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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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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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수사(대웅전석조여래삼존좌상) 운수사(대웅전석조여래삼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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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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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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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

    북구 시랑골 모분재
  •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켰을 때, 가야 사람들은 나라를 잃고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혹은 깊은 산골에 은신하기도 했는데 대리천이 흘러내리는 언덕 위 가야시대 시랑 벼슬하던
    사람이 피신해 들어와 살게 됨. 바위에 새겨져 내려오던 모분재라는 글자 속에는 가락 중심근거지인 김해 분산을 잊지 못해 재를 올린다는 뜻이 담겨져 있음. 이곳에 모여
    나라 잃은 슬픔을 나누던 정자에 벗들이 모였다가 떠나보낸다고 송우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함. 시랑이 살았다고 붙여진 시랑골과 모분재, 그리고 송우정의 전설은 암벽에 새겨져
    있던 모분재 각자의 뜻을 해석하여 구전되어 옴(부산광역시 북구, 2014: 990)
    만덕고개와 빼빼 영감
  •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나 삿자리(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장사로 신분을 감춘 빼빼 영감이 만덕 고개에서 장꾼을 위협하고 재물을 빼앗는 도적 무리를 물리쳤다는 이인담
    (異人談)(부산광역시 북구, 2014: 994)
  • 시랑골 모분재 암벽 시랑골 모분재 암벽
  • 만덕 고갯길 만덕 고갯길
    구포 장타령
  • 주로 장터에서 물건을 팔았던 상인들과 구걸을 했던 각설이패가 가창하였던 일종의 가창 유희요
    • (부산광역시 북구, 2014: 934)
    구포 선창 노래
  • 개항기 구포 나루터의 일꾼들이 일본으로 수출하는 쌀을 배에 나르면서 부르던 운수 노동요
    • 1905년 경부철도 개설 이후 낙동강을 이용한 수상 운송이 쇠퇴하여 없어짐에 따라 구포 나루터의 기능도 잃어버리면서 구포 선창노래의 전승도 끊어짐. 낙동강이 운송로로
      이용되던 시절 구포 나루터의 모습을 담고 있는 노래로 그 가치가 있음
  • 낙동강 칠백리에 배다리 놓아놓고 / 물결따라 흐르는 행렬진 돛단배에 / 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 / 구포장 선창가에 갈매기도 춤추네.

사상구

    모라 뒷산 운수사와 두꺼비 바위
  • 모라뒷산에 자리한 운수사는 절이 번창할 당시 신도들의 끊임없는 발길에 스님이 귀찮아하고 불평함. 그 즘 초립동(草笠童)이 절에 들어 두꺼비 바위의 턱을 치면 신도들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한 스님이 두꺼비 바위를 훼손함. 두꺼비 바위가 바라보는쪽은 김해군 상동면에 있는 모 암자로 두꺼비가 거기에서 먹이를 주워 먹은 후
    변을 운수사에 보았는데 그 덕에 번창했지만 턱이 없어져 먹지를 못해 자연히 배설 또한 할 수 없어 운수사는 쇠퇴일로를 걷게 됐다고 함
    할매당산(감전동) 전설
  • 350여 년 전 이 마을 통수부인의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 내가 뒷산 계곡에 있으니 모셔라는 꿈을 꾼 뒤 가보니 여인의 상반신 형태의 돌이 발견됨. 이 돌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그로부터 사당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나 이웃마을 사람들이 석상을 훔쳐 대밭에 숨겨놓음. 이에 다시 통수부인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 주례동 어느 대밭에 있으니
    모셔가라고 하여 다시 모시게 됐다는 이야기와 마을의 한 농부가 밭을 일구다 석상을 발견하여 이 석상을 할매당산으로 모시게 됬다는 전설이 있음
    강선대 전설
  • 당신(堂神)이 있는 곳을 강선대라 하여 도로의 동쪽에 있는 것은 하강선대, 서쪽에 있는것을 상강선대라 하여 매년 음력 11월 1일 신선이 하강하여 목욕을 하고 쉬어갔다하여
    강선대라고 부름
    고딧줄꾼의 노래
  • 낙동강에 짐을 싣고 바람의 힘으로 오르내리던 범선이 바람이 약해 졌을 때나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 역풍이 불어올 때 돛이나 장대 힘으로 배를 움직일 수 없을 때 부르던
    노동요
    • 배의 돛에 연결된 줄에다 지네발처럼 따로 걸어 어깨에 얽어 메고 배를 끌어 당겼던 사람들인 고디꾼은 도사공의 선창으로 고디줄꾼들이 소리를 받으면서 배를 끌고
      갔다고 함

