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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갑

부산 동래 원리(안락동)에서 1889년에 태어났다. 1910년 동명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경남지역의 연락책임자로 활약하다가 일경에게 쫓기어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였던 그는 동년 4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大韓民國臨時議政院) 경상도 대표위원(慶尙道代表委員) 및 군무위원회 이사(軍務委員會理事),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차장(國務院次長), 교통부위원(交通部委員) 등으로 초기 임시정부 업무수행에 공헌하였다.

1921년 5월에 북경에서 개최된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국내노동당(國內勞動黨) 대표로 참석한 그는 그곳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하여 임시의정원을 취소하고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로서 대체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조선공화정부(朝鮮共和政府)를 수립하여 이상룡(李相龍)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재무총장(財務總長)이 되었다.

그리고 동년 10월에는 이승만(李承晩)·정한경(鄭翰景) 등이 미국정부에 제출한 위임통치청원서(委任統治請願書)가 무효임을 주장하고 통박하였으며, 1923년 6월 3일에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임정옹호파가 되어 창조파(創造派 : 反臨時政府派)인 신 숙(申肅)·윤 해(尹海) 등의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명의도용에 대하여 13도 총간부의 이름으로 성토·규탄하였다.

이어 1924년 12월에는 박은식(朴殷植) 국무총리의 조각(組閣)에 참여하여 노동총판(勞動總辦)으로 임명되었으며, 1926년 2월 14일 김 구(金九) 국무령(國務領)의 추천에 따라 국무원(國務員)에 임명되었고 1927년 1월 15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 의원으로서 새로운 임정 약헌기초위원(臨政約憲起草委員)에 피선되었다. 또한 동년 2월 23일에는 상해인성소학교(上海仁成小學校) 진급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고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격려하였다.

1928년 7월 임시정부 이동녕(李東寧) 주석(主席) 재직시에 재무부장(財務部長)에 임명되었고, 1930년 3월에는 이동녕·김구를 따라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고 특사를 국내외로 밀파하여 취지 선전과 연락을 도모하였다. 1933년 3월 14일 상해(上海) 프랑스 조 계(佛租界) 김신부로(金神父路) 광제의원(廣濟醫院)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김법린

부산 동래에서 1899년에 태어났다. 범어사 명정학교 보습과를 졸업 후,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에서 불교경전을 수학하였다. 불교 승려로서 3·1운동 때 서울에서 한용운(韓龍雲)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동래 범어사(梵魚寺)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범어사의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올라갔으며, 3월 4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범어사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계획해 갔다. 그리하여 3월 18일 동래읍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만세운동 후 일경의 경계망을 피하여 1919년 4월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이 때 그는 불교학교인 중앙학림(中央學林) 내에 설치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의 대표 자격으로 파견된 것이었다. 한국민단본부는 승려 백초월(白初月)을 중심으로 중앙학림 출신 승려 수십 명이 결성한 항일비밀결사로서 기관지「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는 한편 군자금 수합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민단본부에서는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등지에 부원(部員)을 파견하여 국외독립운동과의 연결을 꾀하였다. 이러한 임무를 띠고 상해에 파견되었던 그는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국내 파견원의 자격으로 1919년 5월경 다시 국내에 들어 왔다. 국내에서 그는 상해의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국외 독립운동의 소식을 국내에 전달하기 위하여 「화신공보(華新公報)」를 발간하여 지방까지 배포하면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만주로 넘어가 안동현(安東縣) 육도구(六道溝)에 동광상점(東光商店)으로 위장한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고 상해의 신상완(申尙琓)과 백성욱(白性郁), 국내의 김상헌(金尙憲)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승려들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0년 초 의용승군(義勇僧軍)을 계획하고 국내에 들어왔으나 사전에 동지가 피체됨으로써 다시금 상해로 망명하였다. 의용승군 계획은 사전 발각되어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으나, 전국의 승려들을 군사체제로 조직하여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뜻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의용승군 계획이 좌절된 직후 그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승려로서 외국 유학을 떠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폭넓은 세계를 접하고 그 속에서 조국 독립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유학에 나선 것이었다. 그는 프랑스 파리대학 문학부(文學部)에 재학하면서 한편으로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피압박민족대회(被壓迫民族大會)에서 한국 대표로 활약했다. 프랑스 유학을 마친 그는 1928년 초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29년 봄 조선어학회가 주관하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으로 참가하였다. 이렇듯 표면활동과 함께 비밀결사를 통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니, 그것이 만당(卍黨)의 결사운동이다.

