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享受釜山

害怕一去不复返而走过的路, 你还记得吗?

奶奶为了避免被日军强制发配去做慰安妇,从釜山逃到了间岛。而爷爷在战争结束前被日军强制征兵,最后沦为俄军的俘虏。

我的爷爷和奶奶是回来了,但被强行带走的这片土地上的无数年轻人最终却没能成为谁的爷爷奶奶,在异国他乡结束了一生。

동감부산 3월
- 출처 및 제공 : 照片· 权晟勋

 

 

■铭记3.1运动100周年强制动员的历史
3月来釜山或韩国其他城市的外国人看到街头飘扬的太极旗和万岁再现运动一定会感到惊讶。因为今年是韩国反抗日本帝国主义,宣布独立的三一运动100周年。

 

心怀帝国主义野心的日本在1910年8月22日强行吞并了韩国,直到1945年8月15日宣布无条件投降宣言为止,韩国沦为殖民地长达35年。在此期间,日本将韩国用作后方基地,当做其侵略以中国为首的太平洋国家的跳板。釜山大渊洞有一座日帝强制动员历史馆,记录着日本帝国主义掠夺物资和人力的蛮行。为了追寻历史的痕迹,笔者来到了日帝强制动员历史馆。

 

동감부산 3월
- 출처 및 제공 : 照片· 权晟勋

 

■被强制动员的朝鲜人及没有道歉的日本
1937年中日战争爆发后,日本制定了《国家总动员法》,正式开始掠夺韩半岛及强制征用朝鲜人。被强制征用的人员或被囚禁在煤矿、建筑工地等做着奴隶般的工作,或被发配充军。年轻的女性被日军强制发配去做慰安妇。据推测,日本强制征用的朝鲜人中,劳力工人达750万人(包括重复征用),军人达20多万人,日本军慰安妇在40万人以上。

 

展览由幸存者的证词、历史记录、各种证物及现场再现等组成。在深邃、黑暗的煤矿,没有像样的安全设备,仅够一个人入内的狭窄空间里工作的矿工,令人的心情如历史的重量般沉重。慰安所模型中的小床有力地反驳了日本政府“不曾强制征用慰安妇”的官方立场,激起了民愤。

 

 

동감부산 3월
- 출처 및 제공 : 照片· 文镇优

 

被强制征用的人在1945年8月15日日本无条件投降后仍不得安宁。当时,载着7千多名朝鲜人返回釜山港的浮岛号被日本密谋炸毁,最终永远没能返回祖国。当时的乘务员提供的证词是,一开始船的目的港并不是釜山港,而是日本中部东海沿岸的舞鹤港。至今仍未能查明事件的真相。

 

不仅如此。悼念遭受痛苦的慰安妇少女们的少女像依然受到迫害。中国青年导演郭柯执导的讲述中国慰安妇幸存者的纪录片《22》成为人们关注的焦点。目前,韩国的慰安妇幸存者有23人,中国有19人。日本政府至今没有向包括慰安妇在内的被强制征用者们道歉。

 

동감부산 3월
- 출처 및 제공 : 照片· 权晟勋

 

看完展览后,四周玻璃窗外开阔的景象仿佛是对心灵的一种慰藉。换做平时,我一定会开心地拍照,可是现在的心情无论如何都明朗不起来。因为历史记忆的沉重还压在心上。

 

【开放时间】 星期二至星期日上午8点~下午6点 (星期一休息)
【前往方法】 부산시 남구 홍곡로 320번길 100
                   地铁2号线池谷站3号出口→换成城市小吧南区-9→帝强制动员历史馆门前下车 

 

 

*韩国语 内容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두려워하며 걸었던 길
잠깐 갔다 돌아올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길
기억하고 있습니까?

할머니는 일제의 위안부 강제동원을 피해 부산에서 간도까지 피난을 하러 갔다.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기 전 끝내 일본군에 강제 징집돼 러시아군 포로가 됐다.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돌아왔지만 강제로 끌려간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는 결국 누군가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보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3.1운동 100주년 강제동원의 역사를 기억하다
3월, 부산 아니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은 거리에 나부끼는 태극기와 만세 재현 운동을 보고 의아할 것이다. 올해는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며 독립을 선언한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야심을 품은 일본은 1910년 8월 22일 강제로 한국을 합병하고 1945년 8월 15일 폐전 선언을 하기까지 35년간 식민지화했다. 이 기간 일본은 한국을 병참 기지화해 중국을 비롯해 태평양 국가들을 침략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부산 대연동에는 일제의 물적, 인적 수탈의 만행을 기록한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 있다. 역사의 흔적을 찾아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찾았다.

 

■강제동원된 조선인 그리고 사과 없는 일본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고 본격적으로 한반도 수탈과 조선인 강제동원을 시작했다. 강제동원된 인력들은 탄광, 건설 등 현장에서 노예와 같이 감금돼 일하거나 군인으로 징집됐다. 젊은 여성들은 일본군 강제위안부로 동원됐다. 노무로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750만(중복 동원 포함), 군인은 20여만,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인원은 4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전시는 생존자들의 증언과 역사 기록, 각종 증거품, 현장 재현 등으로 구성돼 있다. 깊고 어두운 탄광, 제대로 된 안전설비도 없이 사람 한 명이 끼인 듯 들어가는 좁은 현장에서 일하는 광부의 모습은 역사의 무게만큼 마음을 무겁게 한다. 위안소 모형 속 작은 침대는 “강제 동원된 위안부 따위는 없었다”는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과 겹치며 분노를 일으켰다. 

 

강제동원된 사람들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에도 안녕하지 못하다. 당시 7천여 명의 조선인을 태우고 부산항으로 귀국하던 우키시마호(浮島号)는 일본의 음모로 폭발해 결국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승무원들은 애초부터 목적항은 부산항이 아닌 일본 중부 동해 연안에 있는 마이즈루항(舞鶴港)으로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진상조사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다. 위안부로 고통 받은 소녀들을 기리는 소녀상은 여전히 핍박받고 있다. 중국 청년감독 구오커(郭柯)는 <22>라는 중국 위안부 생존자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화제가 됐었다.  

'22'는 제작 당시 중국인 위안부 생존자 숫자다. 현재 한국의 위안부 생존자는 23명, 중국은 19명이다.

일본정부는 위안부를 비롯한 강제징용자들에 대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