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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자 및 학자

김병규

김병규의 호는 정산(井山)으로, 1887년 동래읍에서 출생하여 1962년 타계하기까지 한국 초창기 교육계에 투신하였고 다시 은행가로, 또 광복 후에는 경상남도지사를 역임하는 등 다채로운 생애를 보냈다. 그는 당시 동래지방에서 대학자로 알려진 외숙 지전 이광욱의 밑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한편 와세다대학 강의록을 읽어 근대학문을 습득하여 개화사상을 가졌다. 근대교육에 관심을 가진 그는 개양 학교에 입학하여 근대문화를 익혔으며, 1906년 개양학교를 마치고 동래의 삼락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교육계에 투신하였다. 이 삼락학교는 1905년 동래 기영회가 설립한 것으로 뒤에 개양학교를 흡수, 합병하여 동명학교(동래고전신)로 교명을 바꾸었다. 이곳에서 그는 학문에 정열을 쏟고 학생에게는 근대사상을 주입하는 한편 민족사상을 주입시켰다.

그 후 학교를 떠나 동래지방의 유력자 윤병준, 박인표, 오태환 등이 동래은행을 설립하고, 1918년 8월 동래은행 본점 지배인으로 취임하여 거창 등지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1927년 감사역이 되고 1931년 상무역에 취임하여 1933년 7월 호남은행으로 합병될 때까지 은행가로서의 재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933년 동래산업조합이 창업됨에 따라 초대 조합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일제시기 지방유지들의 권유로 동래군의 초대 민선 도의원이 되었다. 관선 도의원 때는 일부에서는 친일파라는 비난도 있었으나 그는 도의회에서 도예산심의를 거부하여 파문을 일으켜서 그의 진면목을 다시금 인식시켰다. 광복이 되자 미군정청에서는 그를 경남내무국장에 임명하고 다시 경남지사로 추대하였다. 민족발전이란 신념을 갖고 부산지방 민립대학기성회 발족에도 힘썼으며 부산대학의 발족에도 공이 컸다.

박기종

1839년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초량왜관의 일본상인과 교역할 수 있는 특권상인인 동래상고(東萊商賈)가 되어 상업에 종사하며, 한편 일본어를 익혔다. 그는 어장(영도 한진중공업앞 해역)과 김해지역의 토지를 매입하는 등 부산의 부호가 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그해 제1차 김기수 수신사 일행이 도일 할 때 동행하여 일본의 근대적 시설, 문물을 접하였고, 그 후 또 한차례 일본으로 건너 가 일본의 제철소, 조선소, 철도를 견학하고 해운업을 살폈다. 1895년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신교육기관인 부산개성학교를 세웠다.

1886년 10월 부산항 경무관에 임명되어 1898년 8월까지 근무하였고, 한편 고장의 상업발전을 위해 영주동에 상무소를 설립하였다. 또 1897년 9월에는 부하철도(부산 ∼ 하단)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1901년 일제의 방해로 인해 부하철도는 개설상 큰 어려움을 겪고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1896년 8월 외부 참사관으로 승진, 1899년에는 동지를 구하여 대한철도회사를 발기했으나, 그 뜻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1902년 6월 자기의 전재산을 투입하여 영남지선 철도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의 강압으로 그의 이권을 빼앗기고 재산도 잃었다. 1905년 6월 그는 변리공사라는 한직을 받기는 했으나 그는 계획했던 일이 좌절된채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속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부산에 있어 개화의 선각자였다.

손진태

손진태의 호는 남창(南倉)으로 부산시 북구 출신의 민속학자, 국사학자이다. 1927년 일본 와세다대학의 사학 및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33년경부터 연희전문학교 그리고 1940년부터는 보성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보성전문학교 재직시는 도서관장을 지냈다. 1945년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1949년 서울사범대학장, 1950년에는 서울대 문리대학장을 지냈고 6.25전쟁으로 납북되었다. 그의 논저는 대단히 많다. 광복전에는 약 20년 동안 민속학연구에서 한국사연구로 연구영역을 넓혀갔다. 민속사에 있어서 주력한 연구는 무속, 고대문화의 가옥, 금승, 소도, 입석, 설화, 혼인, 장생, 산신, 중국의 신앙, 인접 문화권과 고대민속과의 관련 등이다. 그는 연구방법으로서는 문헌에 의한 고찰을 하였으며, 그는 한국민속학 분야에서 최초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학문업적을 남겼다.

8.15광복후 그간의 민속학의 중요 논문을 엮어 1948년『한국민족설화연구』를 발간하였으며 이 연구는 오늘에도 많이 인용하고 있다. 한편, 민속학에 국사학쪽으로 학문적 영역을 확대하여 민족사학, 역사이론의 수립에 힘썼다. 그 결과는 1948년『조선민족사개론』, 1949년『국사대요』를 출판하였다. 그는 스스로 신민족주의의 사관을 폈다. 『조선민족사개』서문에서 "진정한 민족주의는 민족 전체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고 하였으며, 그는 일제말에 사상을 굳혔다"고 하고 그는 계급사관을 배격하였다. 이로서 흔히 신민족주의 사학자라고도 한다.

오태환

오태환의 자는 문옥(文玉) 호는 우창(偶倉), 승정원 승지 진근(眞根)의 장남으로서 1884년 현 기장군 철마면에서 출생하여 사직서참봉(社稷暑參奉)에 서임되었다. 일제침략기 민족자본을 육성하기 위해 동래은행의 창립에 참여하여 초대 두취(頭取)를 역임하고, 1919년경 서울에서 인촌 김성수가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창설하였을 때 뜻을 같이하여 다수의 주를 인수하였으며, 인촌이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를 세우고 도서관을 건립할 때는 다액의 금품을 희사하였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건인 경북유림사건이 탄로되었을 때는 상해 임정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던 사실이 왜경에게 탐지되어 일시 영어(囹圄)의 몸이 된 일도 있었다.

그는 국가의 발전이 교육에 있음을 깊이 생각하고 있던 차에 1939년 유서깊고 많은 인재를 배출시킨 호주선교회가 경영하던 동래일신여학교가 폐교의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은 고등교육기관이 드문 당시로서, 동래, 부산의 비등하던 여론을 업고 동래의 김병규, 추봉찬 등이 각지의 유지를 순방하였으나, 뜻을 이루기 어렵다는 소문을 듣고 전답 660,000㎡을 희사하였다. 이에 동래의 김명오가 거금 5만원을 내놓고 김봉상, 한성홍, 최진현, 추종엽, 김기진, 박길호가 각각 자금을 갹출하였다. 재단설립중 오태환은 다시 토지를 내놓아 도합 825,023㎡의 실로 막대한 재산이었다. 그는 선교회 경영의 학교에서 한국인의 사립학교로서 다시 계승 발전하게 되었으며, 오태환은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명분 있는 사회사업이나 국가 민족에 도움이 되는 일에는 아낌없이 희사하였다. 부호라 하지만 자신은 검소하고 일제하 장래 민족이 살길은 오직 교육임을 깊이 생각하는 선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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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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