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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열사

녹도만호 정운

정운의 자는 창원(昌原), 하동인, 영암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거산도찰방, 웅천 현감, 제주 판관을 거쳤다. 1592년 임진난이 일어날 때는 녹도만호였다. 임란 초기에 경상우수사 원균은 도망하여 곤양부근에 이르렀을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때 이순신의 휘하 장수들은 관할론과 부원론으로 대립되었다. 이때 정운은 어영담 등 여러 장수와 함께 경상도는 우리의 국토가 아닌가하고, 부원론을 주장하였다. 이에 이순신의 경상도 출병이 이루어졌다. 그는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수군의 선봉장이 되어 옥포, 적진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 해전에 참가 분전하였다. 8월 24일 전라좌수영군은 경상좌수영군과 합동하여 부산포를 공격할 것을 결정하였다. 9월 1일 이른 아침 부산포에 향하고 8시경 몰운대를 지나자 돌풍이 갑자기 일어나고 파도가 넘돌아 함대를 정비하고 화준구미(花樽龜 尾)에 이르렀다. 여기서 왜선 5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왜선 8척, 서대포 앞바다에서는 왜선 9척, 절영도에서 왜선 2척을 만나 모두 격파하였다.

이어 부산포내에 돌선하였다. 이때 적선 400여척이 선창 동쪽의 산기슭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때 정운은 우부장(右部將)이었다. 이에 우장병은 죽음을 무릅쓰고 분전하였다. 이때 100여척을 격파, 많은 적군의 군기를 노획하는 한편 많은 적군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정운은 회군할 때 적탄을 맞아 전사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충장의 시호가 내렸으며, 영암의 충절사와 이곳 동래충렬사에 봉안되어 있다.

다대첨사 윤흥신

윤흥신은 파평인으로서 인종 때의 권세가인 윤임의 아들이라고 하며, 진천현감을 거쳐 1592년 임진난 때 다대포첨사로 부임하여 역전 끝에 순사하였다고 한다. 임진난 당시의 기록인 『징비록』에 『다대첨사 윤흥신은 힘써 싸우다 죽었다』고 하였고 『재조번방지(再 造蕃邦志)』"왜적이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와 다대포를 함락시키니 다대 첨사 윤흥신이 힘써 싸우다가 피살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임진란이 끝난 선조 37년(1604) 6월 25일에 공표된 선무공신록권에도 원종 1등공신에 올라 있다.

그런데 윤흥신의 사적과 다대포의 사적이 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영조 때 동래부사 조엄의 『윤공유사(尹公遺事)』, 동래부사 강필리의 『윤공사절기 (尹公死節記)』에 비롯된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다대포진에서는 선조 25년(1592) 4월 14일 적의 내습이 있었으나 첨사 윤흥신공을 비롯한 군, 관, 민은 성을 굳게 지켰으며, 15일 적군이 동래성을 공격할 때 한편으로는 적군의 공격을 다시 받고 첨사와 군, 관, 민은 끝까지 항전하여 첨사이하 많은 희생을 내고 성은 함락되었다. 윤흥신은 때마침 진에 와 있던 동생 흥제와 함께 순사하였다고 한다. 윤흥신공은 동래 충렬사에 영조 48년(1772년)에 배향되어 그의 충혼을 길이 추모하고 있다.

동래교수 노개방

노개방의 자는 유한(維翰)이요, 본관은 풍천이며 밀양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문재가 있었음은 그의 동학인 배대유의 제문과 조존성 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충분히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의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던 것도 아울러 알 수 있다. 피나는 가난속에서 뛰어 난 재주를 가지고 열심히 학문에 정진한 끝에 과거에 급제 하였으나, 뒷바라지 해주는 사람이 없어 늙은 어머님을 봉양하려는 뜻에서 자원하여 동래향교의 교수직을 맡았던 것이다. 그가 죽은 뒤 174년이 되는 해에 동래부사 엄린이 적은 『동래교수 증도 승지 노공유사기』에는 노개방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참작하여 가장 완비된 전기를 쓰고 있다.

『노공유사기』에 의하면, 노개방의 선대사적은 확실하지않고 다만 "국조과방록에서 아버지는 노일이라 하고, 밀양유림에서 기록한 것에서는 부인이 여흥이씨로 학생 경옥의 딸이며 그 증조부는 한림(翰林)태(跆)"라고 하였다. 그는 가정계해(嘉靖癸亥) 즉 명종 18년(1563년)에 나서 26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동래교수로 부임하여 30세에 동래에서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상이 노개방에 대한 간략한 인적사항이다. 충과 효와 예는 선비들의 기본교양임에 이 선비정신을 다 실천하려고 노력한 이가 바로 노교수인 것이다. 미관말직에 있는 그가 살아 남았다 하더라도 아무도 탓할 이가 없는 당시 상황에서 굳이 죽음의 직장으로 다시 돌아와 선성(先聖)의 위패를 봉안하고 대의에 몸을 던졌다는 사실은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이러한 그의 충절로 뒤에 그의 사적이 알려지자 도승지에 증직되고 동래 충렬사와 송공단에 배향되었으며, 향리인 밀양의 중봉서원(中峯書院)에 봉안되어 그의 충혼을 길이 추모하고 있다.

