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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장영실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로 본관은 아산, 봉건신분제도가 철저한 당시 사회에서 동래현 기녀 소생의 관노 출신으로 뛰어난 과학기술적 재능을 발휘하여 정3품인 상호군(上護軍)까지 올랐던 우리나라 최고 과학자중의 한사람이었다. 모든 일에 과학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제련, 축성과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났다. 이에 세종대왕은 여러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영실을 발탁해 세종5년(1423년) 정5품 벼슬인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올라 노예의 신분을 벗었으며, 세종14년(1432년) 중추원사 이천을 도와 간의대 제작에 착수하고 천문의를 제작 감독하였다.

세종15년(1433년)에 호군에 올랐으며, 이 해에 혼천의 제작에 착수하여 1년만에 완성하였다. 이듬 해 동활자인 경자자의 결함을 보완한 금속활자 갑인자의 주조에 힘썼다.
한편, 김빈(金殯)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제작 완성했다. 세종19년(1437년)에 제작 착수 5년만에 천체 관측용 대소간의,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해시계인 앙부일구, 주야 겸용의 일성정시의,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 다음해에는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의 옥루를 제작 완료하고 경상도 채방결감이 되어 동(銅), 철(鐵)의 채광, 제련을 감독했다.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水標)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 공으로 상호군에 특진되었으나 세종24년(1442년) 그의 감독으로 제작된 왕의 가마가 부서져 불경죄로 의금부에 투옥, 장형을 받은 뒤에 파면당했다.
장영실의 이러한 과학적 결실은 그의 뛰어난 탐구정신에 기초한 것이지만, 또 하나의 역사적 배경으로 고려 이래 이어온 과학적 결실과 함께 조선왕조 개창을 정당화 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음도 사실이다. 특히 천문역산학의 발전은 조선왕조의 개창이 천명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표명하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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