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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선정

고구마 전래자 조엄

조엄의 호는 영호(永湖), 풍양조씨로 영조 14년(1738) 20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음보(陰補)로 내시교관 세자익위사시직을 지내다가 영조 28년(175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간원 정언에 올랐다. 이어 사서, 홍문관 수찬(修撰),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 33년(1757) 7월 외직인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가, 영조 35년(1759) 정월 퇴임해 갈 때까지 많은 치적을 쌓았다.
특히, 동래부사 재임시 임진왜란 때 다대첨사로 순절한 윤흥신이 충렬사에 배향돼 있지 못함을 보고 류성룡의 『징비록』과 신경의 『재조번방지』를 참조, 윤공의 사적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어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1759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했다. 부임하자 곧 윤흥신공의 사적을 채방하여 그를 표창할 것을 장청(狀請), 윤공을 증직키 위해 노력하였다.
경상도관찰사 당시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임기를 마치고 내직으로 돌아와서는 대사헌부 제학 예조참의를 지내 영조 39년(1763) 7월 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갔다. 통신사의 여정에 따라 대마도에 들렀을 때 고구마를 보고 그 종자를 얻어 바로 수행원을 통해 부산진으로 보내고 그 보관, 저장재배법을 알렸다. 이듬해인 1764년 7월에 돌아올 때 재배저장법을 익히고 그 종자를 갖고 와서 동래와 제주도지방에 시험삼아 심게 한 것이 우리나라 고구마의 기원이다. 그 재배법을 알리기 위한 저서인 『감저보』 또한 당시 동래부사였던 강필리에 의해 완성되었다.

귀국 후 공조판서, 동지성균관사, 지의 금부사, 이조판서, 홍문관 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 43년(1766)에는 팔곡 구사맹의 『조망록』에서 윤흥신공의 사적을 더욱 자세히 조사, 다대첨사 윤공(尹公) 전망사적서(戰亡思蹟敍)를 지어 윤흥신공의 충절이 인멸되지 않게 하였다. 저서로는 『해차록』 『해행총재』가 있으며, 시호는 문익공이다.

고구마 재배자 강필리

강필리의 자는 석여(錫女), 진주강씨로 숙종 39년(1713) 전라도 강진에서 태어나, 영조 23년(174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지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그는 영조 40년(1764) 8월에 동래부사에 부임하여 영조 42년(1766) 11월까지 재임하였다. 그는 동래부사 재임시 고구마재배 외에도 동래온천에 새로운 온천을 파서 2개의 목욕탕을 만들었다. 또한 다대포 윤공단의 설단(設壇)에 즈음하여 『윤공사절기 (尹公死節記)』기술, 윤흥신 등의 충렬사 배향을 주장하는 등 임진 선열의 추모작업에도 남다른 정성을 보였다. 수령 칠사(七事)를 밝게 처리하여 고을의 부흥에 애썼다. 고구마가 우리 나라에 전재된 것은 영조 39년(1763), 일본에 통신사로 간 조엄이 그 종자를 얻어 부산진에 보낸 것이 효시이다.
영조 40년(1764) 8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강필리공은 조엄이 보낸 고구마종자를 받아 이의 재배에 성공을 보았는데 이것이 또한 우리나라 고구마재배의 효시가 된다. 거의 이와 같은 시기에 이광려, 강계현 등도 씨고구마를 얻어 재배를 시도하였으나 성공치 못하고 오직 부사가 동래에서 심은 고구마만 성공을 보았던 것이다. 강부사는 곧 동래부민들에게 심기를 장려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저술을 통해 그 재배법을 일반인들에게 까지도 지도 보급하였다.

부사의 저서인 『감저보=일명 강씨 감저보』는 고구마재배법과 저장법에 관한 실험적 기록으로 훌륭한 육종서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고구마재배의 길을 열었다는데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감저보는 후일 순조 13년(1813) 김장순에 의해 『감저신보 =세칭 김씨 감저보』로 이어지고 순조 24년(1824)에는 당시 호남순찰사였던 대실학자 서유구에 의해 『종저보』가 편찬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국방을 튼튼히 한 정언섭

정언섭의 자는 공리(公理), 동래정씨로 숙종 12년(1686)에 태어났다. 숙종 43년(1717)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영조 1년(1725) 증광문과에 장원급제,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1727년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나 김일경 등을 처벌할 것을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되었다. 그러나 영조 4년(1728) 김일경의 여당인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영조는 사헌부 지평으로 발탁, 그후 동래부사, 충청도관찰사, 동부승지, 광주부윤, 도승지, 한성부우윤,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호조, 예조의 참판을 지냈다. 영조 17년(1741) 동지부사로 청나라를 다녀온 뒤 나아가 많은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영조 24년(1748)에 별세하였다.
정언섭은 영조 6년(1730) 11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동래는 임진왜란 때 성이 함락된 후 1백40여년이 지나는 동안 성터는 허물어져서 동래가 나라의 관문임을 중시하고 성을 수축할 것을 계획하고 정부에 건의하였다.