동래부사 송상현

송상현은 자는 덕구(德求)요, 호는 천곡(泉谷)으로 본관은 여산이다.

선조 3년(1570), 20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승정원정자로 보임되었다. 선조 11년(1578)에 저작랑이 되고 이듬해에 박사에 서임되었다가 나아가서 경성판관이 되었다. 선조 16년에 사헌부지평으로 돌아와 예조, 호조, 공조의 정랑(正郞)이 되었다. 이듬해인 1548년 종계변무사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선조 20년에 다시 들어와 지평(持平)이 되고, 동 21년에 백천군수로 나아가 3년만에 전직되어 들어와서 충훈부경력, 사헌부집의, 사간원사간, 사재군자감정이 되었다. 선조 24년(1591)에 집의 (執義)로서 통정대부에 올라 동래부사가 되니 곧 임진왜란 바로 전년이었다.

송상현은 동래로 부임하여 백성을 다스리고 집무를 수행함에 있어 오직 성의와 신의로써 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그들 따르기를 마치 부모와 같이 하였다. 성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였으며, 임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1592년 4월 14일 오전 왜군에 의해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전투가 끝나자 적군의 일부 병력은 동래성으로 진출하였다. 부산과 동래는 가까운 거리이고 또 부산의 행정관할은 동래부에 있었기 때문에 적군의 동태는 곧 동래에 알려졌다. 이 때에 경상좌병사 이각이 울산병영에서 동래부에 왔으나 적의 대군이 밀어닥친 것을 알고 도망하였다.

한편, 양산군수 조영규의 구원이 있었다. 동래성에 적군이 침입한 것은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14일로 그들은 여세를 몰아 내침하여 포위하고 15일에 공격을 개시하여 전투가 전개되었다고 한다. 송부사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대비하고 있었다. 적은 취병장(聚兵場, 현 동래경찰서)에서 진출하여 백여명의 군사로 하여금 한 목패를 남문밖에 세웠다. 송부사는 군 관 등에 명하여 나가보게 하니 글에는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고 쓰여 있었다.

송부사는 또한 목패에다 "싸워서 죽는 것은 쉬워도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고 글을 써서 적중에 던졌다. 막중한 대군을 앞에 두고 송부사는 결사의 굳은 뜻을 피력하였다. 그러자 적군은 15일 아침 적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아군의 주력은 남문루를 중심으로 집결되었다. 남문에서 피아 양군이 사력을 다해 격전을 치렀으나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민, 관, 군이 죽을 힘을 다하여 결사항전 하였으나, 워낙 막강한 적군의 무차별 살육이 감행되는 가운데 성민들의 시체는 산을 이루고 피는 내를 이루었다.

송부사는 문인답게 죽을 각오를 표시하였던 것이다. 호상에 걸터앉아 사람을 시켜 빨리 조복을 가져오게 하여 갑옷 위에 입고 의연한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용히 호상에서 내려 북향사배하고는 붓을 잡아 부채에 "외로운 성에는 달이 흐려지고 다른 성진에는 지척이 없다. 군신의 의가 무거우니 부자의 은정 그 어찌 가벼우리까라고 글을 써서 부모님께 하직의 인사를 사람을 시켜 보냈다"고 한다.

송부사의 주위에는 군관 송봉수, 김희수 등 4 ∼ 5명, 향리 대송백, 부리, 소송백, 관노 철수, 매동 등이 좌우에 열입하고 있었는데 적병들이 앞으로 핍박함에 송부사, 김희수, 대송백 등은 격투 끝에 전사하였다. 이 동래부의 전투에서 이름을 전하는 자는 송부사의 측근에는 종행인 신여로, 금섬이 있으며, 이밖에 양산군수 조영규, 교수 노개방, 교생 문덕겸, 군기시첨정 김사모 등이며, 부민으로는 다만 김상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이촌녀 등이 전한다. 순사한 후 선조 27년(1594)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를 추증 하였으며, 충렬공의 시호를 내리고 숙종 7년에는 좌찬성을 가증하였다. 동래의 충렬사, 송공단, 정읍의 정충사, 고부의 선충사, 청주의 신항서원, 송경의 숭렬사, 경성의 화곡서원에서도 모시고 있다

부산첨사 정발

정발의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그는 무과를 거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해남현감을 거쳐 북변 종성에 여진족의 침구 가 있어 원수의 막하로 부임하여 구란을 평정하였다. 그뒤 거제현령을 지내고 들어와 비변 사의 낭요(郎僚)가 되어 팔사의 낭관을 겸하고 있다가 위원군수로 제수되기도 했다. 강섬의 천거로 훈련원 부정(副正)이 되고 다시 사복시로 옮겼다. 이때부터 왜인이 침략할 기미가 보였는지 조정에서는 드디어 그를 절충장군으로 품계를 올려 부산진첨사로 삼았으니 이 해가 바로 임진왜란 발발해인 1592년이었다.

