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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연재

가난과 눈물의 땅이 아니다, 이곳은 살아있는 역사다

걸어서 만나는 부산 역사 ‘범일동 매축지마을’

내용

도시철도 1호선 좌천역에서 마을 입구 굴다리를 지나 철길육교를 건넌다. 굴다리는 도심을 통과하는 출퇴근길이자 학생들의 등·하굣길이기도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삶의 관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마을로 들어서자 도심 속 마을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가 감돈다. 빈 바람이 마을을 하릴없이 쓸고 지나가고, 옷깃을 꼭꼭 여민 거리의 사람들은 걸음을 재촉한다. 매축지마을 동쪽의 주택들은 재개발 결정으로 사람들이 이미 떠나고 빈집들만 남아 허허롭다. 곳곳에 빈 주택에서 나온 못 쓰는 가재도구들이 쌓여있고, 담벼락에는 재개발 과정에서 마을사람들간 의견충돌의 대자보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그런 와중에도 연탄은행 자원봉사들이 연탄을 집집마다 돌리고 난 후 밝은 얼굴로 헤어지는 참이다. 이곳은 아직도 연탄으로 겨울을 나는 집들이 대부분이다. 양지 녘에는 할머니들 몇몇이 옹기종기 모여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재개발로 뒤숭숭한 마을 분위기도 아랑곳없이 소소하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매축지마을 

▲매축지마을. 

 

부산 매축사와 일제침략 산증인

 

매축지마을은 바다를 매축해 만든 뭍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모든 것이 1970년대에 멈춰버린 듯 낡고 오래된 것들이 도심속 섬처럼 흐른다. 

 

1902년부터 1945년까지 부산 연안은 일제의 다양한 목적과 필요에 따라 곳곳에서 매축이 진행됐다. 1888년 부산해관 부지 매축을 시작으로 북항매축공사(1902~1908 중앙동 일원 13만2천㎡), 중앙동과 초량 사이 영선산을 헐어 정발장군 동상 앞까지 메운 부산착평공사(1909~1912 중앙동과 초량 사이 14만5천200㎡), 영도 대풍포 매축공사(1916~1926), 부산진매축공사(1913~1932 초량~범일동 99만㎡) 등이다.

 

매축지마을과 미군55보급창 일대는 1927~1932년 제2기 부산진매축 때 생긴 마을이다. 동구 초량동·수정동·범일동 일대와 남구 우암동, 적기 일부에 이르는 해안을 매축하면서 생긴 마을이다. 대동아전쟁 때는 일본군 병참기지가 있던 곳으로, 군수물자와 함께 말을 수용하던 마구간과 훈련장 등이 있었다. 

 

이와 함께 부산항 북항 축항공사가 1936년부터 시작돼 매축지와 연계한 부산항 제3·4부두가 각각 1941년과 1943년 완공됐다. 부산항 제3·4부두가 완공되자 일제는 우암선 철로를 통해 부전역을 거쳐 부산시민공원(옛 하얄리야부대) 자리에 있던 일본군 제72병참경비대까지 전쟁 물자를 실어 나르며 제국주의 침략의 본색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매축지 가옥의 낡은 지붕 

▲매축지 가옥의 낡은 지붕. 

 

귀환동포와 피란민들의 거처

 

일제의 병참기지와 군수물품 야적장으로 활용되던 매축지는 일제가 패망하기 전 징용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임시막사로 건설됐다.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나 군수공장으로 끌고 가기 전 이곳에서 임시로 수용한 후 부산항 4부두를 통해 일본으로 보내려 했던 것.

 

임시막사가 채 건설되기도 전에 일본은 패망하는데, 이 자리에 외국에서 돌아온 귀환동포들이 얼기설기 임시거처를 만들어 살게 된다. 이들은 조선방직·석탄부두 하역·국제고무 신발공장 등에서 생계를 유지하거나 마을에서 음식점·날품팔이 등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특히 조선방직과 신발공장에 다니는 여공들이 대거 이곳에 살면서 큰 마을을 이뤘을 때도 있었다. 매축지마을 남쪽지역(성남이로길)에는 아직도 당시 막사 형태를 유지한 건물이 줄을 이어 자리하고 있다. 두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힘들 정도의 골목을 사이에 두고, 16.5㎡ 정도의 집들이 마주 보고 있는 형태다. 

