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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202011호 기획연재

부산, 그 전에 동래가 있었다…조선시대로 떠나는 시간여행

함께 걷는 부산 길⑪동래읍성 역사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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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은 오늘날의 중심 업무 지구 같은 곳으로 주요 관청이 자리했던 곳이다(사진은 복원한 동래읍성길을 걷는 시민들). 


 

`부산의 역사'라고 하면 대체로 일제강점기와 피란수도 등 근대사와 산업중흥기 같은 현대사를 주로 떠올린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이전 부산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부산'이라고 불리기 이전, 조선시대 `동래 도호부'의 흔적을 따라 걸어본다. 


글·하나은 / 사진·권성훈
해설·이정희 동래구 문화관광해설사


코스



조선시대 행정·군사 중심지…동래 도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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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역사관에 있는 조선시대 동래읍성 모형.


부산이 부(府)로 승격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이다. 조선시대까지 오늘날의 부산 일대는 동래(東萊)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했다. 동래는 조선 전기까지 현(縣)이었는데, 일본과 교류가 많아지면서 군사·외교적 중요성이 높아지자 1547년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됐다.


임진왜란 이후 동래는 일본 사신을 맞이하는 곳이자 초량왜관을 통해 일본과 교류하는 외교·경제적 중심지로 부상했다. 동래 도호부(줄여서 `동래부'로 칭함)의 특별한 지위는 인사에서도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도호부사는 종3품 당하관이 담당했던 것과 달리 동래부사는 정3품 당상관을 파견했다. 일제는 1910년 동래부의 이름을 부산부로 바꿨으며, 오늘날 동래는 부산광역시 16개 구·군 중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남았다.


조선시대 뜨거웠던 교육열…동래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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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향교 반화루.


흔히 교육을 나라의 근간이라고 한다. 그래서 옛 동래부의 역사를 찾아가는 길은 명륜초등학교 옆에 자리한 동래향교에서 시작한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에 설치한 국립 중등 교육기관이다. 주로 양반 자제를 대상으로 유학을 가르치고 공자를 비롯해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 성현들의 위패를 모셨다.


향교나 서원에서 공부하고 과거시험(소과)을 치르면 진사나 생원이 된다. 진사나 생원은 지방 하급관리가 되거나 성균관에 진학해 대과를 치른 후 중앙관료로 진출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서원의 세력이 커지며, 향교의 교육 기능은 점차 약화했으며, 과거제 폐지 이후에는 성현에 대한 배향 기능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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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수학했던 명륜당.


경국대전 기록에 따르면 동래향교에서는 약 70명의 학생이 수학했다. 입구인 반화루(攀化樓)에 들어서면 맞은편에 학생들이 공부했던 강당인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이 일대의 지명인 명륜동은 바로 명륜당에서 유래한 것이다. 명륜당 좌우에는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얼이나 양민들이 기거했다고 한다. 명륜당에서 내삼문을 지나면 공자를 비롯해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가 성현들을 모신 대성전이 있다.

동래향교 곳곳에는 크고 웅장한 은행나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향교에 은행나무가 많은 것은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또 한 가지 설로는 은행나무에는 해충이 잘 붙지 않는데, 이처럼 어린 학생들도 나쁜 영향을 받지 않고 잘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서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청운의 꿈을 꾸며 명륜당에서 수학하고 때로는 반화루에 올랐다가 때로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쉬기도 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그때 사람들은 사라졌으나 명륜당 옆 은행나무는 남아 시대의 변화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임진왜란 치열한 저항의 역사…동래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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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한 동래읍성 성곽길.


동래향교를 나와 학생들이 한 번씩 게으름을 피우며 나들이 나갔을지도 모를 뒷길로 향했다. 아파트 단지 중간을 가로지르면 나지막한 구릉이 시작되는데 이곳이 바로 옛 동래읍성이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산성과 달리 읍성은 고을의 중심지를 보호하기 위한 곳이다. 읍성 안에는 동헌·객사·장관청 등 핵심 관청과 향교 등 소속기관들이 있었다. 오늘날로 치자면 중심 업무 지구쯤으로 볼 수 있겠다. 동래읍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정문과 상여가 나가는 `인생문', `암문' 등 6개의 문이 있었으며, 동·서·북쪽 높은 곳에는 장대를 만들어 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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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축제 동래성전투 실경 뮤지컬 모습. 사진제공·동래구


