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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연표

조선시대 연표

조선시대 연표 : 시대, 주요역사내용
시대 주요역사내용
1392년 조선 건국
1396년 석포만호(石浦萬戶, 지금의 대연동) 왜선 1척 포획왜선 120척 경상도에 침입, 우리 병선 12척을 빼앗고 동래성과 동평성 공격
1397년 동래에 진(釜山鎭) 설치
1402년 2월 왜구 부산포(富山浦)에 침입 - 천호 김남보(金南寶)와 군사 10여명 살해
1405년 울주속현이던 동래현이 독립현으로, 동평현은 양주에서 동래 속현이 됨.
1407년 7월 부산포(富山浦)와 제포(薺浦, 乃而浦라고도 함, 현 진해 웅천)에 왜관설치 -부산포왜관 설치(1407∼1592. 현 부산진시장 일대)
1409년 동래의 속현이던 동평현이 다시 양주(梁州) 속현이 됨
1413년 경상도를 左道와 右道로 나눔- 경상좌도수군도안무처치사본영(慶尙左道水軍都按撫處置使本營)을 부산포에 설치
1418년 3월 울주의 염포(鹽浦)에 왜관 추가설치
1419년 이종무 대마도 정벌 - 제1차 부산포 왜관 폐쇄
1423년 부산포, 내이포에 왜관 재설치
1428년 동평현 다시 동래현 속현으로 환원 됨
1429년 제2차 회례겸쇄환사(回禮兼刷還使) 正使 朴瑞生 부산포에서 처음 일본출발
1439년 제3차 회례겸쇄환사(回禮兼刷還使) 正使 高德宗 부산포 출발
1440년 진을 동평현으로 옮겼다가 다시 동래현으로 환진-판현사를 현령으로 바꿈
1443년 2월 제4차 회례겸쇄환사(回禮兼刷還使) 正使 卞孝文 등 약 50명 부산포 출발 10월 제4차 회례겸쇄환사 부산으로 돌아옴 - 계행약조 체결
1460년 제5차 회례겸쇄환사(回禮兼刷還使) 正使 宋盧儉 등 약 100명 부산포 출발
1466년 군제개편 慶尙左道水軍都按撫處置使本營을 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으로 개칭
1475년 1월 부산포에 사염장(私鹽場) 설치
1479년 4월 제6차 회례겸쇄환사(回禮兼刷還使) 正使 李享元 등 부산포 출발
1485년 2월 3포 왜관에서 왜인과의 사무역 허락함
1490년 8월 부산포 첨사영에 성을 쌓음 - 부산진성
1480년 11월 다대포 만호영에 성을 쌓음 - 다대포성
1508년 11월 왜선이 가덕도 침입
1510년 4월 3포(부산포·제포·염포)왜란 발생 - 제2차 부산포 왜관 폐쇄
1512년 임신약조 체결 - 제포 단일왜관으로 일본과 교역 재개, 세견선과 사세미반으로 줄임
1521년 부산포왜관 재개항
1522년 西平浦(현 사하구 구평동) 수군진 설치
1544년 8월 加德(현 강서구 가덕도) 수군진 설치
1544년 9월 다대포만호영 → 다대포첨사영으로 고침
1544년 부산포 단일왜관 - 사량왜변(蛇梁倭變)
1547년 동래현이 동래도호부로 승격(부사 정3품), 동평현은 동래부 속현으로 됨 정미약조(丁未約條)체결 - 부산포왜관을 단일왜관으로 정함
1590년 3월 제7차 회례겸쇄환사(回禮兼刷還使) 正使 黃允吉 등 부산포 출발
1592년 울산의 開雲浦에 있었던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을 동래부 남촌면(현 수영동) 옮김
1592년 4월 임진왜란 일어남 - 부산포왜관 제3차 폐쇄
4월 14일 부산진첨사 정발 장군 순절함
4월 15일 동래부사 송상현 공, 다대포첨사 윤홍신 장군 순절함
8월 29일 삼도 수군연합군 가덕도 앞바다에서 적선 격파하는 승전
9월 1일 삼도(경상좌·우도, 전라좌도)수군 연합(이순신 장군 지휘)으로 부산포해전서 적선 100여척 격파 동래도호부 동래현으로 격하
1596년 윤8월 제8차 회례겸쇄환사(回禮兼刷還使) 正使 黃愼 등 309명 부산포 출발
1599년 동래현을 동래도호부로 다시 승격
1603년 절영도 임시왜관 설치(1603∼1607)
1605년 부산에서 노계(盧溪) 박인로(朴仁老) 가사 "선상탄(船上嘆)" 지음
1606년 동래읍성 남문밖서 임진왜란 때 전사한 송상현 부사를 모신 宋公司 세움
1607년 1월 1차 通信使 正使 呂祐吉 등 467명 부산포 출발
1607년 6월 두모포(현 수정동 일대)왜관 설치(1607∼1678)
1608년 동래부사 홍준(洪遵)이 동래향교 중건
1609년 3월 일본사신 제소오 등 부산포 도착
1609년 기유약조 체결
1614년 부산포에 영가대(永嘉臺) 설치 - (경상도 안찰사 권반이 세움)
1617년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동래온천서 온천욕을 하고『蓬萊浴行錄』을 지음