부산으로 부임할 때 아들과 동행하였다. 왜인의 침입이 예상되어 아들을 억지로 고향으로 돌려보내고자 하였다. 아들은 남아있기를 간청하니 "너는 돌아가서 내 어머니와 할머니를 봉양하라"면서 종자를 시켜 떠나도록 하였다. 한편, 남행하고 있던 조방장 이정헌을 막빈으로 초빙하여 부산진성의 방위를 함께 의논하였다.

임진 4월 13일 저녁 왜적의 제1군 18,700명이 부산앞바다에 쇄도하였다. 13일 당일에는 적 군은 절영도 전방에서 가박하고 공격은 개시하지 않았다. 다만 왜군의 장인 소서행장(小西 行長)의 막료인 대마도 주(主)인 종의지(宗義智)가 약간의 군사를 거느리고 상륙하여 부산 진성의 경비상황을 정탐하고는 휘하 장수인 평조신(平調信)을 시켜, 군의 내침의 사유를 말하고는 길을 빌리는 가도를 요구하는 글을 목판에 쓴 것을 성밖에 세웠다고 한다. 이때 정발은 가도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그리고 일전을 불사한다는 굳은 결의를 하고 전투태 세를 공고히 하였다.

이튿날 14일 적은 예측한대로 부산포 우암에서 삼분하여 결진하고는 배를 포안에 붙여 차례로 상륙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적군은 성을 첩첩으로 포위하였다. 절대다수의 병력을 가진 적군은 신무기인 조총을 마구 발사하여 천지를 진동시키며 성을 넘어오려고 하였다. 이에 아군은 이를 제지하기 위해 4면에서 혈전을 벌였다. 총탄이 터지는 소리 화살이 나는 소리 순식간에 처절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정발은 휘하의 장사를 거느리고 성내를 순시하며 독전하였다.

군, 성민은 적을 물리치지 않으면 모두 죽게된다는 마음으로 분전을 계속하였다. 정발은 이미 예측한 일이나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가 무인답게 죽을 각오를 하고 더욱 사졸을 격려하며 자신도 분전하였다. 그러나 노도와도 같이 밀어닥쳤던 적군의 일부 군사들 이 북쪽의 허술한 곳을 넘어 쳐들어왔다. 따라서 순식간에 성중(城中)은 혼란에 빠졌다. 이에 피아쌍방 육박전이 전개되고 적의 무차별 살육이 시작되었다. 이 가운데 정발도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파상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적의 수는 늘기만 했으며 소수 군민의 필사적인 저항으로는 이를 막을 도리가 없었고 차례로 순사하며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부산진성 전투에서 순사한 이의 이름을 남기고 있는 자는 적은데 순사한 애향, 용월은 정공단에 합사하고 있다. 영조 37년(1761 좌수사 박재하가 공의 전망비를 세웠으며, 영조 42년(1766)첨사 이광국이 정공단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시호를 내리어 충 장공(忠壯公)이라 하고 좌찬성을 증하였다.

양산군수 조영규

자는 옥첨(玉瞻)이며, 직산인으로 수의부위 준(準)의 아들로서 중종 30년(1535) 장성부 백암리에서 출생하여 명종 6년(1551) 무과에 급제하였다. 훈련원 초관을 거쳐 사복시 주부, 판관이 되고 이어 제주판관, 무장현감이 되었다. 그 후 부친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났다 가 다시 영암, 용천, 낙안, 영해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1592년 임진에 양산군수로 부임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왜적이 쳐들어왔다. 병사 이각은 성을 버리고 먼저 달아나 고 열군(列郡)은 풍미하여 믿을 바가 없었다. 그는 이미 전세가 기울어졌음을 탄식하였으나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말을 달려가서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말하기를 "국사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공은 장차 어찌하겠소" 하니 송상현은 "마땅히 이 성을 굳게 지킬 따름"이라 답했다. 이에 그도 "이 환란을 당하여 마땅히 그대와 같이 이 성을 지키다가 나라를 위하여 죽을 따름이라"라고 했다.