사하구

    사하구 감천동 천마산 용굴 전설
  • 주요 모티프는 ‘승천하는 용과 관련된 지명’으로 전국적으로 용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붙여진 지명은 무수히 많음. 본래 용은 물과 관계가 깊기 때문에 대개의 용 설화는 물이
    풍부한 곳에서 나타남. 용의 등장에 앞서 큰비가 내렸으며, 용의 승천 이후에도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고 함. 실재하는 천마산과 용굴이 그 진실성을 높임(부산역사문화대전)
    신평동 망후촌
  • 망후 마을의 지명 유래의 하나는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역적으로 몰려 9촌까지 몰살을 당하였을 때 임장군의 조카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임중생이 의주에서 신평까지 피난을
    와서 살게 되었는데, 누가 자기를 잡으러 올까 보아 뒤를 돌아보았다 하여 망후촌이 되었다는 것과 다대진(多大鎭)의 후망소(侯望所)가 신평에 설치되면서 망후촌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 전해짐(부산역사문화대전)
    신선암(神仙岩)
  • 하단 동면의 산을 ‘호박꿈(虎伏口)’이라고 부르며, 700리 물줄기를 따라 흘러내린 낙동강물이 감싸고 돌아 넓은 평야를 이루고, 뒤로는 호박꿈의 산줄기가 숲을 이루어 뭇 새들이
    찾아와 지저귀는 산기슭 끝에 있어 그 아름다운 정취에 신선이 와서 놀았다는 전설이 내려옴. 신남초등학교 후문으로 옛모습은 훼손되어 찾아볼 수 없음(사하구청)
  • 에덴공원의 강선대(降仙臺)에도 신선이 내려와 앉았다는 바위가 있으며, 이같은 전설은 원시신앙(原始信仰) 내지 후세의 풍수지리설
    (風水地理說)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료됨. 신선암은 바위 밑에 작은 굴을 형성하고 있어서 선사(先史)시대 주거지(住居地)의 가능성도배제 할 수 없으나, 그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음
    다대포후리소리(多大浦후리소리)
  • ‘물질하는 사람들’인 다대포어민들의 고단한 삶의 현장을 소리로 달래는 거칠고 투박한매력을 지닌 4박자의 다대포후리소리는 멸치후리질로 생계를 유지했던 어민들의 삶을
    반영함(부산광역시 사하구, 2011: 295-304)
    • 구성 : ①그물을 배에 싣는 소리 ②용왕제 ③노젓는 소리 ④후리소리 ⑤그물 터는소리 ⑥가래소리 ⑦풍어소리
    • 1966년 어장이 폐쇄되면서 잠시 잊혀지다가 1981년 다대포후리소리 발굴 계획을 통해 1987년 7월 1일 부산지방문화재 제7호로 지정됨. 민속학적 문화적 음악적 사료로
      매우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님
    • 지금은 백종근(1933년생, 상쇠), 엄공열(1932년생, 가래소리, 그물 놓는 소리), 차태화(1933년생, 용왕제, 풍어소리, 그물싣는 소리)세 사람의 예능보유자와 60여명이 다대포
      후리소리를 이어가고 있음
    사하 방아 소리
  • 다대동에서 수확한 곡식의 깍지를 벗기고 쭉정이를 골라 알곡을 걸러내기 위하여 방아를 찧을 때 부르는 방아 노동요 또는 제분(製粉) 정미요로 박자에 따른 동작의 통일성과
    일의 수고를 덜기 위해 부름
    • 구성 : 선후창(메기고받기식)으로 불러져 채록됨. 2음보의 규칙적인 사설의 형식이 특징임. 앞소리는 한 사람이 메기고, 나머지 사람들이 뒷소리 “어허쿵덕 방아야”라는
      후렴구를 받음(부산역사문화대전)

