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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역 독립운동

구포시장의 의거

부산진과 동래지역의 학생층과 민중들의 의거는 곧 부산인근지역으로 알려졌고, 여기에 크게 고무 받은 부산인근 지역민들도 시위대열에 동참하였다. 특히 구포의거는 청년학생 들의 주도로 일반 민중들의 참여로 인해 시위가 훨씬 적극성을 띠었고, 일경의 탄압도 더 더욱 폭력적이었다. 구포는 낙동강 하류의 포구로서 북쪽은 양산, 남쪽은 부산, 서쪽은 김해, 동쪽은 동래를 거쳐 울산으로 통하는 요충지대이며, 경남 각지로 통하는 수륙 운송의 중계지이기 때문에 상업이 번창하였던 곳이다. 이같은 상업중심지 구포에도 서울의 3.1운동 소식과 아울러 인근 부산, 동래읍의 민족의거의 소식이 전해졌다.
구포의거는 경성의학 전문학교에 다니는 양봉근이 구포로 내려와 평소 안면이 있는 구포 면 서기 임봉래와 윤경 등에 의해 거사가 도모되었다. 3월 27일, 28일 주동 인물인 임봉래, 류기호, 윤경외 11명은 구포면 구포리 박영초, 이수련집에 모여 모의를 거듭한 끝에 3월 29일(음력 2월 28일)구포 장날 거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각각 수백매를 만들었다. 3월 29일 주동 인물들은 준비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비밀리에 박덕홍, 손진태, 김장학, 이몽석, 양대용, 김영길, 정치호, 정용학, 안화중, 허희중 등 청년 동지들에게 나누어 주고 정오를 기해서 구포장터에서 장꾼 1,000여명과 더불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박덕홍은 대형 태극기를 흔들면서 또 안화중은 시위를 하기 위하여 시장 철시를 호소하면서 장꾼을 지휘하였다. 김윤길 등은 구포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 윤영대에게, 민족적 양심으로 뉘우치고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때 김옥겸 외 11명의 주동인 물이 현장에서 검거되어 구포 주재소에 구금되었다. 이에 임봉래, 윤정은 등은 '구금된 애국동지를 석방하라'고 외치면서 청년동지 윤장수, 김달수, 백인봉, 윤경봉 등 30여명과 더 불어 1,200여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주재소로 돌진하여 구금된 동지들을 구출하려고 하였다. 마침내 일경들은 시위군중들에게 무차별 총탄을 퍼붓기 시작하자 군중들은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위에서 일경 추산으로 일군경 3인과 조선인 경찰 1명이 중상을 입었고, 시위군중 9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신에 수많은 총탄을 맞아 중상을 입은자가 있었던 것으로 볼때 시위 군중 가운데 부상자는 이 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구포장터 의거에서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42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모두 부산 지방법원에서 예심에 회부되어 조사에 오랜 시일을 끌어 이들의 고초는 말할 수 없었거니와, 이중 유진영, 최종호, 노원길은 면소되었고, 최한봉, 정태호는 방면되었으나, 나머지는 4월에서 1년 6개월에 걸친 징역 형을 받았다. 공판이 끝난 것은 1919년 8월 7일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20, 30대의 청년 또는 농민, 상인, 근로자들이었다.

동래고보 학생의거

동래고보 학생의거는 일신여학교의 의거가 있기 전인 1919년 3월 7일부터 본격적으로 논의 되었다. 3월 7일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대표는 동래고보 학생대표 김귀룡, 고영건, 엄진영 등을 찾아가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이후 졸업반 4학년인 엄진영, 김귀룡, 고영건 등은 서로간에 거사의 모의를 시작하였다. 또한 3월 10일 경에는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에 다니 던 곽상훈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와 동래고보 수학교사 이환을 찾아 가서 독립선언서를 보이면서 동래에서의 의거를 상의하였다. 이환선생은 이를 쾌락하여 동래고보 학생 의거의 배후 참모역할을 담당함으로써 학생의거의 계획은 보다 철저하게 진행되어 갔다. 당시 동래고보에서는 교사 김병규가 지리를 담당하면서 몰래 한국사를 학생들에게 강의하여 주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민족의식은 상당히 고취되어 있었다. 주동 학생들은 동래 읍 학소대와 복천동에 있었던 엄진영의 집 등에서 모의하였다. 이들은 우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와 독립만세기를 제작하기로 하여, 3월 13일(음 2월 12일) 동래읍 장날 오후 2시에 거사를 단행하기로 하였다.

