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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부산이야기 9월호 통권 143호호 기획연재

“의도하지 않은 색의 조화가 염색예술의 묘미입니다”

염색예술 20년 … 천연염색기법 복원하고 이어 가는 부산 유일 염색명장

내용

박영혜 부산공예명장 

 

부산시는 매년 공예명장을 선정한다. 지역 공예인 사기와 자긍심을 올려 공예 발전을 꾀하고 공예인 지위를 높이자는 취지다. 2013년부터 했으니 올해 6년째다. 목칠, 도자, 섬유, 금속, 종이 등 여러 부문에서 선정하므로 명장이 꽤 되지 싶어도 의외로 적다. 그만큼 엄정하다는 방증이다. 지난 7월 9일 올해 부산공예명장으로 선정된 박영혜(68) 작가는 열한 번째 명장. 섬유 부문 염색명장은 부산에서 처음이고 혼자뿐이다. 

 

교원 퇴직 후 염색공예 작업실 내고 개인전 열어


“한 20년 동안 하고 싶은 일 열심히 하다 보니 작은 일들이 모여 오늘 여기까지 왔네요.” 

 

박 명장이 본격적으로 염색에 나선 건 1999년. ‘한 20년’이란 표현은 그래서 나온다. 그해 8월 초등학교 30년 교직 생활을 마감했다. 서면에 작업실을 냈고 단풍 드는 11월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때부터 오직 염색 외길을 걸어 마침내 올해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부산 인구 350만 명 가운데 유일한 염색명장이 됐다.

 

염색예술. 박 명장은 자신이 추구하는 염색을 염색예술이라고 정의한다. 천을 단색으로 물들이는 데 치중하는 보통의 염색에서 벗어나 예술적 경지에 이른 염색을 추구한다. 박 명장이 차린 1인 출판사 ‘색깔사랑’에서 2017년 출간한 저서 제목도 ‘염색예술, 일상을 물들이다’다. 단색 염색에 한계를 느낀 전국의 염색 마니아가 박 명장을 찾아와 갈증을 풀곤 한다. 박 명장에게서 염색을 배운 제자가 1천 명이 훨씬 넘고 강의를 들은 일반인도 1천 명이 훨씬 넘는다. 박 명장 염색예술은 이미 부산을 물들였고 이제 한국을 물들인다. 

 

‘마음대로 물감을 떨어뜨리고 그리고 자유분방하게 휘젓고 거침없이 선을 그리며 자유를 만끽하다 보면 내가 사용한 모든 색깔과 내가 그린 모든 선이 새로운 질서를 그려서 형태를 만들어 낸다. 인간의 일탈과 자유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또 다른 질서와 규칙적인 형태를 만들어 간다.’

 

‘염색예술, 일상을 물들이다’ 출판기념을 겸한 세 번째 개인전 초대 글 한 대목이다. 박 명장은 지금까지 네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초대 글에서 보듯 박 명장은 염색예술의 가장 큰 미덕을 일탈과 자유에 둔다. 일탈과 자유는 틀에 갇히지 않은 예술정신의 다른 말. 곧 염색의 매력이기도 하다. 의도하지 않았던 우연의 아름다움을 만나는 기쁨이 크고 거기에서 새로운 질서와 규칙을 만나는 즐거움이 크다. 

  

박영혜 부산공예명장은 부산 유일의 염색명장이다. 박 명장은 전통 염색기법을 복원하고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박영혜 부산공예명장은 부산 유일의 염색명장이다. 박 명장은 전통 염색기법을 복원하고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교직생활 중에도 염색공예 연구 매진 

 

“대학에서 강의할 때 실패는 없다고 가르쳤어요. 실패는 또 다른 기법의 창출인 거죠.” 박 명장은 초등학교 퇴직 후 성심외대 등 몇 군데 대학에서 15년 남짓 염색기법을 강의했다. 강의하면서, 그리고 실습하면서 잘못된 염색은 없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실패를 통해서 새로움으로 나아갈 수 있다며 실패에 방점을 찍는다. 염색이 가진 개방성과 분방함을 이야기한 거겠지만 듣기에 따라선 삶의 지혜가 오롯이 담긴 말이다. 명장은 명장이다. 

 

엄밀히 따지면 50년 세월이었다. 박 명장은 명장이 되는 데 ‘한 20년’ 걸렸다고 했지만 교직 30년을 더해야 마땅하다. 집안이 어려워 미대를 가지 못한 한이랄지 아쉬움을 교직 30년에 쏟아 부었다. 그러면서 섬유예술의 기본을 터득했다. 1995년 경성대 대학원 미술교육과에 들어가 석사학위까지 땄다. 석사 논문이 ‘초등학교 미술교육에 있어서 표현기법에 관한 연구-공예염색기법을 중심으로’일 만큼 염색을 파고들었다. 그 이유는 몸은 교직에 있어도 본인 말대로 ‘가슴 한구석은 늘 헛헛했던’ 탓이다. 

 

“어릴 때 엄마가 국제시장에서 포목점을 했어요. 자투리 천으로 인형을 만들며 소꿉놀이했죠.” 그러다가 영도 청학초등학교 4학년 때 교사로 갓 부임한 김연태 선생을 담임으로 만나면서 천의 세계에 눈떴다. 박 명장이 ‘천의 경이로운 세계’라고 할 정도로 큰 영향을 받았다. 선생님의 교육자료전 출품작을 거들며 여러 가지 천이 야자수 그림이 되는 천 모자이크를 접했다. 엄마의 포목점, 담임 선생님의 야자수 그림 등이 어우러져 섬유에 대한 예술적 감성을 키워 나갔다.

