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다이내믹 부산 제부산이야기 7월호 통권 142호호 기획연재

일본군 병영·포진지 그대로 남아있는 외양포 억압·수탈 세월 생생히 전하는 마을

걸어서 만나는 부산 역사 - 가덕도 다크투어길

관련검색어
가덕도,
다크투어,
외양포
내용

강서구는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과 강 서쪽 넓은 평야지대를 넉넉히 품고 있는 지역이다. 또 부산 서해안의 풍부한 연안생태계와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인해 다양한 물산이 사시사철 넘쳐나는 곳이다. 때문에 강서구는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혹독한 수탈과 억압의 세월을 견뎌내야 했던 곳이었다. 특히 가덕도는 일본군의 주요 군사거점으로 러일전쟁을 준비하고 이를 수행한 ‘진해만 요새 사령부’가 주둔해 그들의 침략야욕을 가감 없이 드러냈던 곳이기도 하다. 

 

제73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이번 ‘걸어서 만나는 부산 역사’는 강서구 가덕도 외양포 마을을 중심으로 당시 주둔했던 일본군 ‘진해만 요새 사령부’ 내 일본군 포진지와 군사시설, 병영의 흔적 등과 외양포 인근의 가덕도 등대를 찾아가봄으로써 일제강점의 역사를 천천히 따라가본다. 

 

 

가덕도 외양포 마을 전경. 

▲가덕도 외양포 마을 전경.

 

평화로운 섬마을에 들어선 일본군 사령부


부산에 100년 전 마을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정확히는 113년 전 조성된 마을이다. 가덕도 외양포 마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100년 전 마을’인 외양포(外洋浦). 외양포는 가덕도 남쪽 끝단의 조용한 갯마을이다.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빨강, 파랑, 초록색 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는 전형적인 어촌마을의 한적함이 묻어난다.

 

외양포 마을의 원래의 이름은 ‘외항포(外項浦)’다. 대항의 바깥쪽 목덜미(項) 형태의 포구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마을 전체가 100백여 년 전, 일본군 ‘진해만 요새 사령부’가 주둔해 있던 병영이었다. 현재의 외양포 마을이 원래는 일본군 병영이었다는 이야기다.

 

1904년 일본군은 러일전쟁을 일으킨 후 대한해협의 군사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외양포 마을 64가구 주민을 쫒아냈다. 이곳에 러시아 발틱함대와의 격전을 대비한 포대사령부를 건설·주둔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외양포는 대항마을보다 호구가 많았던 마을. 양천 허씨 집성촌이었던 마을주민들이 떠나기를 완강히 거부하자, 그들의 집과 세간을 불태우고 총칼을 앞세워 강제 이주시켜버렸다.

 

강서구 가덕도 외양포는 100년 전 일본군 진해만 요새 사령부 병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마을이다. 

▲강서구 가덕도 외양포는 100년 전 일본군 진해만 요새 사령부 병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마을이다.

 

대륙침략의 군사요충지인 외양포에 일본군 포진지 요새가 구축되고 군막사와 무기창고, 우물과 수리시설 등이 완료되면서 1905년 외양포는 ‘진해만 요새 사령부’의 주둔지로 대륙침략의 전초기지가 된다. 

 

일본 패망 이후 다른 마을로 떠났던 외양포 사람들이 돌아와 일본군 시설을 개조해 지금껏 생활하고 있다. 때문에 이곳은 아직도 ‘일제강점기’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현재 이 마을은 해군의 ‘군사지역’으로 개발이 제한돼 있어 마을 뒤 언덕에는 그 시절 ‘일본군 포진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일본군 막사건물들이 아직도 원형 그대로 남아 주민들의 거처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도시철도 1호선 하단역에서 대항까지 노선버스가 운행을 하고 있으며, 기존의 대항에서 외양포로 들어가는 좁은 언덕길을 대신하는 새 도로가 들어서 한결 편하게 마을진입이 가능하다.

 

100년 전 일본군이 만든 우물터. 

▲100년 전 일본군이 만든 우물터.