약속된 오후 2시가 되자 엄진영은 군청앞 망미루(옛 날의 군청 정문)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주위에 모였던 40여명의 학생들과 수많은 군중들이 일제히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대한독립 만세"라고 쓰여진 2개의 기치가 세워지고 독립선언서와 수백매의 전단이 뿌려져 삽시간에 군청앞은 흥분의 도가니로 변해 버렸다. 이때 동정을 살피던 수백명의 일경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가운데 한국인 경찰관과 헌병보조원도 모자와 제복을 벗어 버리고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군경의 기마병 20∼30명과 일군 50명이 들이 닥쳐 주동학생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주동자인 엄진영, 고영건, 서진령 등 24명은 검거되어 동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형량이 구형되었다. 징역 2년 6개월 : 엄진영, 김귀룡, 징역 1년 6개월 : 김인호, 고영건, 이상덕, 추규영, 김진형, 서진령, 김기삼, 김성조, 신종은, 김원용, 박덕용, 정호종, 징역 6개월 : 윤삼동외 7명 이었다. 이들이 실형을 언도 받은 때는 각각 미결구검 1년 6월에서 4월이 지난때였었다.

한편, 동래고보 학생의거의 배후 참모역을 한 곽상훈은 서울에서 검거되었다. 재판받아 징역 4월을 복역했던 윤삼동 등 9명은 1919년 8월 14일 가석방되었다. 부산, 동래에서 이 같은 학생들의 의거는 이 고장의 학생들과 젊은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어 그들로 하여금 독립투쟁의 대열에 앞장서게 되었다. 한편, 동래고등보통학생 의거의 주동 인물들은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후 『붉은 저고리 친목회』를 조직하여 세 번 이나 회합을 가졌고, 네번째 회합에서 일경에 발각되어 강제 해산을 당하였다.

동래 범어사의 학생의거

이담해 등은 곧 범어사와 관련된 김법린, 김영규, 차상명과 지방학림 대표 김상기 그리고 명정학교 대표 김한기 등 7명의 대표자들 을 한 자리에 모여 논의한 결과, 서울의 3.1거사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곧 상경하였다. 한편, 당시 범어사 지방학림을 졸업한 김법린과 같이 서울 불교 중앙학림(현 동국대 전신)에 재학하던 김상헌은 동학교 학생들의 모임인 유심회(惟心會)에 가담하여 불교교리 연구와 민족사상에 대하여 한용운의 지도하에 "유심"이라는 교내 잡지를 발간하였는데 그는 그 편집실무를 맡고 있었다.
이들은 서울 탑골공원에서 각 학교 학생대표들과 수만명의 민중들을 지도하는데 동참하였으며, 전국적인 민중들의 항거를 위해 각 지역대표에게 지도 연락 하는 책임도 지고 있었다. 동래 범어사 연락책인 김법린과 김상헌은 한용운의 지시에 따라 3월 14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범어사로 내려왔다.

이때 이미 부산진 일신여학교와 동래고보 학생들의 거사가 일어난 후였다. 이들은 범어사 학생들을 중심으로 의거를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3월 18일(음력 2월 17일) 동래읍 장날에 거사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오계운의 밀고로 주동자들은 연행되었다. 그러나 18일날 밤 이 근우, 김해관, 김재호, 윤상은 등 40여명의 명정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들은 동래읍 서문 근방에서부터 의거를 시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외치면서 동래시장을 거쳐 남문에 이르기까지 행진을 하여 해산하였다. 3월 19일 아침, 윤산은, 허영호, 이영우, 황학동 등은 먼저 허영호가 작성한 『일사는 자유를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는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격문(삐라) 수백매를 동래 시장통에서 군중들에게 미리 배부하고, 5시경, 이근우, 양수근, 김영식, 오시권, 황만우 등을 비롯한 수십명의 양교 학생들은 동래시장 남문 근방에서부터 시위를 시작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잇따라 소리 높이 외치면서 동래경찰서 앞으로 돌진하였다.