만당은 불교계 민족운동의 지도자인 한용운의 지도 아래 김법린과 조은택·박창두 등 승려들이 1930년 5월에 조직한 항일비밀결사였다. 이러한 만당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배척하였고,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주장하며 경남 사천의 다솔사(多率寺)를 근거지로 비밀투쟁을 전개하였다. 만당은 국내뿐 아니라 일본 동경(東京)에 까지 지부를 설치하였는데 김법린은 동경지부의 책임을 맡았다. 그런데 만당의 조직이 1938년 말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얼마 안 있어 1942년 10월 소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다시 피체되었다.

이 때 일제에 피체된 회원은 그를 비롯하여 32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일제의 취조과정에서 '불로 지지기', '공중에 달고 치기', '비행기 태우기' 등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악형의 고문을 2년 넘게 당하다가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김병태

부산 동구 좌천동(이명:斌·彬·曺國棟)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좌천동 서당 육영재(育嬰齋)를 다녔다. 1918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민족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吉林省)에서 김원봉(金元鳳)이 일제의 관공서 파괴 및 일본 고위관리의 암살 처단을 목적으로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자 단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9월에는 김원봉과 협의한 후 동 단원 박재혁(朴載赫)을 국내로 밀파,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전개하여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데 적극 관여하였다. 또한 1928년 중국 상해에서 김원봉과 함께 침체의 늪에 빠진 의열단을 정비하고자 제3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고 활동방향을 재정립하였다.

1931년 후반기부터 본격화되는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으로 촉발된 중국민의 반일의식을 배경으로 김원봉의 의열단에서는 중국 국민당정부(國民黨政府)의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토대로 독자적인 항일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한중연합방안을 타진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장개석(蔣介石)의 원조로 김원봉은 중국 남경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교외의 탕산(湯山)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설립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김원봉과 함께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항일 투쟁 사관생도를 양성하여 조국의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하였다.

1934년 3월 중국 남경(南京)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 제2차 대표자대회가 개최되자 의열단원 박건웅(朴建雄) 등과 함께 조선의열단 대표로 참석하여 유일당 건설을 결정하였다. 1935년 7월 모든 한국독립운동단체들이 총 결집하여 유일당으로 건설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창당되자 민족혁명당의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1936년 이후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비서로 활동하면서 중국측에 보내는 문서 집필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40년 9월, 중경(重慶)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韓國光復軍總司令部)가 창설되자 광복군에 지원하여 활동하였으며, 1945년 3월 왕영재(王英哉) 등과 함께 인도(印度) 파견공작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김원봉이 귀국하여 1946년 8월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자 중국 상해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다가 중국 남경에서 병으로 서거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박재혁

부산 동구 범일동에서 1895년에 태어났다. 부산진보통학교(釜山鎭普通學校)와 부산상업학교(釜山商業學校)를 졸업하고 부산전기회사 전차차장으로 있었고 경북 왜관에서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던 중 1917년 6월 주인으로부터 자본금 700원을 얻어 상해로 가서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18년 6월 귀국하였다.

그는 보통학교와 상업학교 동창인 동지 최천택(崔天澤)에게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투쟁할 것을 말하고 기회를 노리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상해로 가서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는 한편 여러 독립투사들과 교제하였다.

1920년 3월에 귀국하였다가 8월에 상해로 가서 김원봉을 만나 군자금 3백원을 받아 부산경찰서를 파괴하고 그 서장을 사살할 것을 계획하였다. 동년 9월 상순 폭탄을 휴대하고 상해를 떠나 동월 13일 부산에 상륙하였다. 그는 다음날(14일) 오후 2시에 고서보따리로 위장한 폭탄을 등에 지고 경찰서로 서장을 찾아 서장과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몇마디 환담을 한 그는 고서를 꺼내는 척 하면서 폭탄을 꺼내들고 서장을 유창한 일본말로 꾸짖고 폭탄을 던져 폭발시키니 서장은 부상을 당하고 그도 중상을 입은채 피체되었다.