1617년 7월 제2차 通信使 正使 吳允謙 등 428명 부산포 영가대 출발
1621년 10월 두모포 왜관에 화재 발생
1623년 동래(두모포)왜관에서 밀무역으로 은화 7만냥을 증식한 林素 효수
1624년 5월 제3차 通信使 正使 鄭립 등 460명 부산포 영가대 출발
1624년 조선정부, 충렬사에 사액 내림
1629년 機張에 있었던 豆毛浦萬戶營을 부산포(현 좌천동부근)로 옮겨옴(1680년 현 동구 수정동 부근으로 자리 옮김)
-울산 개운포에 있었던 개운포만호영을 임진왜란 이후 부산포로 옮김
-장기에 있던 포이포만호영을 임란후 동래 남촌(현 수영동)으로 옮김
-경주 감포 있던 감포만호영을 임란 후 부산포로 옮겼다가, 동래 남촌으로 옮김
-영해 있던 축산포만호영을 임란후 부산포로 옮겼다가 감만포(현 감만동)로 옮김
-흥해에 있던 칠포만호영을 임란 후 부산포로 옮겼다가 남촌으로 옮김
1623년 7월 일본의 정기적인 무역선(세견선)이 동래(부산포)에 도착
1636년 8월 제4차 通信使 正使 任光 등 478명 부산포 영가대 출발
1636년 동래 남촌(현 수영동)에 있던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을 감만포로 옮김
1640년 일본측 두모포왜관 이전요청 제의 동래 사직단 건립
1643년 1월 제5차 通信使 正使 尹順之 등 477명 부산포 영가대 출발
1647년 6월 두모포왜관 서관 개축공사 준공
1647년 8월 두모포왜관 동관 개축공사 착공(1654년 1월 준공)
1653년 2월 두모포왜관의 계시정식화 함 - 동래부사 임의백의 건의에 따라 개시(開市)의 질서를 바로잡고 잠상을 방지하기 위해 7개항의 약조를 만들어 왜관 개시 시행 연향대청 건립(현 광일초등학교 자리)
1655년 동래에 東萊獨鎭 설치 - 양산과 기장군의 군사까지 관장
1655년 6월 제6차 通信使 正使 趙珩 등 485명 부산포 영가대 출발
1656년 2월 제6차 통신사 일행 부산도착
1659년 3월 일본이 대마도주를 통하여 왜관의 이전을 거듭 요청
1667년 2월 두모포왜관 담벽을 밀무역 단속키 위해 높이 쌓음
1671년 8월 일본인 200여명이 관문을 불법으로 뛰쳐나와 동래읍 난입해 난동 벌임
1673년 10월 두모포왜관을 초량왜관으로 옮길 것을 결정
1673년 11월 두모포왜관에 화재발생(1674년 2월, 1677년 2월에도 화재발생)
1676년 초량객사 건립(현 봉래초등학교 자리)
1677년 동래부에 대동법 실시
1678년 5월 초량왜관 草梁小山(현 용두산 일대) 개관 - 두모포왜관 폐쇄
조시약조 체결 - 일본인들의 어물, 채소 등 부식구입의 편의 제공
1682년 5월 제7차 通信使 正使 尹趾完 등 473명 부산포 영가대 출발
1683년 약조제찰비(왜관운영에 관한 금지조항 새긴 비석) 왜관 출입 수문에 세움
1687년 4월 동래에서 인삼밀무역상 처형
1693년 동래부소속 수졸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일본에 건너가 확인시킴
1694년 2월 부산출신 안용복과 울산어민들이 울릉도 잠입 일본어민 추방
1702년 경상도 관찰사 조태동 금정산성 개축
1709년 6월 초량왜관에 대한 조시(朝市)를 정함
1710년 초량왜관에 설문 설치
1711년 제8차 通信使 正使 趙泰億 등 500명 부산포 영가대 출발
1719년 제9차 通信使 正使 洪致中 등 475명 부산포 영가대 출발
1731년 7월 동래부사 정언섭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둘레 17,291척, 높이 17척)
1739년 초량왜관에 3개소의 복병막 설치
1740년 동래부사 朴師昌에 의해『東萊府誌』가 편찬됨 - 東萊府誌 7면 22동 79리, 총호수 5,641호, 남자 9,616(승려 230명 포함), 여자 9,483명, 총인구 19,099명
1748년 2월 제10차 通信使 正使 洪계禧 등 475명 부산포 영가대 출발 (윤 7월 부산도착)
1749년 12월 전국에 전염병 만연 50∼60만명 사망
1764년 제11차 通信使 正使 趙엄 등 477명 부산포 영가대 출발-정사 조엄이 대마도에서 고구마 씨를 가지고 와서 동래에서 재배케 함. 이것이 우리나라 고구마의 기원이 되었는데 영도의 조내기 고구마가 그 기원임
1766년 6월 10일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 동래 온정(溫井)을 크게 고침
1766년 정공단(부산첨사 정발장군의 추모단) 세움
1781년 사처석교비 세움
1787년 8월 부산포에 처음으로 이양선 출몰