강서구

    네 바위 전설
  • 사암 마을 앞 나루터를 네바위 나루터라고도 불렀는데 임진왜란과 관련된 전설로 옥포해전에서 참패한 왜 수군이 어둑한 저녁에 육지쪽을 바라보니 네명의 억센 장군들이
    엎드려 있는 것처럼 보여 크게 놀라 육지로 올라오지 못하고 우리수군에 크게 패함. 이후 바위였다는 사실을 안 왜군은 ‘네가 바위였구나’라고 해서 그 이후 네바우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함
    노적봉 전설
  • 임진왜란에 왜적의 수군이 배를 타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산에다 짚을 둘러쳐 노적처럼 보이게 함. 얼마 후 왜적들이 이 노적가리를 보고 많은 식량을 쌓아두었기에
    지키는 군사도 많을 것으로 생각, 군사를 돌려 동래방향으로 돌아갔다고 함(부산광역시 강서구, 2014b : 546)
    가덕도의 태운 장군 바위

    지금 우리 눌차리에는 태운장군바우라 카는 바우가 하나 있습니다. 있는데, 옛날에 그 태운장군바우에서 제(祭)를 모셨는데, 그 태운장군바우에서 일년에 한 분씩 정월 초사흘날이 되면, 그 태운장군바우의 태운장군이 말을 타고 우리 부락을 보고 달려와요. 오는데,그 태운장군바우가, 지금에 가보면 현 위치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눌차리에서 사는 사람만 이 태운장군바우라 카는 것을 알고 있고, 아무도 모릅니다. 그 태운장군이 부락을 한 분거쳐가면, 부락에 좋고 나쁜 거를 가리치거든요(敎示하거든요). 태운장군이 지나가고 나면, 부락에서 나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태운장군바우에서 제를 지냈고. 거기에 태운장군이 지나갔으니까 우리 부락에 어떤 일이 일어나겠다 이래가주고 우리 할아부지들이 그것에 대한 대비를 하지요. 부락에서 정성을 드리는 것이지요.(구술자:최병화, 남, 69 ; 김승찬, 1993: 202)

    소금장수와 장승

    남자가 소금 장시를 갔어. 한 가마이 짊어지고 소금 장시를 저 등 너매 재 너매에 넘어가놓인께 해가다 져뿠어. 갈 데가 없어. 갈 데가 없어가주고 뺑뺑 돌아보이 한 사람이 허옇이 서 있거든. 그것을 사람이라고 소금을 짊어지고 찾아갔어. 찾아가이 장승이라. 허연 장승이라. 올 데 갈 데가 없어이 그따가 소금 짐을 니라놓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가 있어이 밤중 된께네 “우리 한번 놀아보자.”카면서 팔도 장승이 다 모다 들어, 팔도 장승이 모다 들어 노는기 “뭐라 카노”하인께 팔캉 다리캉 쑥쑥 내밀어 찧고 ‘해롱대롱’카면서 막 찧고 이라거든. 그래나놓인께 이 사람이 가마이 앉았다가 신이 나서 장승과 같이 띠었어.지캉 같이 띠인까네, 그래 서더마는 “지금 사람들이 참 시건(식견)이 짧아. 저 산밑에 저게 밭에 가면저그 아배나 저그 어매 나 죽으면 거기에 뫼를 씨면 사흘만에 삼천 석이 날긴데 그걸 모른다.”카거든. 그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어, 장승들이 저꺼정 이바구를 하는기라. 이 사람은 장승이 아이라 논께네, 장승 이거는 구신(귀신)이거든. 따라 놀다가 가뿌고 이 판인데, ‘에이 이놈우 내일 아직에 날이 새면, 소금을 이대로 두고 밭을 가봐야 되겠다.’싶어 날이 새자 산을 올라가서 저 밭을 보이 한서너 마지기 되는 밭이 산 밑에 있는데, 되도 좋고 안 되도 좋고, 하나 터를 봤다고 표를 해두고 집으로갔다. 간께 저그매가 병이 들어 죽을 판이라. 아들을 소금 장시로 보내고 기다리다가 병이 들어 그러구로 저그매가 사흘만에 죽어뿠어. 그 저그매를 죽은 것을 짊어지고 그 먼 데까지 왔어. 그 산에 그 와가주고 안장을 해놓고 갔는데, 우짜노 카면 그 동네 삼천 석 하는 과부가 하나 있어. 과부가 하나 있는데, 이 사람을 우째 봤던지 마 장개를 안 가고 불씬 거지같은 사람을 불러가주고 목간을 시기고 좋은 옷을다 주고 전부 다 이래가주고 사흘 내우간에 삼천 석이 됐어. 그래가 부자가 되더란다.