그는 모진 악형 끝에 기소되어 부산지방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공소하여 1921년 2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언도받자 다시 상고하여 1921년 3월 3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다시 사형을 언도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몹시 신음하다가 폐병까지 생겨 고통이 심하므로 "왜적(倭賊)의 손에 욕보지 않고 내손으로 죽자"하고 단식하다가 형 집행 전에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재혁 의사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기념사업회에서 어린이대공원 내에 동상을 건립하여 의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

[출처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박차정

부산 동래 복천동에서 1910년에 태어났다. 1924년 5월 조선소년동맹(朝鮮少年同盟) 동래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일신(日新)여학교에 재학 중 조선청년동맹(朝鮮靑年同盟) 동래지부 집행위원장인 숙부 박일형(朴日馨)의 권유로 조선청년동맹 및 근우회(槿友會) 동래지부 회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3월 일신학교를 졸업한 뒤 동년 7월 서울 수운회관(水雲會館)에서 개최된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 동래지부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동년 9월에는 조사연구부장·상무위원·선전 및 출판부장 등의 직책을 맡아 여성들의 민족운동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근우회 중앙간부들과 함께 서울 시내 각 여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반일학생운동으로 확산시키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후 1930년 1월 부산방직(釜山紡織) 파업사건을 주도하다가 동래에서 피체된 그녀는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1930년 2월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그녀는 1931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결혼하고 의열단 단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 의열단이 한중연합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장개석(蔣介石)의 도움을 받아 남경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교외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설립하자 제1기 여자부 교관으로 선정되어 사관생도 양성을 담당하였다. 1935년 6월에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부녀부(婦女部) 주임, 1936년 7월에는 이청천(李靑天)의 처 이성실(李聖實)과 함께 민족혁명당원 가족들을 규합할 목적으로 남경조선부인회(南京朝鮮婦人會)를 조직하여 일선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단합시켰다.

그 후 1937년 11월 의열단의 한중민족연합전선(韓中民族聯合戰線)의 일환으로 파견된 그녀는 대일본 라디오방송을 통해 선전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38년 4∼5월경에는 기관지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에 「경고, 일본의 혁명대중」, 「조선부녀와 부녀운동」이라는 글을 투고하여 총체적인 무장궐기를 촉구하였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창설되자,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婦女服務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선임되어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다가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던 중 부상을 당하였다. 그 후 부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44년 5월 27일 중경에서 서거하였다. 광복 후 그녀의 유해는 경남 밀양 감천동 뒷산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차정 의사 기념사업회인 숭모회에서 금정문화회관 만남의 광장에 동상을 건립하여 의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

[출처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안희제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1885년 태어났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에 동래의 구포(龜浦)에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설뫼)에 창남학교(創南學校)를 설립하고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서상일(徐相日)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 청년결사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당은 안창호 계열의 지하 청년단체로서 1945년까지 일제에 발각되지 않았으며 당원들은 일제강점말기까지 안희제의 조직에 다수가 참가하여 끝까지 애국 동지로서 활동하였다.

1914년에는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가 3 1운동 직후 이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였다. 백산상회는 단순한 상업기관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연락기관이 되어 활동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에 서울에서 3 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시켜 각지에 배포하여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다수의 애국적 청년학생들을 외국에까지 유학시켰으며, 기미육영회의 장학생 중에서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1927년에는 이시목(李時穆) 등 동지들과 함께 「자력사(自力社)」를 조직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에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신앙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만주로 갔으며, 1933년에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 부근에 발해농장(渤海農場)과 발해학교(渤海學校)를 설립하였다. 당시 한국 농민들은 일제의 식민지 약탈통치하의 국내에서 토지를 잃고 남부여대하여 만주로 건너가서 유랑하다가 중국인 지주들의 불리한 소작조건 밑에서 착취당하는 일이 매우 많았는데, 안희제는 동경성 부근에 천수백일 갈이(千數百日耕) 넓이의 농토를 구입하여 농장을 만들고 유랑하고 있는 한국농민 300여호를 유치하여 토지를 분배해 주고, 5개년 연부상환조건으로 자작농의 창설을 추진하였다. 또한 발해학교를 농장 일대에 설립하여 이주농민의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42년 11월에 일제는 대종교가 독립운동조직이라고 보고 만주와 국내에 있는 대종교 지도자 윤세복(尹世復)이하 21명을 일거에 체포하였다. 이 사건이 대종교에서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임오교변 때 일제의 고문으로 10명의 대종교 지도자가 순국했는데, 이를 순국십현(殉國十賢) 또는 임오십현(壬午十賢)이라고 하며, 안희제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안희제는 일제에게 체포되어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장기조사를 받다가 잔혹한 고문으로 1943년 8월에 옥사(獄死)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독립정신을 그리기 위하여 원래 백산상회가 있던 곳에 기념관을 만들어 선생의 유품과 관련 기록들을 전시하고, 기념사업회를 용두산공원에 흉상을 건립하여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출처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이봉우