100년 전 마을 그대로 남아있는 ‘외양포’ 

 

외양포에는 현재 23여 호, 33세대가 살고 있다. 이들이 살고 있는 집은 모두 그 시절 요새 사령부 관련 건물들. 헌병대막사, 무기창고, 장교사택, 사병내무반 등을 지금껏 수리해 사용하고 있다. 아직까지 군 소유지로 묶여있다 보니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것. 광복 후 인근마을 무주택자들을 중심으로 군에서 장기 불하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외양포 방파제 앞 낚시점건물. 박정출(76) 씨 댁으로 당시 헌병대막사 자리이다. 부대 내 치안을 담당했던 곳이라 건물 지하에는 자체 격리시설인 감옥을 갖춰놓았다. 지금도 시설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한때는 고구마, 호박 등 수확한 농산물의 저장창고로 사용됐단다. 

 

매점 바로 앞 큰 일본식 기와집은 당시 무기창고로 쓰이던 건물. 지금은 두 가구가 가정집으로 나눠 쓰고 있다. 기름 먹인 나무로 집을 올린 목조건물로, 목조벽 외부에 함석을 덧대고 지붕은 일본식 기와를 올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나 비를 막기 위해 설치한 창문 위 눈썹지붕과 집 벽의 나무 비늘판도 일본 고유의 건축양식이다. 당시 건물의 원형을 제대로 보존하고 있는 건물 중 하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콜타르를 입힌 천장이 그대로 남아있다. 공간이 제법 넓어 생활하기에는 용이한 편이다. 현재 이장 이성태 씨 등이 살고 있다.

 

마을을 돌아보니 건물은 하나지만 지붕의 색과 모양이 다른 집들이 많다. 사령부 대장사택도 그렇고 장교막사, 사병내무반 건물도 그렇다. 이 시설물들이 민간에게 분할임대 되면서 한 건물을 여러 가구가 함께 나누어 쓰게 됐는데, 가구별 경계에 따라 지붕이 서로 다른 것이다. 어떤 가구는 새로이 함석지붕을 얹었고, 어떤 가구는 옛 기와지붕에 방수처리를 한 곳도 있다.

 

마을을 돌다보면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당시의 우물터도 몇 개 볼 수 있다. 마을 군데군데에 산재해 있는데, 제법 튼튼하게 지어져 아직도 우물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곳도 있다. 그중 바닷가 근처에 있는 한 우물을 살펴본다. 물이 아직도 찰랑찰랑하다. 샘을 판 뒤 물을 가두는 하단부는 큰 돌로 우물을 형성하고 상단부는 작은 돌로 마무리를 했다. 우물을 보호하는 우물대와 지붕 구조물은 붉은 벽돌로 견고하게 마감했다. 

 

외양포 마을 북쪽 언덕에는 진해만 요새 사령부 포진지가 있다. 포진지 안에는 발사대, 화약고, 상황실 등 시설이 그대로 남아있다. 

▲외양포 마을 북쪽 언덕에는 진해만 요새 사령부 포진지가 있다. 포진지 안에는 발사대, 화약고, 상황실 등 시설이 그대로 남아있다.

 

대한해협 진해만 사이 외양포 … 요새로 구축


마을 북쪽 야트막한 언덕을 향해 가다보면 요새사령부 포진지 입구가 나온다. 5~6m의 흙 제방을 진지 주위로 둘러쌓아 해로는 물론 육로 어느 곳에서라도 육안으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외부에서는 쉽게 보이지 않도록 설계한 ‘숨어있는 요새’다. 포진지 안에는 포 발사대, 화약고, 상황실 등이 남아있다. 