    구술자 : 김순희(여, 84), 구술일자 : 1992년 1월 4일, 구술장소 : 송정동 본동마을

    을축년 홍수 이야기

    대저, 명지가 물에 잠기고, 강 동쪽의 사상 모라가 호수가 되었던 을축년(1925년) 홍수 때의 일이다. 동강 변에서 유복자인 아들을 20세까지 키웠던 어느 어머니가 있었다.
    이 아들이 홍수 때 낙동강을 건너다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그만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았다. 평소 이웃의 불행을 내 일처럼 여겼던 동네 사람들은 문상하여 이
    어머니를 위로했다. 그런데, 이 어머니는 아들의 비보를 듣고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조의를 표하러 갔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아들이 왜 죽었다는
    말이냐? 물에 빠졌다고 해서 다 죽는 것이 아니니, 내 아들은 반드시 살아 돌아올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평생을 아들만 믿고 살아온 과부가 그 슬픔이 극에 달한
    나머지 실성해 버렸다고 측은해 하며 돌아갔다. 그러나 놀랍게도 물에 빠진 지 3일 만에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 거센 물살과 함께 70여리를 떠내려가던 중 나무 기둥에
    매달려 목숨을 건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몰려와 이 과부의 선견지명에대해 물었다. 그러자 과부는 “평소 아들을 키우면서 20년 동안 단 한 번도 이가 빠진 그릇을 쓰지
    않았고, 남의 집 음식은 반드시 먼저 맛을 보고 주었으며, 항상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인 정성이 내 아들을 살렸노라.”고 답변하였다. 지극한 정성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미의
    지성에 하늘도 감동하여 아들의 목숨을 앗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지극한 어미의 사랑이 아들의 미래까지도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주풀이
  • 집터를 지키고 보호한다는 신, 성주신과 성주부인에게 성줏제를 지낼 때 무당이나 판수가 굿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

북구

    윤상은
  • 근대 자본주의 정신에 기초,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은행인 구포은행 설립을 주도하고 젊은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구포사립구명학교를 세움
    • 1907년 구포구명학교가 개교하여 장우석이 교장을 맡고 윤상은은 교감을 맡아 학교 재정을 책임짐. 구포구명학교는 사실상 윤상은의 주도로 설립
    • 장우석과 윤상은이 의기투합해 1911년에 설립한 구포은행은 당시로선 지역경제에 획을 긋는 사업으로 윤상은은 은행 설립 자금조달을 위해 경남 일대의 지주와 상인 설득 작업을 도맡아 진행함
    • 윤상은의 부친 윤흥석은 사천현감과 동래부사를 지냈고, 장인 박기종은 교육자이자 부산 근대철도의 개척자임. 윤상은의 동생 윤영은과 사촌형 윤정은은 독립운동가였으며, 윤상은의 큰아들 윤인구는 부산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냄
    • 지역경제와 지역교육 등 지역사회의 여러 분야에 기여한 바가 큼. 후세들에게 지역정신을 일깨우고 노블레스 오블리주(귀족의 의무)의 귀감이 될 만하나 이에 대한 평가는 소홀한 실정임
    윤인구
  • 윤상은의 장남으로 부산대 초대총장을 지낸 교육 선각자
    • 청년기엔 부흥목사로서, 장년기엔 농촌과 농민을 위한 계몽자 및 교육자로, 노년에는 사회봉사자로 활동함
    윤영은
  • 1920년 31세 때 구포청년회(龜浦靑年會)를 창립하여 초대회장을 맡아 지역사회 청년활동을 활발히 전개
    • 향토를 지키면서 많은 봉사사업을 벌이다 1930년 41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함. 구포면민들은 운영은의 공적을 기려 면민장(面民葬)을 거행
    윤현진
  • 피끓는 청년 독립운동가로 상해임시정부 재정을 책임진 풍운아
    • 1915년 경 일본에서 비밀결사 조직, 1916년 신동아동맹을 결성함. 귀국 후 대동청년단 에서 활동하는 한편, 1917년 고향인 양산에서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의춘학원을 설립 및 후진 양성. 한편, 일본 상인에 대항하기 위해 의춘상행이란 소비조합의 설립·운영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소비조합운동을 펼침
    • ∙3·1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 1919년 상해 망명 후 상해 임시정부의 재정 책임자로서 독립자금 조성, 의용단 조직을 통한 국내조직과 연계, 군 자금 조달 등의 적극적 활동하였으나 과로 등으로 스물아홉 꽃다운 나이에 요절
    장우석
  • 대천 물길을 돌려 평야를 만든 선각자
    • 대표적 객주(客主)이자 선각자. 화명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민족학교인 구포 사립구명학교(龜浦私立龜明學敎)를 설립하는데 지주 역할을 하였고, 구포저축주식회사 를 세워 국내 최초의 지방은행인 구포은행을 창설한 주역