한편, 3월 19일 오후 6시경, 김해관, 김재호, 최응권을 비롯한 수십명의 다른 학생들은 별도로 동래시장에 집합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잇따라 소리 높이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계속되는 부산지역민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일경은 무자비한 탄압이 닥쳐왔고 주동 인물의 검거가 계속되었다. 범어사 학생의거에 관련하여 차상명, 김한기 , 김상기, 정성언, 김해관 등 34명이 검거되었다. 시위의 주동자들은 6개월 내지 3년의 징역 언도를 받아 부산 감옥 또는 대구감옥에서 치렀다. 3.1운동 후 범어사 명정학교, 지방학림은 해체되어 그 후 중등 3년과정의 불교전문학원이 설치되어 8.15 광복 전까지 존속하였다.

부산의 학생 항일 운동(소위「노다이」사건)

부산학생 항일운동(소위 노다이 사건)은 1940년대 일제의 태평양전쟁으로 최후의 발악을 하던 시기에 학생들에게 군사교육을 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1919년 3.1운동과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운동, 동래고보, 부산진 일신여학교, 동래 범어사 학생의거 등의 항일정신을 이어받아 부산에서 소위 『노다이 사건』으로 표출되었다.
1940년 11월 21일 일본군 노다이(육군대좌)의 총지휘로 경남학도연합 군사대연습이 부산, 경남의 중등학생들을 경기관총과 38식 소총으로 무장시켜 동군 부산2상 (한국인학교), 부산중(일본인학교), 부산1상(일)으로 구포역에서 김해방면으로, 서군(동래중학(한), 마산 중학(일), 진주농(한), 진주중(한)으로 진영역에서 김해방면으로 진격하는 모의 전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때 민족차별에 한국인 학생들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또,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입장때에도 전년도 우승교인 동래중 보다는 부산중학을 먼저 입장시키는 등 차별은 계속 되었고, 이에 항의하였으나 묵살당하였다. 담가(擔架)경기 때도 동래중학이 1위를 하자 재시합을 시켰다. 무장행군시에는 전년도 1등인 부산2상을 가장 불리한 코스에 배치시켰으나, 1위를 달리자 반칙을 선언하여 우승을 놓쳐버렸다.
이와 같은 차별에 대해 동래중과 부산2상 학생들은 폐회식 참가를 거부하였으나 학교의 요청으로 참여하였고, 폐회식이 시작 되자 학생들은 울분이 폭발하여 일장기 하강식때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렀고, 마침내 울분이 폭발하여 운동장은 아수라장의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이에 놀란 경남지사와 노다이, 일경은 도망을 쳐버렸다. 학생들은 교사들의 만류에도 양교생들은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여, 1,000여명이 시내를 행진하면서 '황성옛터' '아리랑' 등을 부르면서, '조선독립만세!' '일본놈 죽여라!'하고 외치었다. 하오 7시경에는 중앙동 부근에서 4, 5학년은 재집결하여 노다이 관사를 습격하기로 하고, 8시경 항거의 횃불은 영선고개를 거쳐 부산터널 부근 노다이 관사로 향하였다. 그러나 노다이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마침내 저녁 10시경에는 부산헌병대에서 각 경찰서에 긴급지령을 내려 시위학생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여 200여명을 검거하였다. 이중 주모자로 지목된 15명의 학생은 송청, 투옥되었다. 부산2상 학생은 홍병희, 이병도 등 6명이었고, 동래중학 학생은 김인규, 김영조 등 8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부산지방법원의 제1심 재판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 3년에서 징역 8월 선고를 받은 학생은 모두 12명이었다.
이들 12명은 즉시 대구복심법원에 공소제기, 대구형무소에서 제2심을 유복자인 추유복의 가정형편을 동정한 동지들의 위증으로 무죄를 선고받는 등 우정어린 옥중미담을 낳기도 하였다.

이 사건의 지독한 고문과 옥중생활의 여독으로 출옥한 후 2주일 만에 순국한 김선갑(부산2상)과 김명수(동래중학) 두 사람이 있었다. 양교의 자체적인 학생처벌에서도 퇴학 21명, 정학 44명, 견책 10명 등의 희생자를 내었다. 이와 같이 부산 학생사건은 포악한 일제에 항거하여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발휘한 학생의거이며, 일제말기 국내에서 전개된 대규모적인 항일투쟁 중에서도 최후의 것에 속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독립정신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것을 뚜렷하게 밝힌 것이었다.
당시 일제의 엄중한 보도 관제만 없었더라면 이 사건은 광주학생 사건보다도 더한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을 것이다.