송상현이 그의 손을 잡고 크게 기뻐하자 그는 "나는 죽음으로 싸우기를 결심했으나 다만 노모가 양산에 계시니 돌아가 하직한 후에 다시 오겠다"하고 곧 양산으로 돌아가 어머님께 작별을 고했다. 말을 달려 동래로 오니 성은 이미 포위되어 위급한 가운데 있었다. 칼을 빼어들고 거세게 말을 채찍질하니 적이 잠깐 피하는 틈에 성중에서도 그가 다시오는 것을 알고 급히 성문을 열어 받아들였다. 그 후 그는 송부사와 같이 힘써 싸우다가 순사하였다. 숙종 때에 호조참판을 추증하였으며, 장성 모암서원, 양산 충렬사, 동래 충렬사에 배향하고 있다.

제생 문덕겸

제생이란 향학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가리키는것으로 문덕겸은 교수 노개방 밑에서 공부 하던 학생으로 임난을 당하여 선생과 같이 순절한 사람이다. 문덕겸은 교수 노개방이 밀양으로 어머니를 뵈러 간 사이에 적이 밀려 왔으므로, 향교에 봉안했던 선현의 위패를 스스로 성중의 정원루로 옮겨 모신 뒤 그 곁을 떠나지 않다가 적이 쇄도하매 돌아온 노교수와 함께 그 앞에서 조용히 순사하였다. 그는 남평문씨로서 동래에 옮겨와서 살았는데 당시의 집은 여고리(현 사직동)였던 모양인 듯 적병이 북으로 올라간 뒤에 종 검산이 몰래 덕겸의 시체를 여고리로 옮겨다 묻었다.

자식으로는 아들 건중(建中)이 있었으나 일찍 죽고 부인 민씨가 자부 정씨와 9살 먹은 손녀를 데리고 덕겸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고부가 함께 길가에서 죽었다. 종 검산이 여주인을 찾아 헤매다 성의 서문에서 찾아내었는데 9살짜리 손녀가 두 시체 밑에 깔려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검산은 손녀를 금강골의 바윗굴(金岡谷 岩窟)에 숨겨두고 두 시체를 업고 가서 묻었다. 문덕겸 부부는 한묘에 묻혔으며 손녀는 자라서 동래인 김천상(金天祥)에게 시집갔다. 김천상의 후손은 동래 유생 이동형에게서 비문을 받아 덕겸의 묘에 비석을 세웠다. 검산은 또 주인집 토지문서를 우물돌 밑에 묻었다가 뒤에 찾아내니 이로 인해 문씨의 전답과 토지가 모두 김씨에게로 돌아갔다. 문덕겸은 뒤에 동래충렬사에 배향되고 영조 13년에는 호조좌랑에 증직 되었다.

제생 양조한

문덕겸과 함께 향교의 제생으로 노개방교수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있던 양조한은 임진란때 순절하였음에도 그 사적이 오래도록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사적을 밝혀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한 이유이며, 또한 잘못되어 그 동생되는 양통한(梁通漢)의 사적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양조한 사시말에 의거해 살펴 보면 본래 가매실에 살던 양조한은 임진란이 일어나매 문덕겸과 의논하여 향교의 위판들을 더럽히지 않겠다며 땅에 가려 묻고 오직 선성(先聖)과 오현(五賢)의 위패만을 모시고 성내 정원루로 옮겼는데 적탄에 맞아 노개방, 문덕겸 등과 같이 전사하였다.

아들 양홍도 전사하였으며, 당시 13세 손자 부하(敷河)는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31세때 고국 부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양통한은 그가 형 양조한의 손자임을 확인하고 재산과 노비를 돌려주고 장가를 보내서 살게 하였다. 부하는 두아들과 세딸 모두를 한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았다. 일년에 2번씩 소를 잡고 일문과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등 베풀었고,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송시열이 남문비기를 쓴 것은 임진란 후 77년 되는 해이고 그 비를 세운 것은 경술 즉 1670년인데 부하가 91세때의 일이다. 그 비문에 양조한의 이름 대신 양통한의 이름을 썼기 때문에 이것이 불씨가 되어 양조한의 후손과 양통한의 후손사 이에 소송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의 사정으로는 송시열이 쓴 비문을 감히 고치지 못했다. 그 결과 양조한은 사절한 사람이 안되고 대신 살아있었던 동생 양통한이 사절공신이 되었던 것이다.

뒤에 양통한은 난후의 호적에 보이고 또 『화왕수성록』에도 이름이 보임으로 사절한 사람은 형인 양조한 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미 양통한은 비문에 실리고 공신녹권에 실려있고 또 의병에 가담하여 창녕 화왕성에서 곽재우장군과 같이 나라를 지킨 공이 있으므로 결국 두 사람은 다 증직하고 표창하도록 결론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양조한은 향교에서 훈도를 하였기 때문에 호조정랑을 증직하고 양통한은 호조좌랑을 증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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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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