사상구

    오택
  • 독립운동, 언론활동 등 족적
    • 1913년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시절 비밀결사 구세단(救世團)을 결성, 민족의식을 고취 하는 단보 발행 및 배포의 활동을 함. 1921년 중국 봉천에서 ‘만주일보’를 발행하는 만 주일보사 경남지사를 인수하여 당시 국내 언론에서 금지된 기사를 게재, 판매하다 구속 되어 대구감옥소에 수감되기도 함
    • 오택의 독립운동 정신과 파란만장한 삶은 사상구의 정신적 맥박이 될만함. 주례동에 해주 오씨 세거지가 있고, 해주 오씨 가문을 빛낸 인물이 오택과 오희선이란 점에서 존재감이 있다고 할 수 있음
    이관수
  • 조선청년독립당 결성해 혁혁한 활동
    • 조선청년독립당은 항일 결사 자일회(紫一會), 순국당 등과도 연계하면서 항일투쟁을 광범위하게 전개
    김준옥
  • 낙동강 유도에 사람 살리는 ‘활인수’ 심어
    • 낙동강변 유도(柳島)에 제방을 쌓아 홍수 피해를 줄인 인물로 김준옥의 행적은 ‘양산군 지’ 산천조에서 찾을 수 있음. “유도는 강 가운데 있는 섬으로 해마다 큰 비가 내리면 홍수가 나 주민들의 걱정이 컸다. 이에 김준옥이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홍수 피해를 막았다. 후세 사람들은 김준옥이 심은 정자나무가 물난리 때 사람을 살렸으므로 활인수 (活人樹)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

사하구

    박기종
  • 개항기 지방관 및 경제인으로 부산지역의 치안과 무역 업무를 담당하면서 근대적 기업의 설립을 위해 노력
    • 1898년(고종 35) 박기종은 외부 참서관에 임명, 철도 건설에 관심을 갖게 되어 그해 윤기영과 함께 ‘국가를 부강케 함은 상무가 제일이요, 상무를 흥왕케 함은 철도가 제일이 다’라는 취지 아래 부산과 하단포를 잇는 부하철도회사(釜下鐵道會社)를 설립
    양한나
  • 여성운동과 봉사, 교육자의 삶
    • 부산이 낳은 대표적인 여성운동가, 독립운동가 그리고 사회운동가로서 1948년 고아원으로 자매여숙을 설립, 전국의 정신병원을 순례하며 정신병자수용소를 세워 병을 치료 하게 함
    정재환
  • 부산의 대표적 사학인 동아대의 주춧돌을 놓은 교육자로서 동아학숙 설립
    • 동아대학의 본관과 기숙사, 제2관, 제3관, 제5관, 중앙도서관과 과학관, 박물관을 연이어 준공하며 종합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는 노력과 함께 1959년 2월 동아대학이 4개 대학 16개 학과를 갖춘 종합대학교 승격으로 정재환은 초대총장에 취임
    윤흥신
  • 다대진 첨사로서 1592년 4월 왜적에 맞서 끝까지 다대포를 지키다 순절
    •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를 받아 1591년에 다대진 첨사로 부임한 후 임진왜란 발발로 다대포진에 들이닥친 왜군을 동생 흥제(興悌)와 함께 끝까지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순절

