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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

부마항쟁 40주년…‘10월 16일’ 국가기념일 지정

“위대한 부산시민 여러분이 해냈습니다!”

내용

박정희 유신독재 무너뜨린 ‘시민 항쟁’

4·19→부마→5·18→6월 항쟁→촛불혁명

영화 상영·학술대회 등 기념행사 풍성

문 대통령, 현직 대통령으로 첫 참석 전망



‘억눌린 우리 역사/ 터져 나온 분노/ 매운 연기 칼바람에도/ 함성소리 드높았던/ 동트는 새벽벌/ 시월이 오면/ 핏발 선 가슴마다/ 살아오는 십 일육/ 동지여 전진하자/ 깨치고 나가자/ 뜨거운 가슴으로/ 빛나는 내일로’ -10. 16. 부마민중항쟁탑-


부산·마산 시민, 유신독재에 맨몸 항거

부산과 경남 시·도민이 뜨겁게 열망해온 부마민주항쟁일 국가기념일 지정이 드디어 확정·공포됐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9월 23일 자 관보에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을 공시했다. 행안부는 “항쟁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하고, 그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최초 발생일인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부마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40주년인 올해부터 정부 주관 공식기념 행사로 치러진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닷새간 부산과 마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회원구)에서 일어난 ‘시민 항쟁’이다.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를 끝내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냈으며 ‘4·19, 5·18, 6·10 항쟁’과 함께 ‘4대 민주화운동’으로 불린다. 행안부와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은 올해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일 슬로건을 ‘부마 1979, 위대한 민주 여정의 시작’으로 내걸고 본격적으로 행사 준비를 시작했다.


△부산과 경남 시·도민이 뜨겁게 열망해온 부마민주항쟁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닷새간 부산과 마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회원구)에서 일어난 ‘시민 항쟁’이다.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를 끝내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냈으며 ‘4·19, 5·18, 6·10 항쟁’과 함께 ‘4대 민주화운동’으로 불린다.

 사진은 부산민주공원을 찾은 시민들이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걸개그림에 색칠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국제신문
 


올해 첫 국가 주관 행사로 열려 

국가 주관 행사로 진행될 40주년 기념식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열린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기념사를 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현직 대통령이 부마항쟁 기념식에 참석한 적은 없었다.

부산과 창원에서는 항쟁 40주년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BIFF)와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은 10월 8∼9일 중구 남포동 비프광장과 대영시네마 일원에서 가칭 ‘리멤버(Remember) 부마’ 행사를 선보인다. ‘리멤버 부마’에서는 항쟁 기념 영화를 상영하고, 토크쇼를 진행하는 등 다양한 부대행사가 함께 한다. 10월 8일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항쟁’, 9일에는 ‘기억의 정치학과 희망의 원리’라는 부제로 각각 부대행사가 열린다. 8일에는 항쟁 40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 상영에 이어 '부마항쟁 계승'을 주제로 토크콘서트를 개최한다.

10월 17일 창원 경남대와 10월 18∼19일 부산 해운대 벡스코에서는 ‘부마민주항쟁 국제학술대회’가 열린다. 부마항쟁 40주년 기념전 ‘부마 1979·유신의 심장을 쏘다!’는 지난 7월 4일 서울에서 시작돼 10월까지 광주, 창원, 부산으로 이어진다. 이 밖에 ‘시민참여 공연예술축제’, ‘전국민주시민합창축전’, ‘부마민주음악제’, ‘부마민주영화제’ 등 문화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부마항쟁 발원지인 부산대 교내 자연과학관 옆 녹지 공간에는 항쟁 40주년을 기념하는 조형물 설치를 위한 협의가 진행 중이다.


국가기념일 지정, 부산·경남 힘 모은 결실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은 부산과 경남이 손을 맞잡은 결실이다.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지역 여·야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 등은 한마음·한 목소리로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에 힘을 모았다. 부산시는 지난해 10월 25일 부산시청 1층 대회의실에서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범국민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 출범식을 열었다. 출범식에는 부산시의회와 경남도의회,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시민사회단체 등이 함께했다.

추진위는 출범식 직후 진행된 국가기념일 지정 촉구 서명식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부마항쟁의 정신과 의미를 전 국민에게 널리 알려 나가고 국가기념일 지정을 위한 100만 명 서명 운동을 활발하게 추진했다.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은 부산과 경남이 손을 맞잡은 결실이다. 부산시와 경남도, 지역 여·야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 등은 한마음·한 목소리로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에 힘을 모았다(사진은 지난해 10월 25일

 부산시청 1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범국민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부마항쟁 국가기념일 지정을 촉구하는 모습).
 