부산 동구 좌천동에서 1873년에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신학문과 일본어를 이수 하였다. 한말 궁내부 기사로 재직하였다. 1908년 연길현 합마당(哈蟆塘)으로 망명하였으며, 화룡현에서 1910년 정동(正東)학교 설립 등 육영사업에 이바지하였다. 1918년 11월 만주 길림(吉林)에서 김교헌(金敎獻)·김동삼(金東三)·이동녕(李東寧)·여 준(呂準)·이범윤(李範允) 등 38인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양하였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용정촌 국자가(局子街)에서 독립선언 축하회를 개최하였으며, 시위도중 중국군의 발포사건이 일어나자 구춘선(具春先)·강봉우(姜鳳雨)·고용환(高容煥)·강구우(姜九禹)·박승필(朴昇弼) 등과 함께 도윤공서(道尹公署)에 배상책임을 따지기도 하였다. 1919년 4월에는 만주에서 한국독립을 위한 한족독립기성회를 조직하여, 의사부원으로 구춘선(具春先)·마 진(馬晋)·유예균(劉禮均)·최원일(崔元一)·고용환(高龍煥)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0년 청산리독립전쟁에서 대승한 독립군은 일군의 추격을 벗어나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노령(露領)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정부의 배반으로 독립군이 무장해제되고 참살당하는 자유시 참변이 있자, 1921년 9월 이에 대해 성토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1921년 6월 26일 노령 흑룡주 자유시에서 대한의용군이 노병(露兵)과 교전한 결과 사망자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된 자 250명, 포로 917명에 달하는 대참극을 연출하였다……" 이 성토문은 국민회·군비단(軍備團)·광복단·신민단·농민회·공의단(公義團)·태극단·의민단·청년독립단·야단(野團) 대표들이 서명 발표하였는데, 그는 국민회 대표로서 구춘선(具春先)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와 연락을 위하여 상해로 가던 중 일경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장건상

경상북도 칠곡에서 1882년에 태어나 1883년 부산 좌천동으로 이주하여왔다. 좌천재(佐川齋)에서 12년간 수학하였다. 1916년 상해(上海)로 망명, 신규식(申圭植)이 조직 운영하던 동제사(同濟社)에 가담하여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었으며, 1917년 만주(滿洲) 안동현(安東縣)에서 망명객의 길 안내역을 맡아 활동했고, 영국상선(이륭양행 소속) 안동지사장 죠지 쇼우와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1919년 4월 22일 임정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고 외무부 위원이 되었으며, 동년 7월 1일 대한적십자회가 상해에서 창립되어 상의원이 되었다. 1919년 의열단의 기밀부 요직을 맡아 활약하였으며, 1921년 4월 19일 3.1운동이 발발했을 때 미국에 있던 이승만 등이 미국정부에 우리 나라를 위임 통치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 알려지자 임정은이를 크게 성토하였다.

1921년 5월 임정을 전복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것을 주장하는 소위 창조파의 일원으로서 길립, 원세훈, 신숙 등과 조선공화정부를 북경에서 조직하고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1921년 8월 고려공산당에 입당, 1924년 상해임정 외교총장으로 있으면서 의열단인 이종암 등의 입국 활동시 필요한 혁명선언서 신임장과 위임장을 교부하였다.

1926년 10월 28일 북경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의 취지문을 발표하고 7인 집행위원중 1인이 되었으며 대표 조성환의 명을 받아 남지나에 특파되어 선전에 주력하였다. 1927년 의열단 제3기 간부훈련을 마치고 민족혁명 당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다시 조선민족혁명당원으로 상해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1942년 2월 임시의정원의 개헌에 따라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이 선출되고 국무위원에는 이시영을 비롯 14명중 1인으로 선출되어 학무부장이 되었다.

1942년 8월 4일 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으로 선임, 1942년 11월 17일 임시국무위원회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943년 10월 30일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인도공작원으로 파견되도록 중국 국민당에 신분보장을 요청했으며, 1944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그의 공적들을 기리어 198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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