강서구

    금수현
  • 국민가곡 ‘그네’ 만든 음악가… 다방면에 족적
    • 작곡자이자 음악 교육자로 강서구 대저1동 전금 마을에서 출생한 그는 70 평생동안 음악교육, 음악행정, 한글전용운동, 음악보급운동, 잡지발행 등 다방면에 걸쳐 눈부신 활동을 펼침
    • 1946년 부산의 음악인과 음악 교사들을 중심으로 경남음악협회 결성, 음악 인구의 저 변 확대를 꾀했으며 경남 음악 콩쿠르 대회 개최, ‘음악 주보(音樂週報)’ 발간, 1970년 음악 잡지 ‘월간 음악’ 창간 등의 활동을 통해 한국 음악발전에도 큰 기여를 함
    이진희
  • 현대 부산 출신의 재일 한국인 사학자
    • 일본 속의 조선(한국) 문화, 조선 통신사, 광개토왕릉비, 일본 열도의 고대 산성 등에 대한 다양한 관심과 문필가로서 출판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음
    박현서
  • 향토색 짙은 작품 남긴 낙동강 시인
    • 강서구 강동동 출신의 시인으로 1981년 ‘현대 시학’에 시 ‘부장’이 추천되어 등단하였으며 ‘절대시’ 동인으로 활동함
    • 박현서의 시작(詩作)의 근본은 낙동강으로 대표되는 부산의 토속적 상징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하단동 을숙도 문화회관 입구에 ‘낙동강 서시’가 적힌 시비가 있음
    고의수
  • ‘대저 아가씨’ 작곡한 지역 음악가
    • 강서구 대저1동 출신으로 ‘가을맞이’ ‘우리 엄마’ 등을 작곡하였으며 1950년대 중반 폐결핵을 앓고 투병 생활을 지속하다가 1975년 세상을 떠남
    조정환
  • 국내외에서 지하 독립운동 헌신
    •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건너가 민국독립당을 창립하고 광복운동에 전념
    • 1921년 국내에 잠입하여 경주, 대구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일경의 추적을 받게 되자 다시 북경으로 건너감. 1923년 임시정부의 국민대표자회의에 참석

북구

    감동장(甘同場, 옛 장터)
  • 구포장은 낙동강 하류지역의 생활 물자를 집산하는 5일장으로 조선시대 감동진 나루터와 조창인 감동창이 있는 강변에 장을 섰다하여 감동장으로 불림. 장날은 고을 사람들이 하루의 일을 쉬고 물자 조달을 위해 자가생산품을 들고 외출하여 물건을 사오는 날로서 장시는 고을의 축제날이기도 함. 옛날의 구포 장터는 현재 장이 서는 곳이 아니라 서쪽으로 철로 건널목을 넘어 파출소가 있는 곳으로 1914년 구포장터 화재로 인한 장터 재건 연금모금(구포동화재의연기념비 확인)과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시위가 있었던 역사적 일들이 서린 장소임(주경업, 2004: 409-411)
    구포시장
  • 낙동강 하류지역에 위치한 구포에는 조선시대 정부에서 받아들인 조세, 곡물 등을 쌓아 두는 남창이 설치되어 공물선, 상선, 어선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남창 근처 강변일대에서 3일, 8일 닷새만에 섰던 구포장은 낙동강 유역의 생활물자를 집산하는 교역지로서 크게 번창하였음
  • 옛날의 장터(구장터, 구포감동장)와 구포 새장터 옛날의 장터(구장터, 구포감동장)와 구포 새장터
    구포 만세거리
  • 구포장터 3·1운동을 의결한 선열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한 기념거리
    • 1995년 북구청지명위원회에서는 구포역 앞(구포 제1파출소)~구포시장통~대리천 복개 도로까지 전장 800m, 폭 8m 도로를 구포 만세거리로 지정
    만덕고개
  • 부산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금정 산맥에 자리한 대표적인 고개로, 동쪽의 동래 지역과 서쪽의 구포, 낙동강 건너의 대저와 김해 지역을 연결하던 고도 300m 가량의 고갯길
    • 동쪽과 서쪽 지역을 이어주던 만덕 고개는 도시화·산업화의 영향으로 변화를 겪음. 1973년 제1만덕터널 개통으로 구 만덕로 개설, 1988년 제2만덕터널 개통으로 만덕대 로 개설
    • 현재 만덕에서 금용산을 통과하여 사직동 부산의료원 건너편까지 제3만덕터널 공사가 진행중임
    범방산(거북산)
  • 북구 구포동 구남 마을에서 사상구 모라동까지 길게 뻗어 내린 산으로, 산을 멀리서 바라 다보면 거북이가 강을 향하여 엎드린 형상이라 하여 거북산이라고도 함