 

입구에 ‘사령부발상지지’라는 내용의 ‘요새사령부건립비’가 서 있고, 오른쪽으로 포 2대씩을 설치할 수 있는 포대터 3곳, 탄약고 3동이 보인다. 왼쪽에는 상황실 자리가 2개 남아있다. 진지의 크기는 1,400㎡(약 420평) 정도. 이 진지 주위를 토성을 쌓듯 돌아가며 쌓아올렸고, 외벽 주위로는 대숲과 갈대 등이 자생하고 있어 절묘하게 진지를 은폐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렇게 일본군은 외양포를 완벽하게 ‘요새’로 구축해 놓고, 진해만으로 들어서는 러시아 함대를 향해 일제히 포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다. 외양포를 둘러싼 각 봉우리에도 관측소와 초소를 만들어 해상공략에 대비했던 것이다. 

 

포진지의 포대터를 보면 총 6문의 대포가 설치돼 있었는데, 모두 국수봉 너머 대한해협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때문에 산에서 날아온 포탄의 발사지역을 상당시간 식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도 부산 근해로 지나는 배들은 어디서 날아올지 모를 포격에 상당한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포진지 뒤쪽 국수봉 일대에는 적함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관측소와 방어초소가 다수 설치돼 있었고, 포진지와 이곳 관측소를 연결하는 갈지(之)자 말길을 개설해 놓았다. 말길은 말을 이용해 군 인력과 탄약 등을 관측소까지 실어 날랐다고 해 불린 이름이다. 이 말길을 따라 능선의 각 관측소가 서로 연결된다.

 

포진지를 나오면서 보니 ‘요새사령부건립비’ 앞 입구에 당시 일본군 공동화장실터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본다. 6칸의 변기와 공동 소변기 구조가 선명하다. 이 화장실의 규모로 포진지의 인원이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겠다. 

 

1909년 점등한 옛 가덕도 등대. 지금은 등대 역할을 하지않고 부산시유형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다. 

▲1909년 점등한 옛 가덕도 등대. 지금은 등대 역할을 하지않고 부산시유형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다.

 

수탈하는 일본 선박 안전 위해 만든 ‘가덕도 등대’


외양포 마을에서 남쪽 산길을 따라 걷다보면, 몇 번의 군 검문소를 지나 가덕도 등대에 이른다. 1909년 12월 점등한 가덕도 등대는 현재 신축된 등대 건물과 문화유산인 구 등대 건물, 숙소, 등대 100주년 기념관 등이 있다. 가덕도 최남단 해벽 위에 위치해 있다.

 

부산시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된 구 등대 건물은 근대 서구 건축의 양식, 건축재료, 의장수법 등이 사용된 건물이다. 상당 부분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건축사적으로 문화재로의 가치가 돋보이는 건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곳도 일제식민지 시대의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다. 조선 수탈을 위해 드나드는 자국 선박의 안전을 위해 일제는 조선의 주요 해역마다 등대를 세우는데, 가덕도 등대도 그런 이유로 건설된 것이다. 

 

다시 외양포로 돌아와 갯가에 선다. ‘자그락자그락’ 작은 몽돌 구르는 소리가 참 듣기 좋다. 휴일을 맞아 많은 시민이 가족과 함께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곳에도 외부로의 침입을 대비해 화약을 뿌려놓았었다. 이곳으로 누구든 상륙을 하게 되면 갯가 일대는 온통 불바다가 되고 마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 말에 의하면 얼마 전까지도 갯바닥을 파면 화약잔재가 보이곤 했다는데, 몇 번의 큰물에 지금은 보이지 않는단다. 

 

한 마을 전체가 ‘일제강점기’ 때 얼굴을 그대로 갖고 있는 외양포 마을. 일제침략의 역사가 아직까지 속속들이 남아있는 곳이다. 역사는 흔적으로 남겨져 보존될 때 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뼈아픈 식민지 시대의 역사일지라도 보존하고 후세에 남길 일이다.

작성자
최원준
작성일자
2018-07-31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부산이야기 7월호 통권 142호호

첨부파일
부산이라좋다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이전글 다음글

페이지만족도

페이지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평균 : 0참여 : 0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를 위한 장이므로 부산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부산민원 120 - 민원신청 을 이용해 주시고, 내용 입력시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등 개인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광고, 저속한 표현, 정치적 내용, 개인정보 노출 등은 별도의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부산민원 120 바로가기