을 떠난 피란민들에게 닥친 낯설고 척박한 삶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었을 것이고, 그들에게 위안이 필요해지는 건 당연했을 터이다. 신앙심을 간직한 채 부산으로 내려온 이들 또한 마음을 기댈 곳이 필요했기에, 피란민들이 모여 사는 곳에 성당이 지어지고 그곳에 사람들이 찾는 것은 필연적인 흐름이었다. 그렇게 동항성당은 고통받는 이들이 기댈 곳으로 서서히 자리 잡았다. 천막 공소가 불타 없어지기도 했지만 신도들은 다시 공소를 지었고, 믿음을 유지해 나갔다.
1954년 드디어 공소가 성당으로 승격되었고 1955년 인근 부지를 사서 본격적인 성당 건물을 지었다. 신도들이 직접 벽돌을 나르며 건물을 지을 때 피란민들 또한 그 일을 하며 옥수수가루나 밀가루로 품삯을 받아갔고, 그중에서는 성당에서 세례를 받는 이들도 생겼다.
(성당의 본당 건물. 벽돌로 하나하나 쌓아 지은 건물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소막마을의 중심에서 동항성당은 빈민 사업과 사회 복지에 힘써 왔다. 외국인 수녀들로 이루어진 프란치스코회에서 동항성당을 거점으로 삼아 구호 활동에 힘썼다. 1959년 제3대 주임신부로 독일인 하 안토니오 신부가 부임하면서 동항성당에서 본격적인 생필품 배급과 의료 지원, 교육사업이 이루어졌다. 하 안토니오 신부는 사재를 털어가며 인근 지역의 빈민들을 구제하고 고아나 부랑아를 직접 거둬 키우기도 하는 등 무척 큰 노력을 기울였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판자촌 성자’라고 불렸다.
1964년에는 동항성당에 피정교육센터 사랑의 집을 건립하고 파티마 세계사도직 한국본부를 창설하여 사회복지사업을 더욱 확대해 나갔다. 한독여자실업학교 또한 이곳에서 시작하였으며 소외된 시민들을 위한 복지시설인 오순절 평화의 마을도 이곳에서 시작되어 운영되었다.
이렇듯 주민들의 어려운 삶과 함께해 온 동항성당의 역사는 곧 소막마을의 역사이기도 하다. 동항성당을 말하면서 소막마을을 말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항성당 여기저기에 건물들이 즐비하다. 이곳들은 저마다 복지를 위한 목적을 가진 경우가 대다수이다.)
동항성당과 밀면
동항성당이 피란민들과 함께한 삶은 뜻밖의 모습으로도 찾을 수 있다. 부산 사람들이 즐겨 먹는 먹거리인 밀면에도 동항성당의 손길이 닿아 있다.
소막마을에는 부산 밀면의 시작이라고 알려진 가게인 내호냉면이 있다. 내호냉면은 함흥의 내호 지역에서 냉면집을 하던 일가가 부산으로 피란을 와서 1952년 연 곳이다. 이곳에서는 냉면을 만들어 팔기도 했지만, ‘삯국수’를 해 주기도 했다. 그 당시 이북에서는 노동자들이 곡식 따위를 임금으로 받으면 근처 냉면집에 가서 국수로 뽑아 가져가곤 했는데, 이러한 행태를 ‘삯국수’라고 불렀다.
한편 동항성당에서 피란민들에게 배급해 준 밀가루 또한 삯국수로 뽑혔다. 이북에서 온 피란민들이 성당에서 받아 온 밀가루를 내호냉면에 가져오면 그걸 국수로 뽑아주었다고 한다. 메밀이나 전분로 뽑는 냉면의 면 대신 밀가루로 면을 뽑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이렇게 뽑힌 밀가루 삯국수는 훗날 부산 밀면의 시초가 되었다. 피란민들의 배고픔을 구제하려고 성당에서 준 밀가루가 부산의 역사이자 자랑으로 거듭난 셈이다.
(소막마을 안에 자리잡은 내호냉면. 부산 밀면의 시작에는 동항성당도 한몫 거든 셈이다.)
동항성당의 현재와 미래
답사차 동항성당 안을 걸으면서 절로 입은 무거워졌고 걸음은 조용해졌다. 성당이라는 공간의 경건한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곳에 들어선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향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동항성당 안에는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대부분 복지와 연관 있는 곳이다. 피정교육센터 사랑의 집과 파티마 세계사도직 건물이 아직도 동항성당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성당의 바깥 여기저기에는 성모상이 여럿 보인다. 힘든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모습일 것이다.
(동항성당의 성모상.)
동항성당을 찾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단연 본당 건물이다. 본당은 성전의 특징이 잘 반영된 근대 종교 건축물로 아직도 그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 위에 우뚝 선 예수상 또한 경건함과 웅장함을 동시에 갖춘 보기 드문 볼거리이다. 팔 벌린 채 바다를 향한 예수상을 올려다보면서, 눈부신 햇빛에 감싸인 모습에 절로 마음이 경건해졌다.
(햇빛이 비추는 동항성당과 예수상.)
하지만 동항성당의 앞날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1990년대 전후 경공업의 쇠퇴로 우암동 또한 쇠락해 갔다. 우암동 인근에 들어서 있던 경공업 공장들이 문을 닫으며 우암동에 살던 이들도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 때문에 동항성당의 신자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주변이 재개발 구역으로 설정되면서 성당의 원형이 훼손될 위험도 커졌다. 성당을 보존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면서 2019년에는 동항성당의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예수상이 감싸 안는 바다
동항성당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부산의 여러 곳을 보았다고 자부하는 필자 또한 동항성당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을 보면서 크게 감동했다. 산더미처럼 적재된 컨테이너와 줄지어 선 크레인들, 그리고 그 너머의 바다와 배들, 저 멀리 보이는 영도와 부산항대교는 이것이야말로 부산의 진짜 모습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부산을 조망하는 이 특별한 경치 때문에 동항성당은 최근 야경 명소로 널리 알려졌다. 그 중에서도 동항성당의 야경은 특출나다고 한다. ‘부산의 리우데자네이루’라는 말이 퍼져 있을 정도이니 그 아름다움을 짐작해 볼만하다. 하지만 낮에 보는 경치 또한 부산의 진면목을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으니, 동항성당을 찾는 이들은 고민해야 할 듯하다.
동항성당의 꼭대기에 선 커다란 예수상은 이곳의 경관을 더욱 특별하게 보이게 하는 요소이다. 예수상과 부산항의 전경을 함께 담으려 성당 인근의 전망대를 찾는 이들 또한 늘어났다. 바다를 향해 팔 벌린 채 선 예수의 모습을 보면 왜인지 모를 경외감을 느낀다. 팔 벌려 부산과 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래 땀과 눈물 흘리던 이들을 감싸 안으려는 모습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최근 동항성당 일대에는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오래된 마을의 모습은 사라지고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마을이 온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 옛 흔적을 모두 지운다 해도, 동항성당은 이 자리에 계속 있을 것이다. 본당 위에 우뚝 선 예수상은 언제나 바다를 향해, 그곳에서 여전히 고단한 삶을 살아내는 부산 사람들을 향해 말없이 팔 벌려 서 있을 것이다. 그들이 쉴 곳이 여기 있다고 온몸으로 말하면서.
(성당 담벼락에 핀 장미와 저 멀리 보이는 영도 봉래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