동래읍성은 임진왜란 시기 치열한 저항의 역사와도 맞닿아있다. 1592년 4월 왜군이 침입했다. 정발 장군이 지키던 부산진성은 순식간에 함락되고 적들은 동래읍성을 향해 파죽지세로 몰려들었다. 당시 동래부사는 송상현. 왜군은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거든 길을 빌려 달라(전즉전의 부전즉가아도(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라며 항복을 권했다. 이에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라고 답하고 백성들과 함께 결사 항전했다.
그러나 동래읍성의 적은 인원으로 조총과 화살로 중무장한 수많은 왜군을 상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동래읍성은 함락됐으며 동래부사 송상현도 순절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이후 동래부가 왜군을 막지 못한 책임을 물어 도호부에서 현으로 격하시켰으며, 1599년에야 다시 도호부로 복귀시켰다.

동래읍성은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것을 보수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방치됐다. 1730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정언섭은 동래가 나라의 중요한 관문이므로 증축해야 한다는 건의를 올려 1731년 몇 달만에 성을 증축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은 도시근대화를 빌미로 성을 파괴하고 주요 건축물을 마음대로 해체 또는 이전했다.

부산시는 1980년대부터 동래읍성 복원을 시작해 현재는 서장대∼북문∼북장대, 인생문, 동장대, 동래부동헌, 장관청, 송공단 등을 복원한 상태이다.


도망친 장수…그리고 이름 없는 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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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은 임진왜란 때 장수가 도망친 부끄러운 곳이라 하여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동래향교에서 시작한 읍성길에서 서장대까지 오르막길을 걷고 나면 이번엔 북문까지 산등성이를 타고 완만한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이윽고 도착한 북문. 동문을 지희루(志喜樓), 서문을 심성루(心成樓), 남문을 무우루(無憂樓), 암문을 은일루(隱一樓)라 부르는 것과 달리 북문에는 별도의 이름이 없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은 경상좌병사 이각(李珏)과 함께 수성을 다짐했다. 그러나 이각은 파죽지세로 몰려드는 왜군을 보고 북문을 통해 몰래 도망쳤다. 북문은 장수가 도망친 부끄러운 곳이라 하여 이름 없이 `북문'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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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과학 동산은 동래부 관노 출신으로 종3품 벼슬에 오른 조선 과학자 장영실을 기념하는 곳이다. 사진·비짓부산


북문 앞은 `장영실 과학동산'이다. `장영실 과학동산'은 장영실의 발명품을 포함해 조선시대 천문기기 18종 19점을 복원 전시한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과학자 장영실은 동래 관노 출신이었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장영실은 오로지 재능을 바탕으로 종3품의 벼슬까지 올랐다. 그의 재능을 시기하는 사람이 어찌 없었을까. 장영실은 그가 감독해 만든 세종의 가마가 부서졌다는 구실로 파직됐으며 이후 그의 종적은 역사에서 찾을 수 없다. 관노였던 장영실은 어쩌면 어린 시절 그가 한 번쯤 올랐을지 모를 동래 읍성 성곽길 어딘가에 600년 후 자신을 기리는 기념 동산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야부터 이어진 역사문화…복천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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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시대 지배층의 무덤이 다수 발견된 복천동 고분군.


`장영실 과학동산'에서 동래부의 축소 모형을 볼 수 있는 동래읍성역사관을 지나 복천고분군으로 향했다. 복천고분군은 주택단지 중간에 섬처럼 자리한 나지막한 구릉 지역이다. 1969년 인근 주택의 개보수 공사를 하다 발굴됐으며, 여기서 출토된 유물을 보관·전시하기 위해 복천박물관을 건립했다.

삼국시대 이전 오늘날의 부산 일대에는 변한 12국 중 하나인 독로국이 있었으며 이후 금관가야, 다시 신라로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복천동 고분군은 6세기 이전 부산 지배층의 무덤 양식과 그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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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고분군의 야외전시장을 둘러보는 시민들.


복천고분군에서는 지금까지 169기에 달하는 유구와 1만여 점의 유물이 발굴됐다. 그중 덧널무덤(54호 무덤)과 구덩식 돌덧널무덤(53호 무덤)은 발굴 모습 그대로를 전시해 당시의 매장풍습을 엿볼 수 있다.

