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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대

자성대 ( 子城臺, 동구 )

부산진(釜山鎭)은 조선 태종 7년(1407) 낙동강의 동쪽지역인 경상좌도(慶尙左道) 수군의 사령부로서 휘하 11개의 수군진성과 함께 동남해안의 방어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당시 수군은 배를 타고 바다에서 근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성종 21년(1490) 병선의 정박처로서 수군과 물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둘레 2,026척(약 950m)의 부산진성(구 부산진성)을 증산(甑山) 아래에 쌓게 되었다.

선조 25년(1592)의 임진왜란(壬辰倭亂) 첫 전투 때 부산진의 지휘관인 첨사(僉使) 정발(鄭撥)을 비롯한 군사와 백성들이 끝까지 싸웠으나 마침내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 일본군 장수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부산진성을 허물고 증산 정상에 본성(本城)인 증산왜성(倭城)을 쌓았다. 또한 동남쪽 해안가에는 본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지성支城: 원래의 성 밖에 보조로 쌓은 성, 자성대왜성(子城臺倭城))을 쌓았다.

원래 이 왜성이 축조되기 전에 우리의 성이 있었다고 한다. 즉 임진왜란 전 부산포에는 내성(內城)·외성(外城)이 있었는데 내성인 본성은 오늘날 정공단이 있는 일대를 중심으로 뒷산인 증산을 둘러싸고 있었던 성이고, 자성대는 그 외성으로서 쌓여져 있었던 것인데, 이 성을 임진왜란 때 왜군이 왜성으로 개수(改修)하였다는 것이다.

그 뒤 조선정부에서는 자성대를 중심으로 부산진성을 쌓고 4대문을 축조하여 관위를 정비하였다. 이때 만든 진성은 둘레가 1,689척 높이 13척이었고, 동문을 건춘문(建春門), 서문을 금첩관(金疊關), 남문을 진남문(鍾南門), 북문을 구장루(龜藏樓)라 하였다. 그 외에는 공진관(객사), 검소루, 진남정, 목장창(동쪽 10리), 대치창(동쪽 5리), 석포창(동쪽 45리) 등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성은 철거되었고, 자성대 부근의 바다는 매축으로 인해 옛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지금도 왜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성지는 2단이며, 성곽이 남아 있는 것은 최고 10m에 최저 1.5m이다. 1974~75년 정화공사 시행하여 동문·서문·장대를 신축하여 동문을 건춘문, 서문을 금첩관, 자성대 위의 장대는 진남대라 하고 각각 편액을 달았다.

또한 1975년 9월에는 동문 주위의 성곽을 개축하였다. 자성대에는 임진란에 참가한 명장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이 세운 천장군기념비가 남아 있고, 동쪽 산중턱에는 최영장군 비각이 보존되어 있다.

자료관리 담당자

문화유산과
이연심 (051-888-5058)
최근 업데이트
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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