 

초등학교 담임의 교육자료 돕다 염색에 관심


그러다 집안이 쫄딱 망했다. 사라호 태풍이 몰아친 1959년 그 무렵이었다. 국제시장에서 포목점을 할 정도로 넉넉하고 6·25전쟁 피란민을 품을 정도로 넓은 집에 살았지만 아버지가 거제도 옥포에서 짓던 방파제가 태풍에 흔적도 없이 떠내려가면서 졸지에 가난의 멍에를 썼다. 집기마다 빨간딱지가 붙었고 빚쟁이가 들이닥쳤다. 

 

중학교도 못 갈 처지였다. ‘소 꼬랑댕이가 낫나. 닭 대가리가 낫나?’ 선생님 조언을 받들어 부산여중 대신 영도 남여중에 수석 입학했다. 학비 면제로 졸업했고 성모여고 역시 학비 면제로 마쳤다. 대입을 앞두고 아버지가 그랬다. ‘네가 잘하는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할 수 있는 교대가 어떻노?’ 미대의 꿈을 접고 부산교대로 들어가 1970년 사직동 창신초등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했다. 

 

박 명장이 교직을 접은 건 1999년 8월. 6개월 더해 30년 채우면 훈장도 받고 연금도 훨씬 많아질 텐데 그러질 않았다. 젊은 교사를 받아들이기 위한 명예 퇴직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지만 그런 명분을 빌미로 얼른 사회에 나가고 싶었다. 오로지 염색만 생각했다. 세속의 훈장이나 연금은 안중에 없었다. 명퇴하는 그 길로 생애 처음 자신만의 작업실인 섬유예술원 ‘색깔사랑’을 서면에 열었다. 그리고 그해 끝자락인 1999년 11월 개인전을 가졌다. 

 

염색의 세계는 오묘하다. 원하는 색을 얻는 과정도 염색이 가진 오묘함의 하나다. 원하는 색을 얻는 과정은 비법이랄 수도 있고 느긋함의 철학이랄 수도 있다. 가령, 두 가지 색을 섞어서 초록색을 낸다고 할 경우 물감은 그냥 섞으면 되지만 천연염색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노랑물을 먼저 내고 그 다음에 파랑을 들인다. 그렇게 해야 초록이 나온다. 같은 과정을 여러 번 하는 게 힘들고 번거로워 천연염색을 배우는 사람이 줄어드는 추세다. 박 명장은 부산에서 염색공예를 가르치는 대학이 사라지는 현실이 딱하다. 

 

“너무 안타깝죠. 우리 고유의 염색기법을 복원하고 이어 가기 위해서라도 명장에 지원하게 됐죠.” 

 

박영혜 염색명장은 염색예술의 산업화, 염색예술박물관, 전통염색 보급 등을 위해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낸다.

▲박영혜 염색명장은 염색예술의 산업화, 염색예술박물관, 전통염색 보급 등을 위해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낸다.

 

먹물염색 전시 준비 중 … 염색예술박물관 열고파 

 

명장이란 호칭에 무게를 두지 않다가 불현듯 신청서류를 내게 된 건 천연염색이 처한 현실이 그리고 미래가 안타깝기 때문이었다. 같은 작업을 반복해야 하고 손과 옷이 먹물투성이가 되는 일을 누가 좋아할까.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내가 잘하는 일이기에 박 명장은 ‘50대에 신청 안 하고 일흔 다 돼서 신청하느냐’는 농반진반을 들어가며 명장의 길로 들어섰다. 

 

하고 싶은 일은 많다. 염색예술이 생명력을 담보하기 위한 산업화도 염두에 둬야 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부산만의 염색예술박물관도 지어야 하고, 전통염색의 보급과 외연 확장을 도모하는 전문서적도 내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이다. 요즘은 특히 먹물 염색에 공을 들인다. 먹물 염색을 하는 나라는 한·중·일 셋인데 일본 먹은 너무 진해서 경박하고 중국 먹은 우리나라 벼루에 갈면 깨어지기 쉽다. 먹은 우리나라 먹이 최고고 가장 한국적인 소재라서 잘만 하면 세계시장에서 통하지 싶다. 그래서 외국 관광객이 즐겨 찾는 서울 인사동 화랑에서 올 연말 전시회를 할 예정이고 먹물을 다룬 책이 두 번째 저서가 되지 싶다. 

 

“꾸준함이 탁월함을 뛰어넘습니다. 기본에 충실하면서 꾸준히 연구했던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박영혜 명장은 작업을 열심히 했던 작가로 기억되길 바란다. 손톱 밑에 먹물로 잔뜩 물들일망정, 염색일로 어깨 인대가 두 군데 끊어져 4년이나 고생했을망정 박영혜 명장은 길을 에둘러가거나 돌아가지 않는다. 한 발 한 발 더디지만 물러서지 않고 오늘에 이른 부산 유일의 염색명장 박영혜 작가. 그렇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더디지만 물러서지 않는다. 한여름 무더위에도 마침내 꽃을 피우는 봉선화처럼. 마침내 손끝에서 피어나는 봉선화 꽃물처럼.

작성자
동길산
작성일자
2018-08-31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부산이야기 9월호 통권 143호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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