아미동 비석마을처럼 이 일대에도 6·25 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모여 살았다. 다만 원래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인 것을 알았던 아미동과 달리 복천동 일대는 아래에 고분군이 숨겨진 것을 몰랐을 것이다. 발굴 초기만 해도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낮았기 때문에 많은 유물이 유실 또는 파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택 공사 도중 발굴된 무덤에서 항아리에 담긴 물이 나왔는데 사람들이 귀한 물이라고 너나 할 것 없이 떠가는 바람에 정작 학자들은 구경도 못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지워지지 않고 꿋꿋이 살아남은…역사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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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선열들을 위로하는 송공단.


복천고분군에서 동래시장을 거쳐 도착한 곳은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선열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제단인 송공단(宋公壇)이다. 송공단에는 15기의 비석이 있다. 중앙에는 동래부사 송상현을 비롯해 양산 군수 조영구, 동래향교 교수 노개방, 향교 유생 문덕겸·양조한, 비장 송봉수·김희수, 겸인 심여로, 향리 송백, 동래부 백성 김상,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순절한 남성의 위패가 있다. 왼쪽에 따로 담을 둘러 설치한 별단은 여성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송상현을 모시고 있던 금섬, 이름 모를 의녀 두 명,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순절 여성들의 위패가 있다. 오른쪽 구석에는 송상현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묻어 준 동래부 노비 철수와 매동의 충성을 기리는 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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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동래부사가 집무를 보던 동래부동헌.


송공단에서 잠시 묵념을 하고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인 동래부 동헌으로 향했다. 동래부 동헌은 부사가 공무를 처리하던 관청으로, 오늘날로 치면 부산시청과 같은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활용했다. 일제가 시가지 정비를 이유로 보수·철거해 본연의 모습을 많이 잃었다. 현재는 동래부사가 공무를 보았던 충신당(忠信堂), 좌우의 동익랑(東翼廊), 서익랑(西翼廊), 동래부 동헌의 대문이었던 망미루(望美樓), 외삼문인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 등이 남아있다.

동헌을 돌아보고 나오니 앞의 동래시장은 오가는 사람으로 떠들썩하다. 몇백 년 전 동래부 시절에도 동헌 앞은 이렇게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지 않았을까. 아마도 일제는 임진왜란 때부터 끊임없이 이어져 온 굴하지 않는 동래부의 저항역사를 지우려 했겠지만, 그 역사는 오늘날까지 꿋꿋이 살아남아 곳곳에서 흔적을 들어내고 있다.

해운대와 남포동과 서면…. 그 이전부터 이곳에는 동래부가 있었다. 누군가 부산의 역사를 묻거든 함께 동래를 걸어보자. 조선 아니 그 이전으로 올라가는 유구한 역사의 흐름에 마음을 뺏기게 될 것이다.


동래역사탐방, 이렇게 즐기세요
동래구는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옛 동래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탐방코스를 운영한다. 코스는 뿌리길, 장대길, 마시길, 풍류길 등 총 4가지. 소요 시간은 약 1시간30분∼2시간이다. 참가비 무료. 참가인원 20명 이상. 탐방 5일 전까지 동래구 문화관광과(051-550-4082)로 전화 신청하면 된다.


· 동래읍성 뿌리길: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동래장관청∼동래시장∼동래부동헌∼송공단∼부산복천동고분군∼복천박물관∼동래읍성역사관∼장영실과학동산∼북문
· 동래읍성 장대길:충렬사역∼충렬사∼군관청∼동장대∼인생문∼북장대∼북문∼서장대∼동래향교
· 동래읍성 마실길:낙민역∼박차정 의사 생가∼수안인정시장∼동래시장∼송공단∼동래장관청∼동래향교∼명륜1번가∼동래역

· 온천장 풍류길:온천장역∼온천시장∼동래별장∼해양자연사박물관∼부산민속예술관∼임진동래의총∼금정사∼금강케이블카∼동래온천지구∼노천족욕탕∼온정개건비


<알림>
다음 달 `함께 걷는 부산 길'은 11월 13일 다대포 둘레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참여를 원하는 시민은 다이내믹부산 편집부(051-888-1291∼8) 또는 이메일(naeun11@korea.kr)로 신청해 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께는 개별로 연락드립니다. 구체적인 일정은 코로나19 상황이나 날씨에 따라 변경 또는 취소될 수 있습니다.



작성자
하나은
작성일자
2020-11-04
자료출처
다이내믹부산
제호

다이내믹부산 제202011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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