부산진 일신여학교 의거

부산진 일신여학교(동래여고의 전신)는 1895년 10월 15일 호주 선교단에 의해 좌천동에 설립되었다. 이후 일제로부터 우리의 주권을 빼앗기게 되니 우리 민족과 일본제국주의 간에는 대립과 항쟁이 치열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속에서 교육 받고 자란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부산에서 선도적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월 2일, 3일경 서울로부터 부산지역에 독립선언서가 비밀리에 학생대표단들에게 전해지면서 일신여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에 연락이 닿았고 학교별로 나름대로 의거 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이때 일신여학교 측에서는 학생 이명시가 연락을 담당하였으며, 평소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온 주경애, 박시연 선생은 비밀결사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던 부산상업학교 학생들과 연락을 취하는 한편, 일신여학교 동료 교사들을 규합하였다

또한 졸업시험을 며칠 앞둔 고등과 4학년 학생들에게도 궐기하자고 권유하였고, 3월 10일 기숙사의 고등과 학생들은 밤을 새워 태극기 100개를 만들어 11일의 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1일 오전 9시경 고등과 학생 김응수, 송명진, 김반수 등 11명과 교사 주경애, 박시연과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숙사문을 뛰쳐 나와 좌천동 거리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고, 서울의 3.1 독립운동에 대해 듣고 있었던 민중들은 여기에 크게 호응하여 학생들과 합류하였고, 시위 군중 수백명은 감격에 넘쳐 힘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의 시위는 밤늦은 11시까지 계속 되었으나, 일본군경이 대거 출동하여 여학생 전원과 여교사 2명을 부산진 주재소로 연행하 면서 일단락되었다.

일신여학교 학생들과 교사는 옥중에서도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일경들의 한결같은 문초 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욕설과 뺨을 때리고, 구둣발로 차는 등 그 만행의 횡포가 말로 형 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관련자들은 부산감옥에 수감되어 1919년 4월 26일 여 학생들은 징역 6월을 언도 받았고, 여교사 주경애, 박시연은 각각 징역 1년 6월을 언도 받 았다. 이 의거에서 여학생이 아닌 박연이라는 16세 처녀도 시종일관 여학생들과 행동을 같 이 했기 때문에 징역 6개월의 언도를 받아 여학생들과 같이 옥고를 치렀다. 일신여학교는 20일동안 휴교령이 내려졌고, 4월 1일에야 개학을 하였다.

이후 학생들의 항일 독립의지는 졸업식 거부로 이어졌다. 일신여학교의 여학생들은 모두가 16세 전후의 나이 어린 소녀들이었고 또 이들이 일제의 침략세력이 가장 깊이 뿌리박은 부산에서 용감히 시위항쟁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3.1운동사에 있어 다른 지방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었고 또 그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부산진 일신여학교의 여학생 의거는 당시의 경상남도의 3.1운동의 첫 화살을 던지게 되어 그 후 경남 각지에서 만세 의거가 뒤를 이어 일어나게 되었다.

정관 좌천시장 의거

정관 좌천시장 의거는 기장군 기장읍 교리에 거주하는 김수용으로부터 오해환(吳海煥)이 독립선언서를 입수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오해환은 오진환, 김종복, 신두성, 김윤희, 정 지모, 박일봉 등 면내의 유지들과 함께 김종복의 사랑방을 밀회장소로 정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4월 8일(음 3월 9일) 좌천장날을 기해 거사를 도모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앞서 이들은 목욕재계하고 조용산 산마루와 용산암에서 대한독립만세와 의거 성공을 기원하는 천제(天祭)를 지낸 다음 혈서구국의 맹세를 하였다 한다. 4월 8일(3월 9일(陰) 장날이 되자 이른 아침부터 5 ∼ 6백명의 농민들이 장꾼을 가장하여 시장통으로 모여들었고, 오전 7시 경 각처에서 운집한 장꾼들이 붐빌때 오진환 등 5명의 동지들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니 주위의 수많은 군중들이 합세하였다.

이에 놀란 일경들은 총검으로 무장하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오진환 등 50여명이 좌천주재소로 연행되자 시위 군중들은 주재소를 2중 3중으로 포위하여 투석전을 벌이며 석방을 요구하여 연행자 전원을 구출하기도 하였다. 의거에 가담하였던 신두성, 김윤희, 정지모 등은 검거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의사들은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이란 죄명으로 10월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김윤희 · 정지모는 고문의 여독으로 즉사하고, 신두성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사망하였고, 오진환은 일경의 눈을 피하여 상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박일봉은 국내에서 피신하여 전전하다가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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