1731년 정월 축성의 재가가 내려지자 축성 공사를 시작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였다. 현재 망월산 부근에 남아 있는 동래읍성은 바로 동래부사 정언섭이 축성한 것이다. 공사가 시작된지 1백일이 좀 지나 4월에 길이 8리, 높이가 수십척이 되는 큰 성을 쌓았으며, 5월에 성문을 준공한 뒤 7월에는 문루를 완성해 역사(役事)를 시작한 지 2백여일만에 견고한 성이 완비되었다. 성을 완공 뒤 수성청 (守城廳)과 수성창(守城倉)을 설치해 군비에 만전을 꾀하였다.

또한, 공사 때 옛성의 남문터에서 부러진 창, 화살촉 등과 함께 출토된 유해들을 거두어 삼성대 부근에 6개의 봉분을 만들어 이들을 안정시켜 주었다. 이 무덤들은 임진왜란 당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동래성민들의 무덤이며 이를 『6총묘』라 하고 뒤에 기를 추가하여 『 7총묘』라하고, "임진전망유해지총" 동래의총이라고 불린다.

정언섭 부사는 군비를 완비 한 뒤 문교(文敎)쪽으로 방향을 돌려 시술제라는 제실을 짓고 고을 유생들이 학업을 익히게 하였다. 이 밖에도 정언섭 부사는 관사인 연심당 건립과 청사인 교방, 구휼, 창고인 사창, 고마청 주사 등을 중건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치적을 남기고 영조 9년(1733) 1월 만 2년 6개월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해갔다.

군비를 정비한 박사창

박사창의 자는 겸숙(兼叔), 반남박씨로 숙종 13년(1687)에 태어났다. 경종 1년(1721) 진사에 합격하였고, 영조 6년(1730)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영조 7년(1731) 지평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 승정원우승지(承政院右丞旨)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 15년(1739) 8월 동래부사로 부임한 박사창은 임진왜란 후에도 여러번 왜인들의 작폐가 심한 것을 알고 먼저 왜인들보다 우수한 군비를 갖춰야 한다고 판단, 동래부의 군사시설을 정비하였다. 군기(軍器)로 흑각궁 7백 50장, 화약 1천 5백근, 화살줄 1백 2조 등 많은 무기를 새로 만들고 보완, 보수는 물론 군관청, 수첩청, 무사청, 이노작대(吏奴作隊) 등의 조직을 완비케 했다.

또한, 왜인들이 작폐를 제어하기 위해 연향대청, 초량객사, 동래부객사 등의 시설 일체도 갖추었다. 그리고 조정에 글을 올려 왜관내 왜인들이 함부로 관내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용두산 외곽 은산에 복병막 등 동서남북에 각 2개소씩 설치, 복병막을 세운 산을 지금도 복병산이라 불리고 있다. 그리고 박사창 부사는 1740년에 『동래부지』도 편찬하였다. 부산지방의 향토사 연구에 가장 풍부하고 정확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서문에서 부사는 산천의 험이(險吏)와 군량, 과갑(戈甲), 기치(旗幟) 등까지 상세히 기재,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다고 하였다. 영조 17년(1741) 정월에 퇴임해 갈 때까지 1년 6개월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헤아릴 수 없는 치적을 남겼던 것이다.

동래부사 고경명

고경명의 자는 이순(耳順)이고 호는 제봉(霽峯) 또는 태헌(苔軒)이라 하며 본관은 장흥이다. 중종 28년(1533) 11월 30일 광주에서 태어났다. 시문에 능하여 명종 7년(1552)에 20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1등으로 급제, 진사가 되었고 명종 13년(1558)에는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한 준재였다. 이후 바로 호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가 예문관의 전적(典籍),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 다음 해에 외직 영암, 서산, 한산 등의 군수직을 역임하였다. 한편,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辯誣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고 승무원판교를 거쳐 동래부사가 되었던 것이다.