사상구

    재첩거리
  • 감전동 재첩길
    • 감전동-사상역-기차 타고 서면-기차타고 해운대
  • 삼락동 재첩길
    • 삼락동-구포장-양산
  • 엄궁동 재첩길
    • 엄궁동-구덕령-대신동-대청동 등지

사하구

    감천 문화마을
  • 1948년 충청도 등지에서 민족 신앙인 증산도의 한 문파인 태극도 교인들이 부산 보수동에 정착, 6·25전쟁 이후 판자촌 정비 정책으로 1955년 감천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마을
    • 태극 마을로 불리어지다가 도시재생특별법에 의해 선도지역으로 선정, 감천동 산복도로 일대를 문화예술촌으로 바꾸는 ‘미로미로 골목길 프로젝트’가 추진되면서 감천문화 마을로 거듭남
    하단장
  • 좌수영장(5일, 10일), 부산장(4일, 9일), 독지장(1일, 6일), 동래 읍내장(2일, 7일)과 함께 동래 지역의 5일장 체계를 이루면서 형성
    • 1978년 상설 시장이 개장하였으며 현재에도 5일장이 개시되고 있음
    승학산 억새
  • 고려 말 무학대사가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산세를 살폈는데, 이 곳에 오니 산세가 준엄 하고 기세가 높아 마치 학이 나는듯하여 승학산(乘鶴山)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전 해져 내려옴
    회화나무 샘터공원
  • 2010년 7월~2015년 2월(총 4년6개월), 도시재생과 도시 숲의 소공원 조성을 통한 주민 휴식 공간 및 경관 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
    • 자연(보호수 회화나무), 역사(마을 공동 빨래터)의 복원을 통해 도심 속 커뮤니티 장의 역할을 하는 역사테마 공원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음
    몰운대 유원지
  • 낙동강 하구의 다대포 서남쪽에 있는 해발 78m의 몰운대 일대의 자연 경관을 보존하고 시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하여 1967년 유원지로 결정 및 고시
    • 일부 지역은 군사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음
    에덴공원
  • 고려말 무학대사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산세를 살피다 산을 보니 마치 학이 웅비하는 듯 하다 하여 승학산이라고 하고, 산에 신선이 학을 타고 이곳으로 내려왔다고 해서 강선대 라고 불려진다고 함(주경업, 2010a: 161)
    •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에덴공원 정상에 일본군 포병 부대가 해안 포대를 설치하여 주둔한 적이 있었으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음. 청마 유치환 깃발 시비(詩碑)를 비롯하여 솔바람 음악당, 산책로, 체육 시설, 부산 시민 헌장비 등이 있음

강서구

    덕두장
  • 덕두 본마을에 있던 덕두장은 1934년 낙동강 대홍수가 발생한 후 낙동강 제방을 새로 축조하면서 소덕하리로 옮겨짐
    • 현재 4일, 9일에 열리는 5일장으로 일명 ‘떡돌장’이라 불리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음 (부산광역시 강서구, 2014a: 142)
  • 덕두장(현재) 덕두장(현재)
    금수현 음악거리
  • 강서구 대저1동 신장로 위치, 대저 출신의 금수현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고향이며 유년 시절을 보낸 거리를 ‘금수현 거리’로 조성
  • 금수현 음악거리 금수현 음악거리
    정거마을 문화거리
  • 눌차동 정거 생태 마을은 환경부가 선정한 전국 생태 보전 지역 생태 체험 시범 마을로 어촌 마을의 특색을 잘 표현하는 벽화들로 가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