 

집에 주방이 따로 없어 문 앞에 부엌을 만들어 세탁기·물통·빨래 등을 놓고 생활한다. 공용화장실도 많이 보이는데, 한때 마을 공중화장실이 90여 개나 되던 시절도 있었다. 매축지 마을에는 '2개(부엌·화장실)는 없고 3개(빈집·공중화장실·노인)는 많다'는 자조 섞인 말이 나돌기도 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주민들이 나이 많은 어르신들로, 거의가 50~60년 이상 이 마을의 터줏대감으로 살아가고 있다. 큰 화재와 태풍 등으로 마을이 사라질 위기에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다시 일어났다. 몇 년 전부터 영화 촬영지로, 아름다운 벽화마을로 널리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매축지마을 

▲매축지마을. 

 

55보급창과 매축지마을 화재

 

55보급창은 매축지마을 동쪽, 범일5동 252번지에 위치한 23만1천㎡ 규모의 미군 군수보급 창고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군수물자를 보관하기 위해 조성됐다. 부산항 3·4부두에서 부전역과 하얄리아부대를 잇는 일본군 군수품을 운반하던 우암선의 기종점이기도 했다. 1950년 8월 이후부터는 부산항으로 반입되는 미군 군수품을 일시 보관했다가 전국 미군부대로 보급하는 보급창 역할을 수행했다. 1954년에는 하천을 따라 55보급창 기름 탱크와 연결된 송유관에서 하천으로 새나간 기름이 담뱃불에 붙어 온 마을을 다 태웠던 적이 있었다. 180여 명의 사상자를 낸 큰 화재로 마을 사람들은 또 한 번 절망의 나락을 곱씹어야 했다. 현재는 비어있는 55보급창에 대한 반환운동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이곳을 시민공원으로 조성하자는 여론이 번지고 있어 그 결과가 주목된다.

 

새로 써야 할 부산의 매축사

 

부산진역 인근 동부경찰서 마당에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부산진 매축비'가 있다. 이 비는 부산진 매축에 관여한 일본 나고야 지역의 자본가들이 부산진 매축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다. 나고야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주선기업주식회사가 1913~1937년에 걸쳐 총 132만㎡의 부산진 일대를 매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부산진에서는 1913~1932년 1·2기에 걸쳐 모두 99만㎡가 매축됐다. 나고야 자본가들은 1913~1917년 진행된 제1기 매축 때 이중 42만9천㎡를 주도적으로 매축했다. 이후 조선방직이 들어서자 제2기 공사에 속하던 영가대 앞 3만3천㎡를 추가로 매축했다. 이처럼 일제는 일제강점기를 통해 조선인의 노동력을 헐값으로 이용, 이익을 챙겼다. 이도 모자라 잘못된 사실을 영구적으로 빗돌에 새겨 그들만의 역사로 남겨놓은 것이다. 강제징용 역사에 대한 일본의 태도가 논란인 요즘, 빗돌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매축지마을의 골목 

▲매축지마을의 골목. 

 

가슴 아픈 역사 반복 없어야

 

매축공사에 동원된 인력은 조선인과 중국인·일본인들로 그중 조선인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품삯은 일본인의 절반, 중국인의 3분의 2 수준으로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목숨을 걸고 매축공사에 참여했던 것이다. 부산의 매축지는 일제 자본에 의해 강제된, 부산 수탈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공간이다. 이곳의 개발에 동원된 인력은 대부분 조선인이었으며, 불합리하고 위험한 노동환경에서 착취당했다.

 

최근 일제강제징용피해에 대한 법원 판결에서 분노를 사는 것은 일본의 이중성이다. 일본은 중국에게는 합의금을 지급하라고 한 반면, 국내 기업에게는 화해에 응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이 무겁게 들린다.


글·최원준 시인/사진·문진우 기사 입력 2018-12-06 다이내믹부산 제1853호
자료출처 : 다이내믹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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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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