■부마민주항쟁 역사적 배경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배경은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으로 불리는 비상조치 선포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헌법적 비상조치인 10월 유신 선포로 박정희 정권은 종신집권과 제왕적 지위를 확보한다. 유신 체제가 강화될수록 국민 저항과 민주인사,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은 가속화됐다.

유신 체제는 국민적 저항, 정치·사회적 갈등을 빚어오다 1979년 한계에 이르렀다. 각종 시국사건을 이끈 반정부 인사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연행·체포·고문·연금 등 강압책이 잇따랐다. 특히 8월에는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가 부당 폐업에 반대하며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의 폭력적 진압으로 22세 여성 노동자가 사망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한다. 10월 초에는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강력히 비판하던 김영삼이 의원직에서 제명된다.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갈등으로 치닫고 이런 상황에서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 교내에서 학생들이 반유신 시위에 나선다. 부마민주항쟁의 불꽃이 오른 것이다.


■경과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에서 500여 명의 학생들이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부르짖는 목소리와 함께 부마민주항쟁은 시작됐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나눠주며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가두시위에 돌입했고, 이를 막으려는 경찰과 곳곳에서 충돌했다. 비슷한 시간, 동아대에서도 1천여 명의 학생들이 시내에 진출, 부산대생들과 합류해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됐다.

이튿날인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됐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화이트칼라, 노동자, 상인, 고교생 등 다수의 시민이 시위에 동참했다. 10월 18일, 시위는 마산까지 확산됐다. 1천여 명의 경남대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집결하고 시민이 가세했다. 19일에는 대학생뿐만 아니라 일부 고교생까지 동참해 시위대 숫자는 급격하게 불어났다. 당국의 예상과 달리 일련의 사태 전개는 박정희 정권 존립 자체에 심각한 위기로 다가왔다.


■의의·평가

박정희 정권은 시위가 확대되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10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한 지 2일 뒤인 10월 20일 정오를 기해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통행금지가 연장되고, 무기한 휴교 조치가 취해졌다.

계엄령 이후 부산에는 강도 높은 진압이 이뤄졌다. 계엄령과 위수령 발동 후 부마민주항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진압됐다. 하지만 부마항쟁 열흘 만에 10·26이 일어났고, 유신 체제는 종언을 맞았다. 부마항쟁은 유신정권 붕괴를 앞당긴 결정적인 시민 항쟁이다. 4·19혁명 정신을 이어받은 부마항쟁 정신은 이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을 거쳐 촛불혁명에까지 이어졌다.


■향후 과제

부마민주항쟁 이후 수십 년 동안 전과자 낙인을 안고 살아온 관련자가 최근 재심을 통해 잇따라 무죄를 선고받고 명예를 회복하고 있다. 하지만 불법 구금과 가혹행위에 관한 국가배상은 재판부마다 엇갈린 판단을 내놔 피해 회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무총리실 산하 부마항쟁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9월 5일 부마민주항쟁 당시 변사체로 발견됐던 고 유치준 씨에 대해 사망자로 인정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고인의 ‘사망 경위’와 당시 경찰의 ‘사망 사실 은폐’, ‘부마항쟁과 연관성’ 등을 따져 사망자로 의결했다. 이는 지금까지 진상규명위원회에 접수된 피해 사실 300여 건 가운데 첫 ‘부마항쟁 사망자’로 공인된 것이다. 유 씨의 죽음 이후 꼬박 40년 만이다.

부마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유치준 씨가 늦게나마 부마항쟁 관련 첫 사망자로 인정됐지만, 아직 풀어야 할 과제는 많다. 무엇보다 남아 있는 희생자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 올해 말 종료되는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을 연장하고, 조사위원회 인원이나 권한도 더 확대되도록 법이 개정돼야 한다. 4·19혁명 등과 함께 4대 민주항쟁인 부마민주항쟁이 40주년을 맞는 올해 국가기념일 지정을 계기로 제대로 된 역사적 재평가와 진상규명,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힘을 얻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사는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의 자료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조민제 기사 입력 2019-09-27 다이내믹부산 제201911호
자료출처 : 다이내믹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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