선조 23년(1590) 12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고경명은 이듬해 정월에 당시 일본에 통신사로 간 황윤길과 김성일 등이 부산포로 돌아왔을 때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 난이 터지면 순국 할 각오를 이때부터 준비하였던 것이다. 동래부사 시절 조정에서 서인들이 제거될 때 사직하고 광주 향제에 은거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 29일 담양 향리에서 사서들과 회맹하여 많은 의병을 모았다.

종사관 사제 안영, 유팽로와 더불어 50의 노구를 이끌고 선조의 행궁이 있던 평안도로 가고자 북상하는 중 금산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7월 9일 장렬히 순사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예조판서를 추증하였고 뒤에 좌찬성에 가증되고 시호를 충렬이라 하여 광주의 표충사, 금산의 성곡서원과 칠백의총의 종용사 및 순창의 화산서원에서 제향이 받들어지고 있다. 시와 글씨, 그림에도 뛰어나 이름을 떨쳤는데 저서로는 『제봉집』 『유서석록』등이 있다.

동래부사 정현덕

정현덕의 자는 백순(伯純), 호는 우전(雨田)으로, 본관이 동래(東萊)라는 견해와 초계(草溪)라는 견해가 있다 . 철종 1년(1850)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리로 출발하였다. 철종 13년(1862)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대원군이 집권하자 그의 심복으로서 동래부사에 임명되었다. 원래 동래부사는 대일외교의 실무의 책임을 갖고 있기에 정현덕은 평소의 소신인 위정척사의 정책을 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후 조선에 대한 유신을 통고하기로 결정하고, 1858년 12월 관인을 파견 서계를 전달하였다.

이후 일본은 조선과의 새로운 국교를 열기 위해 수 차례의 교섭을 펼쳤으나 단호히 거부하였다. 조선정부와 동래부의 강경한 태도에 일본에서 정한론이 대두케 하였다. 부사는 일본의 침입을 염려하여 동래읍성을 수축케하여 군의 강화를 기하였다. 이어 이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대원군이 실각하자 그도 따라 파면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형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대원군이 실각 함으로써 파면되고 유배된 뒤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민정중

민정중의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峰), 본관은 여흥이며, 많은 명사와 교류하며 많은 사람이 따랐다. 22세에 진사에 오르고 효종 즉위년에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세자시강원 사서,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 교리를 역임하였다. 호남어사에 임명되었다. 상서하여 소현세자의 빈의 원을 풀어줄 것을 청하였다.

국인이 모두 애통해마지 않았으나 감히 진언하는자 없었는데 정중히 홀로 논하니 국인 모두 놀랐다. 현종 때에는 사간원 대사간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이, 공조, 호조, 형조의 4판서에 오르고 참찬(參贊), 의정부에 오르고 숙종 즉위의 다음해 숭정대부에 가해졌다. 후에 노론, 남인과의 대립에서 여러번 화를 입고 배소에서 졸하였다. 인현왕후는 정중의 제(第) 유중의 딸이다.

정중은 효종 9년(1658) 8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익년 3월 21일에 예조참의로 전직기까지 약 7개월의 짧은 기간 동래부사에 취임하였으나 부사는 이때 임진왜란이 이미 60, 70년 경과하였지만 부산지역의 임진사적의 민몰(民沒)을 걱정하여 고로를 통하여 사료수집 정리하여 『임진유문』을 남겼다.

그 이전의 우리측의 기록은 단편적이라 잘 알 수 없는 차에 이 기록은 사료적 가치가 높아 동래, 부산, 다대포 전쟁의 항쟁사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으며, 또한 공신, 멸사, 민의 실태를 알 수 있다. 시호는 문충이라고 한다.

절조의 인물 이춘원

이춘원의 초명은 신원(信元), 초자는 입지(立之) 뒤에 춘원(春元), 함평이씨로 선조 4년 (1571)에 태어나 인조 2년(1632)에 죽었으며 문신으로 절개가 남달리 뛰어났다. 선조 23년 (1590) 20세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고, 26세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 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보직되고 이듬해 정유재란때 광양 현감으로 남원싸움에서 왜적과 싸워 위기에 빠진 우리군사들을 구원하기도 했다.

그후 여러 벼슬을 거쳐 광해군 5년(1613)에 좌승지에 이르렀을 때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반대, 항론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 해 복직되어 병조참의에 올랐다. 광해군 9년(1617)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중 대북파들이 인목대비를 성궁에 유폐시키려 들자 이를 극렬히 반대하다가 파직당했다.