1797년 9월 부산 용당포에 영국 제독 「불라우톤」의 탐험선(Hertha) 표착 통상요구
1811년 윤3월 제12차 通信使 正使 金履僑 등 328명 부산포 영가대 출발
1813년 동래향교 지금의 명륜동으로 옮김
1823년 11월 왜관교역은 허용하되 은자(銀子)사용은 금함
1846년 3월 동래기영회 발족
1852년 10월 미국의 포경선 부산 용당포에 나타남
1853년 1월 6일 경상감사 洪說謨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이양선에 대해 중앙정부에 보고
1855년 영국군함 Shyvioa호 부산포 입항
1859년 5월 3일 영국상선 애서아말호 부산 용당포에 입항 통상요구
1864년 12월 1일 일본에서 고종황제 축하 사절 초량왜관에 도착
1865년 2월 28일 조선정부, 부산첨사에게 왜관저탄 소모 폐단 근원을 보고케 함
1865년 3월 1일 부산첨사들이 착복한 공금 징수케 함
1865년 7월 19일 부산진 횡령 이속 정해수(鄭海洙) 효수
1868년 『동래부사례』 편찬
1868년 8월 천주교도 李廷植 등 8명, 경상좌수영성 將臺에서 좌수사 지휘아래 처형
1868년 12월 18일 일본의 명치유신을 알리는 先問使 부산포에 도착
- 동래부에 서계 등본 제출
- 동래부사 서계(書契) 접수 거부
1869년 12월 일본외무성 관리 佐田·森山茂가 서계 접수를 위해 다시 동래부로 파견 - 동래부사 계속 서계 거부
1870년 6월 1일 일본주재 독일공사가 군함 Hertha호로 부산포 입항하여 통상요구
1870년 10월 일본외무성 관리 吉岡과 森山를 서계 접수를 위해 재차 파견 - 동래부사 서계접수 계속 거부
870년 11월 25일 동래부 改量이 완성되어 新量安結數로 시행결정
1872년 5월 20일 일본외무성 관리의 서계를 동래부사 정현덕이 접수 거부
1872년 5월 27일 부산왜관 왜인들이 書契 접수를 요구하며 동래부에 난입
1872년 6월 초량왜관 일시 철폐하고 국교단절
1872년 9월 일본군함 2척 부산항 입항하여 부산근해를 측량. 부산왜관을 우리정부의 승낙 없이 불법적으로 일본외무부가 접수
1874년 7월 3일 전 경상도 관찰사 金世鎭 파면, 전 동래부사 정현덕 유배시킴
1874년 11월 3일 일본인들 왜관에 불법적으로 반입 대포를 쏘아 통교 시위
1875년 1월 19일 일본국 이사관 森山茂 등이 외무성의 새 서계를 가지고 동래부에 도착 (일본선박 7척 부산근해 불법항해 시위) - 동래부사 서계접수 거부
1875년 2월 5일 동래부사 黃正淵 일본 사신접대 - 서계 수정후 접수의사 표명
1875년 4월 21일 일본군함 운양호 등 3척 부산항 입항
1875년 5월 25일 일본군함 雲楊號, 통교를 위한 시위를 위해 부산포에 입항
1875년 6월 12일 일본 第二丁卯號 부산항에 입항하여 개항을 위해 시위 포격
1875년 7월 9일 조선정부, 일본의 서계 거부 결정
1875년 10월 11일 부산에 정박 중인 일본선박 孟春號 선원 7명 사하면 초량리에 난입기도
1875년 10월 12일 부산에 정박중인 일본해군 70여명 草梁里에 난입하여 소요 일으킴
1875년 11월 15일 조선정부, 일본의 서계 접수키로 결정
1875년 11월 16일 일본 무장선원 60여명 부산진에 상륙행패
1875년 11월 23일 일본 군함 3척(春號·雲楊·第二丁卯號) 부산항 시위 ⇒ 일본 헌병 불법상륙 시위
1875년 12월 13일 일본 헌병의 위협 발포로 동래 주민 12명 중경상을 입음
1875년 12월 19일 일본함대 7척 강화도로 향하던 중 부산항 입항 - 조선정부에 입항 사실 통보할 것을 동래부에 요구
1876년 1월 2일 동래부사 중앙에 일본군함 7척중 4척이 강화도로 출발했음을 보고. 동래훈도 이준수, 초량왜관장 대리 山之城祐長을 통해 강화도회담 요구문서 접수
1876년 1월 15일 일본군함 3척(먼저 와 있던 군함 2척을 합하면 5척)과 수송선 3척으로 구성된 함대와 600여명의 병력을 거느린 일본측 전권대사들이 강화도로 가기 위해 부산포에 정박시위
1876년 1월 17일 강화도에서 조선과 일본 양국의 수호회담 시작(조선측 대표 申櫶·尹滋承, 일본측 대표 墨田淸隆·井上聲)
1876년 2월 22일 조선정부, 일본에 파견할 수신사로 金綺秀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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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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