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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렬효행

정렬 전소사, 함소사

동래에 고부(姑婦)가 모두 열녀가 난 집이 있으니, 이가 최의준의 집이다. 전소사는 동래부의 관속(官屬) 최의준의 어머니로 그 남편이 죽자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이로 인해 죽어 열녀가 되었다. 전소사의 며느리이자 최의준의 아내인 함소사 역시 남편이 죽자 미음조차 먹지않고 10여일을 굶다 남편을 따라 죽었다. 이로써 일가의 정렬을 앞뒤로 이루어 열녀문을 나란히 세우게 된 것이다.

효녀 김씨

조선 성종 때 만호(萬戶) 벼슬을 하는 김보는 두 남매가 있었다. 아버지 김보가 병에 걸렸을 때 딸이 하늘에 맹세하여 빌기를 "만약에 하늘이 도우시지 못해 아버지께서 불행을 당하시면 나도 따라 죽으리라"고 하였다. 그의 부친이 병으로 죽자 그 딸은 남동생을 불러 "너는 살아서 어머니를 모셔라. 나는 죽어서 아버지 시중을 들어 드리련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종 22년(1491)에 이 일이 국가에 알려져 정려가 세워지고, 효녀의 묘는 운봉산(반송동 소재) 밑에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그 무덤을 파헤쳤는데, 난이 평정된 후 수사(水使)의 꿈에 김씨가 나타나 "저는 동래부 효녀 김씨로 불행히 저의 묘가 왜구의 파헤침을 입어 뼈가 드러난 지 오래니, 원컨대 뼈를 거두어 묻어주시기 바라옵니다."라고 했다. 수사가 놀라 깨어 이상히 여기고 다음날 탐문하여 보니, 과연 효녀의 묘가 운봉산에 있었는데, 파헤쳐져 있었으므로 해골을 거두어 옛 무덤에 잘 묻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그날 밤 김씨가 수사의 꿈에 다시 나타나 고맙다고 사례하였다 한다.

효자 김득인

우리고장 출신의 효자 중 고려 때 모친상을 당해 3년간 여묘(廬墓) 살이를 한 진사 정초를 제외하고는 조선시대에 들어 처음으로 효자촌의 명맥을 이은 사람이 김득인(金得仁)이다. 김득인은 조선시대 언제 태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세조 때에서 중종사이의 조선 초기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자라면서 어머니 봉양을 지극히 하였다.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였으나 굶으면서까지 어머니의 끼니를 걱정케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황령산 아래에다 장사를 지내고 여막살이를 3년간 하였다. 이어 그 아버지가 돌아가자 어머니 묘 앞으로 이장하여 또 3년간의 여막살이를 하였고, 이때 부산의 왜인들이 흉년을 만나 사방으로 노략질을 하다가 묘를 손질하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이 일대에는 감히 노략질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뒷날 왜인들은 김득인에게 미역과 쌀 등을 보내주며 돌아가신 후에도 부모를 섬기는 정성에 고개를 숙여 존경을 표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김득인에게 종사랑(從事郞)으로 풍저창(豊儲倉)의 부봉사(副奉事)라는 직첩을 내리고 포상하였다.

효자 옥종손

부산지방은 출신 열사에 못지않게 인간의 근본도리를 잘 지킨 효자 열녀가 많았다. 특히 그 중에서도 『속삼강행실도』와 『조선명륜록』에 까지 실려 널리 알려진 사람이 옥종손(玉從孫)으로, 옥석근(玉石根)이다. 그의 나이 11세 때에 아버지가 악질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스스로 자기 손가락을 끊어 피를 약에 타서 드리니 그 부친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조정에서도 이를 알고 가상히 여겨 중종 2년(1507)에 효자비를 세우고 단(壇)까지 지어주었다.

효자효부 천씨 일문

동래 석대동 천씨가문은 효자, 효부가 많이 배출된 가문으로 이름이 높다. 이가문은 임진왜란때 명나라 구원병으로 우리나라에 온 화산군(花山君), 충장공(忠壯公), 천만리(千萬里) 장군의 후손으로 영양천씨 집안이다. 천장군의 4세손으로 효자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일세효자는 천찬식의 아들인 천성태이며, 2세 효자는 성태의 아들 세모이며, 3세 효자는 세모의 아들 술운, 4세 효자는 술운의 아들 상련, 5세 효자는 상련의 아들 우형이었으며, 일효부는 5세 효자 우형의 아내인 김해김씨였다.

이들 효자들은 효는 백사지 행실의 근원임을 깊이 알아서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섬기기를 지극히 했으며 부모가 병중에 들면 손가락을 자르거나 허벅지 살을 베어 치병에 힘썼으며 별세 후에는 꼭 3년씩 시묘를 하였던 것이다. 이들 효자들이 시묘를 할 때는 그때마다 큰 호랑이가 내려와 호위해 주었으며 뜻밖에 묘 부근에서 샘물이 솟아나 시묘의 불편을 덜어 주었다. 그러나 시묘가 끝나면 호랑이도 가고 없고 요자찬이라 불리는 샘도 말라 버렸다고 한다. 효부 김씨는 선대의 무덤위에 지방의 권세가 묘를 쓰고자 할 때 생명을 내던져 이를 지킨 분으로 조상 섬기기를 정성으로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들 효자, 효부에게 많은 포상을 내리고 정려각을 세워 기리게 하였다. 인근 주민들은 지금까지도 석대동 일원의 효자촌이라 부르며 매년 10월 10일에는 정려각에서 향사를 받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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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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