광해군 12년(1620) 지돈령부사로 등용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1623년 인조가 반정하여 구신들을 등용할 때 그에게 한직을 맡게 하려 했으나 사양하고 은퇴했다. 동래부사 재임시는 목민의 일에 힘쓰는 한편 관내의 해운대, 태종대, 몰운대, 겸호대, 동대, 온정, 정과정 등 여러 명승과 고적이 흐트러졌음으로 살펴 가꾸었다. 이 명승에 제목을 붙여 시를 지어 널리 알렸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동래지방은 15년 동안에 17인의 수령과 2인의 판관이 교체되어 평균 재임기간이 1년도 못되는 형편이었으며, 임진왜란의 피해로 도탄에 빠져 있었다.

이러했던 동래가 대체로 평정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이춘원부사 시절부터였다. 선조 40년(1607) 7월 동래 부산의 곳곳을 답사하여 백성들을 위무하고, 그가 본 것을 시로 적어 문풍을 일으켰다. 그의 시는 인빈헌의 내주신영(萊州新詠)으로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종두법의 지석영

지석영의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 본관은 충주로 1882년에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했다. 전적과 지평을 역임하고 1885년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했다. 1886년 장령으로 시폐를 논하다가 1887년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1892년에 석방된 후 형조참의, 승지를 거쳐 1895년 동래부사 및 부산재판서 판사가 되었다. 동래의 동래부사 재임시 선정을 베풀었다.

그뒤 그는 경성의학교 교장과 학부내의 국문연구소가 설치 되자 그 연구원이 되었으며, 1906년에는 『자전석요』를 집필하는 등 국문연구에도 공이 컸다. 그가 서울에서 1935년 2월 1일 별세하자 사회장으로 장의가 집행되었으며, 그의 공덕비가 1988년에 동래 금강공원 안에 동래부사 송촌 지석영선생 공덕비란 이름으로 세워졌다. 그의 개화의지를 높이 산 것이다.

그는 1876년 수신사의 수행으로 일본에 갔던 그의 스승 박영선으로부터 일본인의 「종두귀감」을 전해 받고 천연두 예방접종 종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종두를 얻는 방법과 접종하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는 1879년 부산에 있는 일본인 병원인 제생병원으로 와서 종두접종 방법을 배워 그해 겨울 충주 덕산면의 그의 처가 가족들에게 종두를 최초로 실시했다.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종두 시술이었다.

청백리 이안눌

이안눌의 자는 자민(子敏)이며, 호는 동악(東岳)이다. 덕수이씨로 선조 4년(1571)에 태어나 선조 32년(1599)에 정사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형조, 호조, 예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1601년 예조정랑으로 진하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후 성균관 직강(直講 )으로 명나라 사신이 오면 이를 맞아들이는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기도 했다. 선조 41년(1608) 2월 동래부사로 부임, 선조 42년(1609) 7월에 퇴임해갈 때까지 동래지방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601년 담양부사, 1613년 경주부윤을 거쳐 1615년 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 調), 동부승지를 지내고 문신정시에 급제한 후 1671년 예조참의가 되었으며, 이듬해 강화 부윤으로 나아갔다. 이 해 광해군의 폭정에 분개, 사직하고 은퇴생활을 하다 인조반정으로 예조참판에 등용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특진관으로 왕을 모실 때 조정의 시비가 밝지 못하고 상벌이 공평하지 못함을 극간하여 대신들을 공박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관직운은 그의 바른 말을 싫어하는 조정 대신들에 의하여 배척됨으로써 점점 소외되어 갔다. 그러나 항상 고결한 심지를 지녀 그 뜻이 광명정대하였다. 정묘화란 때는 인조가 피난처인 강화도에서 그곳 주민들이 강화부윤의 치적을 칭송하는 소리를 듣고 그를 불러 강화유수직을 맡게 하였으며, 이어 형조참판을 거쳐 인조 9년(1631에는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다음해 주청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추존(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제왕의 칭호를 내림)을 허락받아 원종의 시호를 받고 돌아왔다. 그 공으로 예조판서가 되어 예문관제학을 겸하였다. 당시 조정에서 청렴 근면한 관리 5명을 뽑는데 들어 숭록대부의 가자(加資)를 받고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는데, 그 해(1636년)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다녀와서 죽으니,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죽은 후에 그의 검소한 생활로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선조 41년(1608) 2월에 동래부사로 그는 이곳 임진왜란때 의사적을 조사하며, 당시 정경을 담담하게 읊은 『행하유감』시가 전한다. 한편, 송상현공을 모신 사당인 송공사에 휘진제를 올려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분들을 애도하였던 것인데 이때 지낸 휘진제(諱辰祭=忌祭)의 전통이 이어진 것이 바로 오늘날의 송공단을 남기고 단제가 끊이지 않게 한 초석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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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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